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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2016년 다해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03-24 조회수8,493 추천수1

2015년 12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회개 : 대림 제2주일(루카 3,1-6)

 

요한 세례자는 메시아가 오는 길을 닦기 위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기 위해 ‘회개’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죄가 용서받아서 마음을 고쳐먹는 것이 아니라 우선 회개 해야만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고 하셨다. 그러나 회개를 결심과 헛갈려서는 안 된다. 결심은 작심삼일이 될 수 있지만 회개는 결심과 같지는 않다. 어른이 되면 어린이가 하던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회개하면 죄를 짓거나 남을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요엘 예언자는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라고 외친다. 옷을 찢는 것이 결심이라면 마음을 찢는 것이 회개다. 예수님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를 통해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하는지를 깨닫고 아버지의 종으로라도 써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겸손한 맘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통해 진정한 회개가 무엇임을 가르쳐주신다. 회개하여 주님의 자녀가 된 것만으로도 진정으로 감사하고 겸손해져서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그때 비로소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알곡 : 대림 제3주일(루카 3,10-18)

 

예레미야서 23장 25절에서 32절에는 거짓 예언자와 참 예언자가 대비되며 등장한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들의 생각을 전하고 참된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그것을 전한다. 주님은 “쭉정이가 알곡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예레 23,28)라고 하시며 주님의 말씀이 들어있지 않은 예언을 쭉정이에, 말씀이 들어있는 예언을 알곡에 비유하신다. 창조 때부터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씨가 들어있는 알곡이었다(창세 1,29 참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 ‘말씀’을 품은 사람이다. 성모님께서는 성령으로 당신 태중에 ‘말씀’을 잉태하시고 엘리사벳을 찾아가셔서 그녀와 그녀 태중의 아기에게도 성령을 전해주셨다. 누구에게 도움이 되고 양식이 되려면 먼저 자신 안에 ‘말씀의 씨’를 품어 ‘알곡’이 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심판 때에 주님께서 키를 가져다가 그 안에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품고 있으면 구원하시고 그렇지 못한 쭉정이는 날려버리실 것이기 때문이다(루카 3,17 참조). 그런데 그 마음 안에 말씀을 품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은 그 안에 ‘말씀’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나누어 주고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며 더 요구하지 말고 아무도 강탈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알곡이 되는 유일한 길은 말씀을 자신의 삶에 품는 것이다.

 

 

태 : 대림 제4주일(루카 1,39-45)

 

‘태’는 여성만이 지닌 자녀를 건강하게 탄생시키기 위해 보호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사랑스러운 집이다. 자녀가 태 안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집의 주인이 세상 누구보다 그 집에 사는 아기를 사랑하는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사랑이 부족하다면 그 영향을 자녀는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통해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태중의 아기 또한 기뻐 뛰놀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좋은 것을 받아야 태중의 아기에게도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사벳은 또한 성모 마리아의 태중에 있었다고 보아도 무관할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성령으로 태어나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당신이 또한 하느님의 태중에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을 당신 태중에 모셨지만 또한 하느님의 태중에 있다. 이는 마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면서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만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성령을 주시는 교회 안에 잉태되어 있다면 우리 안에 잉태된 이들도 그 복을 받게 된다.

 

 

빛 : 예수 성탄 대축일(요한 1,1-18)

 

요한은 복음을 “한처음에”(요한 1,1 = 창세 1,1)라고 시작하며 자신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창세기를 다시 쓰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따라서 요한 복음을 읽을 때는 창세기와 연관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요한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하며 창세기 1장 3절에 창조된 ‘빛’을 연상시키게 만든다. 말씀이 곧 빛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인간이 ‘빛’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말씀이 사람으로 창조되지 않았다면 영원히 빛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행실이 악한 이들은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의 행위가 세상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빛을 꺼버리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러나 그 십자가가 참 빛이 되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참 빛이 된 것이다. 사랑을 하려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빛이 가르치는 대로 자신을 가꾸어간다. 그러나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어리석음이나 고통으로만 생각하고 행복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빛이 세상에 왔다면 우리는 그 빛을 통해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 비추어보면 그분의 모범적인 삶에 비해 내가 얼마나 비뚤어져있는지 잘 볼 수 있게 된다. 그 빛이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다. 그래서 빛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하고 창조되게 만드는 것이다. 빛이 세상에 왔다.

 

 

축제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루카 2,41-52)

 

축제라고 하면 즐거움이 떠오른다.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 무엇을 원하셨는지 다시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탈출 5,1). 이는 ‘나를 위해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내 앞에서’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어떻게 번역하든 축제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 주님이 있는 곳에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축제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축제 때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내려가지 않고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 머무셨을까? 아마도 삶 자체가 축제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구해주신 분, 나를 위해 죽어주신 분, 나를 당신 생명처럼 사랑하시는 분,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축제다. 성가정은 주님의 현존 안에 그 축제를 즐기는 행복한 가족인 것이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5년 12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1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구유 :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루카 2,16-21)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자마자 구유에 안치 되셨다는 사실은 단순한 하느님의 낮아짐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했던 것처럼 동물처럼 사는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주시며 우리 정체성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방법은 그 동물들에게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심으로써 당신에게 ‘의미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들을 위해 당신을 ‘양식’으로 내어주심으로써 당신을 먹는 인간들이 당신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주셨다. 구유에 놓이셨다는 뜻은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새로운 아담의 직무를 위해 인간을 위해 먹이가 되시겠다는 당신 소명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신 구유는 더 이상 짐승의 먹이통이 아니다. 현재 아기 예수님의 첫 번째 안식처였던 구유는 로마의 성모설전 대성당 제대 밑에 교회의 보물로 모셔져있다. 이는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모시는 인간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별 : 주님 공현 대축일(마태 2,1-12)

 

하늘에 별은 무수히 많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들이 따라온 별은 하느님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운행하는 별이어야만 한다. 이렇듯 성경에서 별은 하느님에 의해 파견 받아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는 도구로 사용된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샛별’(2베드 1,19)이나 ‘새벽별’(묵시 2,28: 22,16)로 상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운행하는 별로써 그분을 따르면 아버지께 이를 수 있도록 파견되신 분이시다. 사실 구약에서부터 한 별의 탄생, 즉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민수 24,17)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는 주위 국가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준 ‘다윗왕’이라고 해석되었다. 우리는 그 다윗의 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잘 알고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다시 말해 ‘참 다윗의 별’임을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만 아버지를 뵈옵는 영광이 온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오는 길을 열어주셨는데 바로 ‘교회의 파견’이다. 아버지께서 당신을 파견하신 것처럼 당신이 교회를 파견하셨다. 지금 우리에게 떠 있는 다윗의 별이 곧 가톨릭교회임을 믿고 따른다면 우리 또한 직접 그리스도를 만나 뵈옵고 경배할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발 : 주님 세례 축일(루카 3,15-16. 21-22)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때에 요한 세례자는 자신이 메시야가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루카 3,16)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말한다(루카 3,17 참조). 우리는 요한이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이 단순한 겸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적합한 신랑’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룻기에서 보아즈가 룻과 혼인하기 위해 그녀와 혼인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또 다른 이로부터 그 신랑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로 신발을 받는 장면을 기억하기 때문이다(룻 4장 참조). 신발을 지닌 이가 신랑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새롭고 깨끗한 신을 신겨줄 참다운 신랑이 당신이심을 알려주신 것이다. 요한 세례자 자신도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요한 3,29)라고 말하며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신랑임을 밝힌다.

 

 

포도주 : 연중 제2주일(요한 2,1-11)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의 중개로 그리스도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신다. 현실적으로 이미 포도주가 탕진되었다면 사람들이 충분히 취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도 혼인 잔치의 흥겨움을 깨지 않기 위해 성모님은 포도주를 그리스도께 청하고 있다. 사실 참 신랑은 그리스도이시고 성모님은 은총의 중개자로서 교회를 위해 ‘성령’을 청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피인데 이사야서에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포도를 밟아 죄의 용서를 위한 피를 흘려 자신의 옷이 붉게 물들게 된다는 예언이 나온다(이사 63,1-6 참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의 피가 없으면 우리는 그분과의 혼인잔치를 계속 유지할 수 없는데 성모님의 중개로 그분의 성령이 계속 교회에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성모님의 중개로 내려오는 그 성령의 힘으로 성체성사를 비롯한 모든 성사가 이루어져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가 유지된다.

 

 

기름 : 연중 제3주일(루카 1,1-4; 4,14-21)

 

성경에서든 전례에서든 ‘기름’은 무조건 ‘성령님’을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히브리어로는 ‘메시아’, 희랍어로는 ‘그리스도’라 한다. 예수님께서는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성령)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고 하시며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드러내셨다.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축성’, 혹은 ‘성별’된다는 뜻인데, 무언가를 성별한다는 의미는 그 무언가에게 ‘소명’을 부여함을 뜻한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별 되신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소명에 따라 복음선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결단을 하신다(루카 4,18 참조).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잇는 사랑의 직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과부와 나병환자 : 연중 제4주일(루카 4,21-30)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파견 받으신 ‘메시아’이심을 선포하시지만 그분의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기름부음 받은 이’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에 예수님은 엘리야를 파견하신 이방 지역의 한 과부와 역시 이방 민족의 나병환자 장수였던 나아만의 예를 드시며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을 나무라신다.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기근이 들어 곧 굶어죽게 되었음에도 파견된 엘리야에게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음식을 대접해 줌으로써 기근이 든 삼년 반 동안 창고에서 기름과 곡식이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1열왕 17장 참조). 나아만은 자신이 가진 자존심을 내려놓고 엘리사 예언자가 일러준 대로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음으로써 병이 깨끗이 나아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2열왕 5장 참조). 시돈 지방의 과부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바로 ‘봉헌’이고, 아람의 장수인 나아만의 경우는 ‘겸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겸손은 누구도 판단하거나 미워할 수 없는 마음에서 드러나고, 봉헌은 가진 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그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을 인정하는 데서 드러난다. 누구도 판단하지 않고 감사히 봉헌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1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2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그물 : 연중 제5주일(루카 5,1-11)

 

그물은 물고기를 잡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물고기를 잡으라고 명령만 하실 뿐 그물을 제공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물은 이웃의 영혼 구원을 위해 우리 자신이 준비하는 무엇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물코가 끊어져 있는 부실한 그물로 물고기를 잡으려 한다면 물고기는 그 구멍으로 다 빠져나가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제자들을 뽑기 전에 보신 것은 그들의 ‘그물을 잘 준비하는 성실성’ 이었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날이 샐 때까지 그물 내리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인내와 성실성’입니다.

 

물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자존심을 버리고 시키는 대로 다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릴 수 있는 ‘겸손함’이 가장 중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끝까지 완전한 그물이 되기 위해 자신을 손질할 수 있는 ‘성실함’인 것입니다. 성실함이 더 중요한 이유는 처음부터 완전한 그물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많이 부족했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그물을 완전한 모습으로 만들어갔습니다. 군인이 총을 손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어부는 늘 그물을 살피고 손질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가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잡은 영혼을 선물로 들고 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 모든 뜻에서 순종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지, 또 그런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킬 수 있는 성실함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유혹 : 사순 제1주일(루카 4,1-1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시어 광야로 나가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와가 뱀에 의해 죄를 짓게 된 결정적인 요인은 뱀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뱀은 항상 대화를 걸어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열매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냐며 하와를 자극합니다(창세 3,1). 하와는 다른 것은 다 먹어도 되는데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대답합니다(창세 3,3). 그러나 하느님은 먹지만 말라고 하셨지 만지지도 말라고는 하시지 않았습니다. 사탄과 대화하면서 하느님의 본질적인 뜻이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그저 금지된 열매로 보였던 것이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게’ 보이게 되었습니다(창세 3,6). 유혹자와의 ‘대화’를 스스로 허락함이 유혹에 빠지게 되는 근본원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다릅니다. 당신 생각을 첨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이렇게 오직 성경구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아주 짧게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자신의 ‘생각’이 섞이면 악마는 힘을 얻고 우리는 힘을 잃습니다. 이런 면에서 유혹을 이기기 위한 ‘단순함’이 필요합니다. 어린이들은 단순해서 큰 죄를 짓지 않습니다. 유혹은 자신의 생각, 혹은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단순하게 하느님께 맡기는 어린이와 같은 믿음으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초막 : 사순 제2주일(루카 9,28ㄴ-3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얼굴이 달라지고 의복이 하얗게 빛나며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장차 이루어질 일, 즉 ‘탈출기(엑소도스 : 탈출,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있던 베드로는 겁에 질려 자신도 모르게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는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탈출기에서 초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 축제 중 ‘초막절’은 본래 추수해 놓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 들판에 초막을 지어놓고 지키던 농경문화에서 온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하느님을 모시는 성막을 짓고 또 각자 초막을 짓고 떠돌던 사십 년의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축제로 바뀌었습니다. 이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엔 광야에서 목말랐던 시절을 회상하며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도가 행해지고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행사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날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라고 하시며 당신이 광야에서 물을 쏟아주었던 그 ‘바위’(1코린 10,1-4 참조)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 물이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요한 7,39)이라고 해석합니다.

 

이런 의미로 오늘 복음에서 ‘초막’과 ‘초막절’, 그리고 당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또 ‘탈출기’에 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은 당신 죽음을 통해 옆구리에서 흘러나오게 될 ‘물’인 성령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위가 깨지며 물이 흘러나왔듯이 그리스도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부서지고 찔리시어 당신 옆구리에서 우리 갈증을 채워줄 성령의 생명수를 부어주시겠다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물 : 사순 제3주일(요한 4,5-42)

 

지하수를 찾아 이 물이 고이게 만든 ‘우물’은 물이 부족한 이스라엘 땅의 큰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을 퍼서 나르는 일은 보통 여성의 몫이었는데(창세 24,11; 요한 4,15 참조), 그런 이유에서인지 성경에서 물이 풍부한 우물은 청순한 여성의 아름다움 및 구원에 비유되고 있습니다(아가 4,15).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잠언 5,15)란 표현은 남편이 아내에게 정조를 지키도록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여성은 물이 충만해야 하는데 그 물은 결국 남편에게서 받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성은 땅을 의미하는데 물이 풍부하려면 하늘로 상징되는 남자에게서 ‘비(씨앗)’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신부인 교회의 상징인 사마리아 여인에게 신랑으로서 당신이 물을 주시겠다고 선포하시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지금까지 6명의 남자와 살고 있었지만 진정 자신을 기름지게 할 참 생명의 물로 자신을 에덴동산으로 바꾸어놓을 참 남편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물은 항상 성령을 의미하며(요한 7,39 참조) 참 성령을 주시는 신랑이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당신과 한 몸을 이루게 할 교회의 참 신랑이십니다. 이사악도(창세 24장 참조) 모세도(탈출 2,11-22 참조) 예수님도(요한 4장) 오늘 복음에서처럼 자신의 아내를 우물가에서 찾게 되는 이유가 바로 ‘물(성령)’이 없이는 혼인이 성사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2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3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송아지 : 사순 제4주일(루카 15,1-3. 11ㄴ-32)

 

오늘 복음에서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아버지는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자 큰아들은 평생을 아버지만을 위해 일한 자신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주지 않더니 집에 손해를 입힌 동생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준다고 분통을 터뜨립니다. 여기서 송아지가 단순히 염소보다 큰 아버지의 선물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위에 등장하는 ‘겉옷, 반지, 신발, 소(송아지)’ 등은 성경에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상징들입니다.

 

창세기 18장엔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세 손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 손님은 하느님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 손님을 극진히 대접했기 때문에 늦은 나이였지만 그 보답으로 생명과 같은 ‘아들’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세 손님에게 극진히 대접했던 것이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였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는 흠 없는 양과 함께 하느님께 드리는 번제로 사용되었고(레위 9,3 참조), 수송아지는 속죄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레위 9,2 참조). 그러나 소를 섬겨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지 않는 모습을 성경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우상숭배라 가르치고 있습니다(탈출 32,4; 신명 9,16 참조). 반면 자기 자신을 상징하는 소를 잡아 바치는 이에게는 성령의 불을 내려 그 제단을 불사르고 그를 당신 것으로 삼으십니다. 이 사건이 엘리야가 카르멜 산에서 우상숭배자들과 대결할 때 상징적으로 일어났습니다(1열왕 18, 38 참조).

 

오늘 복음에서의 상황을 재해석하자면 이렇습니다. 동생은 결국 아버지의 ‘종’으로라도 써 주면 감사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지만, 형은 여전히 자신이 고생한 것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가를 바라고 일하는 사람은 종이 아니라 삯꾼입니다. 아직 자신을 주님을 위해 온전히 내어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버지는 맏이에게 그 보상으로 당신의 전부를 상징하는 송아지까지는 내어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선물은 자기 자신을 봉헌하여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치는 것만큼 받는 것이 관계의 이치입니다. 자신을 바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내어주십니다.

 

 

율법 : 사순 제5주일(요한 8,1-11)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 죽여야 하는데 예수님 생각은 어떠냐고 질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이 아닌 사랑이 구원임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율법대로 하라고 하면 당신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고 그렇다고 모세의 율법을 어기라고 하면 당신이 돌을 맞으실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율법의 완성이 사랑입니다(로마 13,8 참조). 그러나 아직 그들이 여기까지는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목적’이 결국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데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이 필요합니다(로마 3,20 참조). 따라서 율법의 목적까지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자신이 율법을 통해 완전하지 못하기에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자비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타인을 판단하는 사람은 아직도 율법을 주신 목적이 구원이 아닌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남의 죄를 판단함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먼저 깨달아 타인을 향해 들고 있는 돌을 내려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귀 : 주님 수난 성지 주일(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복음 : 루카 19,28-40)

 

나귀는 말과에 속하는 짐승이나 말보다는 몸집이 작고 볼품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시는데 말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선택하십니다. 이는 분명 즈카르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시다는 의미입니다(즈카 9,9 참조). 그러나 나귀를 타고오시는 것이 단순한 겸손만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오늘이 바로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성전으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수난 받고 죽으시려는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사악을 주님께 제물로 바칠 때 나귀는 그 제물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창세 22,3 참조). 사실 이사악이 바쳐졌던 곳이 바로 모리야 산이고 모리야 산에 성전이 지어진 것입니다(2역대 3,1 참조). 이사악이 나귀를 타고 모리야 산으로 향했다면,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모리야 산 위에 세워진 성전으로 향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귀가 우리 죄 사함을 위한 겸손한 제물을 운반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즈카르야는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이 ‘임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금을 상징하는 팔마나무의 가지들을 흔들며 자신들의 겉옷을 밑에 까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하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시는 것이 맞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임금님이 되시기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아마포 : 예수 부활 대축일(요한 20,1-9)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실 때 아마포로 감싸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무덤에는 아마포만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아마포에 싸여있지 않으십니다. 사실 아마포에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아마포는 아마라는 식물의 목질 부분을 이용하여 만든 직물로서 여름에 입으면 시원하기는 하지만 뻣뻣하여 잘 구겨집니다. 구약 전통에는 ‘사제들’이 성전 안에서 예식을 행할 때 양털로 된 옷은 입어서는 안 되며(에제 44,17 참조) 겉옷은 물론이요 속옷, 그리고 띠와 머리에 쓰는 것까지도 아마포로 지은 것을 입어야 하는 규정이 있었습니다(레위 16,4 참조). 이렇듯 구약에서는 아마포를 입은 사람이 성별된 사제를 의미했고, 요한 묵시록에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신부로 성별된 이들만이 ‘의로운 행위’(묵시 19,7 참조)를 상징하는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아마포를 벗으셨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인간의 속죄를 위한 사제 직무를 마치셨음을 의미합니다. 사제도 성전에서의 직무를 마친 다음에는 아마포 옷을 벗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남겨진 아마포 옷을 누가 입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새로운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사제로서의 그 의로운 행위를 마친 다음에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3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4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숨 : 부활 제2주일(요한 20,19-31)

 

‘숨’은 히브리어로 루아흐(ruach), 희랍어로 프네우마(pneuma)이고 ‘바람, 얼’ 등으로도 번역됩니다. 성경에서 인간의 호흡을 나타내는 이 ‘숨’이란 단어는 ‘영’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성령’의 가장 강력한 상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시기 위하여 “성령을 받아라”고 하시며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분의 영이 당신의 호흡을 통하여 제자들에게로 들어가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의 권한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마지막 과정으로 ‘숨’을 코로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습니다(창세 2,7 참조). 이 숨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사람에게서 떠나고 사람이 생명체가 아닌 하나의 살덩어리에 불과하게 됩니다(창세 6,3 참조). 호흡은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창세 2,7). 숨을 쉬지 않는 것과 성령을 지니지 않은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숨은 ‘심장’을 통하여 ‘머리’와 온 ‘육체’ 구석구석에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합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심장이 상징하는 ‘마음’도, 머리가 상징하는 ‘정신’도, 육체인 ‘몸’도 산소 부족으로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공급이 떨어지면 행동도 제 맘대로 안 되고, 생각도, 마음도 통제가 되지 않게 됩니다. 몸의 호흡이 끊어지면 안 되는 것처럼, 영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령님을 내 안에 모시는 ‘기도’도 끊어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내가 기도하는 방법은 숨 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백 쉰 세 마리 : 부활 제3주일(요한 21,1-19)

 

요한복음 21장에는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가 “백 쉰 세” 마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십계명을 상징하는 ‘10’을 구약으로,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7’을 신약으로 여겨 1부터 17까지 더하면(1+2+3+4+…+16+17) ‘153’이 나와 이는 신·구약을 통틀어 하느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받은 이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현대에서는 더 명확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각 문자마다 숫자 값이 매겨져 있는데, ‘하느님의 아들들’이라는 히브리어 ‘베니 하 엘로힘’의 알파벳 숫자들을 더하면 153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성경에서 ‘천상 예루살렘’이나 ‘성전’을 의미합니다. 요한 묵시록에 의하면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전은 가로-세로-높이가 같은 정육면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묵시 21,16 참조). 아우구스티노 성인에 의하면 사각형이나 육면체는 이리 굴려도, 저리 굴려도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서기 때문에 ‘하느님의 집’을 상징하는 동시에 ‘구원’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구약의 계약의 궤를 모셔두었던 지성소도 가로-세로-높이가 모두 같았고 에제키엘이 보는 성전의 지성소도 마찬가지로 길이와 너비가 모두 스무 암마가 되는 네모반듯한 공간이었습니다(에제 41,4 참조).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153은 즉 1의 세제곱인 1, 5의 세제곱인 125, 3의 세제곱인 27을 더한 숫자입니다. 이런 숫자를 트리플 큐브 넘버(Triple Cube Number)라고 하는데 큐브는 세제곱을 의미하며 또한 정육면체를 의미하고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곳인 ‘지성소’나 ‘성전’을 의미합니다. 트리플 큐브 넘버는 153과 370, 371, 407, 이렇게 네 개밖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에페 2,22)라고 말했듯이 153이란 숫자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곧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지성소요, 참 성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지극히 세 번 거룩한 장소인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인 교회가 곧 그리스도와 한 몸인 지성소요, 성전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목소리 : 부활 제4주일(요한 10,27-30)

 

요한복음에서 ‘목소리(포네 : fone)’란 단어는 ‘빛’이나 ‘계명’, ‘머무르다’처럼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우선 ‘구원받는 백성’은 곧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양들’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27)라고 하시며 당신 목소리를 알아듣는 이들을 ‘당신 소유’라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른다’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또한 그분을 따르고 그분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증명됩니다(요한 15,10 참조). 그분의 계명은 ‘이웃 사랑’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모르는 이들까지도 당신 목소리를 알아들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0,16). 이는 비 그리스도인들도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면 이미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는 구원된 백성들이라는 뜻입니다. 목소리는 분명 한 번은 들어봤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데 누군가를 미워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다(요한 5,37 참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의 원체험’입니다. 사랑이 곧 하느님이시라는 깊은 깨달음입니다. 사랑이 곧 목자의 목소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목소리가 그 안에 살아 숨쉬기 때문에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영광 : 부활 제5주일(요한 13,31-33ㄱ. 34-3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라고 말문을 여십니다. 영광은 자신이 챙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남이 주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아버지가 챙겨주시고, 아드님은 아버지를 챙겨줍니다. 아드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께 당신의 영을 돌려드림으로써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 자신은 낮아져야 하고,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자신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준 사람을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해 주실 것인데 이것이 곧 ‘부활’입니다. ‘영광’(doxa)은 따라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성령’이고 아버지께서 내려주시는 ‘성령’인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생명인 성령을 보냄으로써 상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런 사랑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당신께 영광을 줄 수 있다고 자신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영광(생명)을 추구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지 못하고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영광을 드려야만 영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어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들을 당신께서도 성령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4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5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보호자 : 부활 제6주일(요한 14,23-29)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면 당신 계명을 지킬 것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 “다른 보호자”(요한 14,16), 곧 “진리의 영”(요한 14,16)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진리의 영은 곧 성령이신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10일 만에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위에 내려오셨습니다. “10”은 보통 구약의 ‘십계명’을 연상시키기에 성령은 ‘계명’을 지키려는 이들에게만 약속된 보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왜 “보호자(파라 - 클레토스 : para-kletos)”라고 부르셨을까요? ‘파라(para)’는 ‘옆’을 의미하고 ‘클레토스(kletos)’는 ‘부르다(kaleo)’란 동사의 파생어입니다. 옆에서 부르고, 가르치고, 기억하게 해 주고, 도와주고, 이끄시고, 변호해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성령님을 받은 이들은 ‘마음의 평화’를 지니게 된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가 옆에서 항상 보호해주실 때 느끼는 그 평화가 보호자이신 성령을 받은 이들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든든한 보호자이신 성령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계명을 지킬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 의지를 지켜주실 분이 항상 옆에 있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증인 : 주님 승천 대축일(루카 24,46ㄴ-53)

 

예수님은 승천하시며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곧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알아볼 수도, 그래서 증언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의 증거자는 성령이십니다. 증언하는 사람을 희랍어로는 ‘마르투스(martus)’라 하고 이 말에서 순교자라는 말의 ‘마르티르(martyr)’가 나오게 됩니다. 나의 죽음 없이는 성령께서 순수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결국 당신께서 당신 자신의 십자가상 죽음으로 아버지를 ‘증거’하였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자신들의 죽음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상징하는 바빌론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를 마시며 즐거워하겠지만(묵시 17,6 참조), 하느님 나라에는 오직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묵시 20,4)만이 합당하게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문 : 성령 강림 대축일(요한 20,19-23)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문’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기 위해 망대를 세워놓고 군인들이 숙직하며 안과 밖을 감시하였습니다. 성문은 또한 두 겹으로 되어 있어서 그 중간에 장로들이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는데(창세 23,10, 룻 4,1 참조) 이는 성문이 그 도시에 들어와도 되는지 안 되는지 판결하는 심판의 상징적 장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0,9).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들여보내시기 위해 당신 자신이 그 문을 여신 방식은 바로 ‘꿰뚫림’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분의 옆구리가 바로 ‘문’입니다. 이는 노아가 방주의 창문을 열고 비둘기를 날려 보내 그 비둘기를 맞아들이는 땅 위에 내려앉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옆구리에서 피와 물을 쏟으심으로써 그 성령을 받는 이들 안에 들어가 사시고 또 그들을 당신 문을 통해 들어오게 하십니다. 비록 제자들이 두려움에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모여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시고 성령을 부어주십니다. 믿음을 가진 이는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오는 성령을 타고 그분 심장으로 헤엄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 : 삼위일체 대축일(요한 16,12-15)

 

사전적 의미의 ‘진리’는 허위에 대립되는 말로써 논리의 법칙에 일치하는 지식, 혹은 누구나 인정하여야 할 보편타당한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를 단순히 ‘옳은 것’의 수준으로만 받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따라 다시 정의하면 ‘진리는 성령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고 감당할 수도 없는 주님으로부터 전해지는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의 원천은 하느님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으로부터 기원하고 인간을 통해서 전해지는 모든 지식들은 진리가 아니란 뜻입니다. 인간의 머리로 찾아낸 법칙들에 너무 큰 신뢰를 두면 스티븐 호킹처럼 ‘신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의심은 또 다른 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뱀의 말을 믿었더니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된 것처럼, 인간은 인간의 판단에 신뢰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요한 14,6 참조).

 

 

쉰 명 :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루카 9,11ㄴ-17)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실 때 사람들을 ‘쉰’명씩 앉히게 했습니다. 왜 쉰 명씩 앉히셨을까요? 분명 ‘50’이란 숫자가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50이란 숫자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소돔을 멸망시키려는 주님께 혹시 의인 50명이 소돔 땅에 있다면 함께 멸망시키실 것이냐고 묻는 장면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주님은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창세 18,26)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는 ‘성체’를 연상하게 만드는데, 우리 안에 주님의 몸이 들어있다면 그 성체 때문에 우리가 멸망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열왕기 하권 1장에 엘리야와 아하즈야 임금 사이의 이야기에서 여러 번 나옵니다. 병이 든 아하즈야 임금은 엘리야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50명씩 보내는데 그들은 계속 “임금님께서 (빨리) 내려오라고 분부하셨다”(2열왕 1,9, 11)고 말합니다. 이들은 도움을 청하면서도 자기 왕들의 힘을 믿고 오히려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립니다. 오직 마지막에 온 50명은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저의 목숨과 당신의 종들인 이 쉰 명의 목숨을 귀하게 여겨 주십시오”라고 하며 자신들의 목숨이 자신들의 병든 왕이 아닌 하느님의 사람에게 달려있음을 무릎 꿇고 고백합니다. 이리하여 엘리야은 그들 무리에 섞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성체는 자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5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6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외아들 : 연중 제10주일(루카 7,11-17)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예수님은 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십니다. 이 기적을 보고 난 후 사람들은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고도 하고,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고도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기적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구약의 큰 예언자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머무실 수 있도록 하느님의 계명을 받아 내려왔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자신들의 계명인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계명판을 깨뜨리면서 동시에 금송아지도 깨뜨렸습니다. 모세는 계명판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는 것의 죽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올라가 새로운 계명판을 가져내려와 그것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안에 살게 하였습니다. 외아들이나 맏이는 가장 소중한 생명과도 같은 ‘내 자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입니다(갈라 2,19 참조). 예수님은 그렇게 외아들을 잃은 과부처럼 된 사람에게 오셔서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주십니다. 주님 외에 자신의 생명처럼 여길 아무 것도 없어야 참 생명의 주인이 우리에게 오시고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십니다.

 

 

향유 : 연중 제11주일(루카 7,36-8,3)

 

향유는 올리브유에 향료를 첨가해 만든 것입니다(탈출 30,25). 그리고 순수한 나르드 향유처럼 그 자체로 방향을 가진 기름(마르 14,3)도 있습니다. 향유는 화장품(룻 3,3; 유딧 10,3), 장례용(마태 26,12; 마르 14,3. 8), 혹은 약품으로도 쓰였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매우 고가의 물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마르 6,37; 요한 6,7 참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와 한 죄인 여자가 당신을 접대하는 모습을 비교하십니다. 바리사이는 초대해 놓고도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그 죄인인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었고, 시몬은 머리에 바를 기름도 주지 않았지만 그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발에 발라 주었습니다. 성경에서 “향유와 향이 마음을 기쁘게 하듯 친구의 다정함은 기운을 북돋아 준다”(잠언 27,9)고 하듯이, 향유는 곧 ‘다정함’을 의미하고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에게 향유를 발라주는 것이 바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 머리에 향유를 발라주시고 술잔도 가득히 부어주셨습니다(시편 23,5 참조). 그분 앞에서 계산을 하며 아낀다는 말은 그만큼 죄도 덜 용서받았기 때문이고 그만큼 덜 주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바치는 예물이나 시간, 애정 등이 아깝게 여겨진다면 진실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먼저 발라주신 향유의 값을 먼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 향유란 성령이요, 당신의 피이며, 생명 자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분께 드릴 수 있는 향유는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어주셨다는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향유는 또한 그분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입니다(마태 26,12; 마르 14,8; 요한 12,7). 내가 그분께 바치는 사랑의 예물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 발라드리는 나의 향유입니다. 헌금을 할 때 나를 위한 그분의 죽음의 값으로 봉헌하는 향기로운 예물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흘 : 연중 제12주일(루카 9,18-24)

 

초대 교회의 세례 터에 가보면 세례를 받기 위해 물 속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통은 세 개요, 올라오는 계단도 세 개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흘이란 숫자는 참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인간이 자신을 버리며 죽어야하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물론 사흘 마지막 때엔 주님의 부활의 은총이 선사됩니다. 따라서 사흘은 죽음과 부활 즉, ‘세례’의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례란 바로 당신 십자가 죽음으로 사흘 동안 땅 속에 계시다가 다시 살아나셔야하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동안 있다가 나온 것과 같고(마태 12,40 참조), 예수님께서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던 말씀과 같습니다(요한 2,19-22 참조). 구약에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사악을 바치기 위해 사흘 동안 모리야 산으로 가는 것과 같고(창세 22,4 참조),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사흘을 걸어서 드리려던 예배와 같습니다(탈출 3,18: 5,3: 8,23). 자신을 사흘 동안 주님의 뜻 안에 파묻지 않는 예배란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사흘 동안의 죽고 새로 태어남의 과정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뒤따라오게 되는데, 예수님은 이를 당신 부모에게 깨닫게 해 주기 위해 부모에게서 벗어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흘 동안 머물다가 발견되기도 하셨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마도 이 기억을 지니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이 셋째 날을 기다릴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그들이 사흘 동안 굶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군중을 가엾게 여기셔서 그들을 배부르게 하십니다(마태 15,32 참조). 하느님은 당신 뜻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이들을 그 땅 속에 묻힌 상태로 결코 그냥 놓아두시지 않습니다. 사흘이란 바로 그렇게 주님 뜻을 위해 죽은 우리 자신을 사흘 전에 반드시 살려주시겠다는 부활의 약속인 것입니다.

 

 

쟁기 : 연중 제13주일(루카 9,51-62)

 

오늘 복음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며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첫 제자들이 그물과 배를 버리고 당신을 따랐듯이, 또한 가족에 대한 애정도 끊어버리려는 단호함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쟁기’라는 단어가 매우 날카롭게 다가옵니다. 집회서에서는 “쟁기를 다루면서 막대기 휘두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황소를 몰면서 자기 일에 몰두하며 송아지 이야기밖에 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지혜로워질 수 있겠느냐?”(집회 38,25)라고 하며, 쟁기질을 하는 것 자체가 자기 일에 빠져 하느님의 지혜는 찾지 않는 어리석음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엘리사 예언자를 제자로 부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엘리사는 겨릿소를 잡아 쟁기를 부순 다음 그 위에다 고기를 구워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사보다 더 강한 결단력을 요구하시는데, 이것이 모든 애정을 끊으라는 요구입니다(루카 14,26 참조). 이런 의미로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 자신을 바쳐야하는 제단이 바로 쟁기라 할 수 있습니다. 쟁기를 부숴 내 자신을 불사를 수 있는 결단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당신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6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7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사람들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마태 10,17-2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이들이 ‘사람들’이라 하면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람들’에 속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요한 복음에서 ‘세상’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였고(요한 1,10 참조) “세상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요한 3,19 참조). 예수님은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셨지만(요한 6,33 참조) ‘세상’은 예수님을 미워하였습니다(요한 7,7 참조). 예수님은 그 세상과 싸우셔서 이겨야만 했고(요한 16,33 참조) 그 세상의 우두머리를 밖으로 쫓아내셨습니다(요한 12,31 참조). 세상은 주님이 아닌 어떤 ‘우두머리’를 섬기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태초에 흙으로 ‘사람’(아담)을 빚어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 즉 성령님을 불어넣으시니 비로소 ‘사람’이 “살아있는 생명체(네페쉬 하야)”가 된 것입니다(창세 2,7 참조).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받아 주님을 섬기는 이들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이들이 그냥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안에 계신 성령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때가 되면 알려주실 것이고 박해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0,20 참조).

 

 

기름과 포도주 : 연중 제15주일(루카 10,25-37)

 

오늘 복음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름과 포도주’는 일반적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해 주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두 가지 물질은 성령님을 상징하는데 자주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라고 하시며, 당신이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히브리어로 기름부음 받은 자)임을 선포하셨습니다. 포도주는 미사 때 그리스도의 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 붉은 즙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위해 당신 자신을 으깨어 짜 내신 당신 피와 흡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착한 사마리아인은 죄로 상처받은 인간을 위해 당신 옆구리에서 흘리신 피로 치유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며 강도 만난 사람을 맡기고 떠나는데 그 여관은 곧 당신 성령을 부어줄 교회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교회는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부어주신 성령으로 교회에 맡겨진 모든 이들을 치유하고 다시 살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발치 : 연중 제16주일(루카 10,38-42)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께 ‘행동’으로 영광을 드리려는 이들을 대표하고, 마리아는 기도로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이들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행위로 분주하게 일하는 마르타보다는 당신 곁에서 당신 말씀을 경청하는 마리아를 칭찬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리아의 자세를 통해 기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하는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발이라는 신체부위는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정결하지 못해서 목욕을 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온 몸이 깨끗해진다고 할 정도로 더러운 땅과 가장 가까이 접하는 부위입니다(요한 13,10 참조). 따라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만물을 그 발아래 두게 하셨다는 표현은 상대에 대한 ‘왕권’을 나타냅니다(시편 8,7 참조). 발은 또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참조)라는 말대로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복음 선포자의 사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발이 더럽다면 우리 구원을 위해 더러움을 디디셨다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기도는 그 발밑에 우리 자신을 두며 그분의 우리에 대한 왕권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내 뜻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에 더욱더 순종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 : 연중 제17주일(루카 11,1-13)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방법은 안 가르쳐주시고 ‘주님의 기도’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청하라’는 의미로 자고 있는 벗에게 한밤중에 빵 세 개를 귀찮을 정도로 청하면 귀찮아서라도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의미로 어떤 기도를 하던 ‘꾸준할 것’만을 요구하십니다.

 

한 할아버지가 매일 농사일을 마치고 성당에 들어갔다가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할아버지가 그렇게 기도를 짧게 하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신부님은 어느 날 임종직전인 그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갔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편안하고 기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이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예수님이 매일 저녁 오셔서 제 이름을 한 번씩 부르고 가시는데 어떻게 기쁘지 않겠어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방법보다는 꾸준함이 더 중요합니다. 십자성호를 잠자기 전에 긋더라도 그것이 매일 꾸준할 수 있다면 참 기도이고 믿음의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남겨놓고 가십니다. 하느님 나라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4,17 참조). 사실 주님의 기도가 하느님 나라가 오시기를 청하는 것인데 기도의 목적은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하느님나라의 행복을 이 세상에서 먼저 누리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덤으로 해 주실 것입니다(마태 6,33 참조).

 

 

모든 탐욕 : 연중 제18주일(루카 12,13-21)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자신에게 올 유산까지 가로챈 형에게 자신에게도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탐욕’을 경계하라고 하시며 재산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법입니다(마태 6,21; 루카 12,34 참조).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면 지금 재산을 찾고자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은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 안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욕망하는 것 안에 갇혀 살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에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이 오로지 하느님 나라여야만 합니다. ‘모든 탐욕’을 경계하며 자신의 마음을 하늘에 둡시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7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8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띠 : 연중 제19주일(루카 12,32-48)

 

예수님은 당신이 마치 도둑처럼 언제 올지 모르니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권고하십니다. ‘띠’는 옷을 바로잡아 활동을 하는데 거추장스럽지 않도록 허리나 가슴에 매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활동이 없을 때는 띠가 몸을 조이기 때문에 풀어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양을 잡아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그 양고기를 집 안에서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고 하십니다. 이 파스카 예식이 현재로 이어지는 것이 미사인데 ‘미사’(Missa)는 ‘파견하다’(Mittere)는 라틴어 동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체를 영하며 ‘아멘!’이라고 응답하는 것은 쉬겠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소명을 받아 허리에 띠를 매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쥐고 그 받은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파견된다는 뜻입니다. 성체를 영하며 받는 소명이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15,12)는 새로운 계명의 완수입니다. 띠는 사용하지 않으면 썩어버립니다. 주님을 모시면서도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썩어버리는 띠처럼(예레 13,1-13 참조), 포도나무에서 떨어져나간 가지처럼 말라버리게 될 것입니다(요한 15,6 참조).

 

 

불 : 연중 제20주일(루카 12,49-5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을 내리기 위해 당신이 ‘세례’를 받아야하는데 “그 일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얼마나 짓눌려야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란 곧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흘리실 ‘피’가 곧 ‘불’인 것입니다. 그분의 피가 우리 마음 안에 떨어지면 우리 마음은 성령으로 불타게 됩니다. 인간이 그리스도와 맺어야 하는 계약은 ‘피’로 맺는 계약이기도 하면서(마태 26,28 참조) ‘성령’으로 맺는 계약이기도 합니다(2코린 3,6 참조). 이렇듯 피와 성령은 하나입니다(1요한 5,8 참조).

 

그런데 주님의 성령은 어떤 이에게는 은총이 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소돔을 멸망시키실 때 유황불로 멸망을 시키셨는데 그 불은 롯을 소돔으로부터 구원하기도 하였지만 소돔 사람들은 그 불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창세 19,24 참조).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주실 성령의 불이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생명나무를 먹기에 합당하지 않게 된 아담과 하와를 불칼로 갈라놓으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커룹들이 들고 있는 그 불을 통과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은 “불에 타는 산”(신명 9,15)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성령의 불을 감당할 수 없다면 주님이 사실 거룩한 산이 되지 못합니다. 그 불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제물이 봉헌되어야 하는데(1역대 21,26 참조) 그 제물이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엘리야가 소를 잡아 제단에 놓고 주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소를 살랐듯이 누구든 자기 자신을 바치지 않는 사람은 성령께서 내려 계속 타고 있을 재료를 잃게 됩니다(1열왕 18,38 참조).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하는데, 그 불을 스스로 꺼버리는 사람들이란 자신의 뜻을 제물로 봉헌하지 못하여 주님의 뜻인 이웃과 화목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입니다(루카 12,57-59 참조).

 

 

좁은 문 넓은 문 : 연중 제21주일(루카 13,22-30)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구원받을 사람은 적겠느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적다는 의미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넓은 문으로 들어온 이들은 마지막 날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좁은 문은 ‘정의’를 실천한 사람들이 들어오는 문이겠고, 넓은 문은 ‘불의’를 행한 사람들의 문일 것입니다.

 

성경에서 ‘정의’란 두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신명 25,15 참조). 반대로 ‘불의’는 상황에 따라 판단의 기준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자기가 죄를 지은 것은 용서를 청하면서 타인이 지은 죄는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곧 불의입니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를 원한다면 타인의 죄도 용서하는 것이 정의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의가 가져오는 것은 “죽음뿐”입니다(토빗 14,11 참조). 자비를 입었다면 당연히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면 백 데나리온 빚진 것은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자비를 입어도 자비를 베풀지 못하여 결국 주님을 보지 못하게 되는데(이사 26,10 참조), 이런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불의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뜻입니다. 서로 판단하는 것부터가 이미 불의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1코린 6,7 참조).

 

 

영광 : 연중 제22주일(루카 14,1.7-14)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가장 끝자리에 앉아야만 나중에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번역은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원어로는 “영광(Doxa)이 있을 것이다”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은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 즉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바라볼 때 “주님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났다”(탈출 16,10)라고 묘사하듯 성령님은 구름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모세가 만남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들어갈 수 없었는데 구름이 천막 위에 자리잡고 그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차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탈출 40,35 참조). 인간은 성령의 궁전인데, 성령을 모실 수 있는 자격은 바로 자신을 끝자리에 놓을 수 있는 ‘겸손’입니다. 모세만큼 세상에 겸손한 사람이 없었기에(민수 12,3 참조) 성령으로 충만하여 얼굴에 빛이 나기도 했습니다(탈출 34,29 참조). 이사야서에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이사 49,3)라고 하듯이,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한 성모님께 성령님이 내려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죄란 바로 교만에서 시작하는데 모든 인간은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로마 3,23 참조). 모두가 높아지려 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오직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성모님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는데 이는 오직 성모님의 겸손한 믿음 덕분이었습니다(요한 2,11 참조). 영광은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랑이요 생명이요 선물이요 성령입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8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9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탑 : 연중 제23주일(루카 14,25-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거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탑을 세우는데 기초만 끝내놓고 마치지는 못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그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가족 간의 애정이나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마음이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가 되고 결국 믿음을 중도에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겨 그것이 하느님 탓이라고 여기며 성당에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성경에서 ‘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벨탑’입니다(창세 11,1-9 참조). 바벨탑은 인간이 하느님처럼 높아지려는 욕망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노력하면 하늘까지 닿아 하느님과 동등해지거나 더 높아질 수 있다고 믿는 ‘교만’의 상징인 것입니다. 이렇게 교만한 이들의 특징이 주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러한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단결하려고 해봐야 결국엔 분열만 남게 되어있습니다. 이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기 위해 탑을 세우기는 했으나(창세 11,4 참조) 주님께서는 언어를 갈라놓으셔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어버리셨습니다(창세 11,8 참조). 가족 간의 단합을 위해 미사에 빠지고 놀러 다녀봐야 결국엔 싸움이 일어나고 서로 간에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자기 가족보다 주님을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주님과 가족, 모두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깨 : 연중 제24주일(루카 15,1-32 또는 15,1-10)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법대로 사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세리들이나 죄인들과 어울려서 지내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행위로 칭찬을 받을만한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예수님은 자신들이 죄인이라 여기는 이들과 함께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를 통해 참된 ‘의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목자는 스스로 의인이라 여기며 회개할 필요가 없는 양 아흔아홉 마리는 ‘광야’에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양이 ‘어깨’에 매달리면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이렇게 오직 주님의 어깨에 얹히는 것만이 의로워질 수 있음을 믿는 이가 참 의인인 것입니다. 반면 양이 보호자 없이 광야에 남겨진다는 말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미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 없는 것이 이 ‘회개’, 즉 ‘예수님의 어깨에 자신을 맡기는 삶’이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우리를 어깨에 메고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 ‘대사제’로 표현됩니다. 대사제는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12개의 보석이 박힌 에폿을 어깨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탈출 28,12). 보석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을 어깨에 메고 가시는 역할은 오로지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다만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어깨’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회개의 삶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집사 : 연중 제25주일(루카 16,1-13 또는 16,10-13)

 

오늘 복음에서 ‘집사’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집사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쫓아내려고 하는데 집사는 주인의 돈을 유용해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줍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런 집사를 오히려 ‘영리하다’고 칭찬해 줍니다. 여기에서 주인은 참으로 좋은 하느님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당신 은총을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베풀어지기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많이 나누어주는 집사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집사, 혹은 청지기의 비유를 또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12장 42절에서는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라고 하시면서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루카 12,43)이 되라고 하십니다. ‘집사’는 맡겨진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끊임없이 베풀어야 할 책임이 있는 여전히 고용인인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집사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우리 처분에 달려있지만 참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내가 내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의롭지 못한 재물입니다. 이에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우리가 이웃에게 해 주는 모든 것들이 실상은 주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루카 16,9 참조).

 

 

종기 : 연중 제26주일(루카 16,19-31)

 

성경에서 ‘종기’와 같은 ‘피부병’은 하느님의 심판이나 벌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 한 예로 모세에게 대들던 미르얌은 그 벌로 ‘악성 피부병’에 걸리게 됩니다(민수 12,10 참조; 신명 28,27 참조). 주님께서 벌을 내리실 때 피부병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주님의 심판을 ‘눈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거지 라자로가 종기를 앓고 있었던 것이 하느님의 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천국에 갈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지옥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라자로가 왜 천국에 가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자는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가 두드러지고, 라자로는 자기의 종기를 개가 핥게 허락했다는 사실이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개를 위해 종기를 내어준 것 가지고는 그가 왜 천국에 갔는지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 없이 피부병을 앓아야 했던 누군가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 그 인물이 바로 구약의 욥입니다(욥 2,7 참조). 욥은 아무 죄도 없었지만 주님께서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자녀와 재산과 건강까지도 앗아가셨습니다. 온몸에 난 종기를 토기로 긁고 있을 때 친구들은 욥이 죄를 지은 탓으로 벌을 받는 것이니 회개하라 강요하고, 그의 아내는 그런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을 저주하라 합니다. 그때 욥은 이런 멋진 말을 합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야훼께서 주셨던 것, 야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 1,21).

 

이런 의미에서 거지 라자로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 비록 나쁜 것일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히 받아들이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고, 그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이 그를 천국으로 이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9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10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믿음 - 종 : 연중 제27주일(루카 17,5-10)

 

오늘 복음에서 돌무화과나무와 믿음을 연결시키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 처음부터 무화과나무와 믿음을 연결시켰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잃은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했습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돌무화과나무가 바다에 던져지리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 명령을 받은 돌무화과나무는 주인의 말에 “복종”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주님 앞에서 돌무화과나무처럼 복종할 줄 아는 이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는 칭송을 들으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 앞에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당신을 ‘종’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종처럼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종이니까 당연히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종은 주인의 말에 복종하고 모든 일을 다 마치고는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는 내용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에 보상을 요구한다면 종이 아니고 삯꾼입니다.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에게 자기를 종으로라도 써 주십사고 청하는 것은 이제 믿음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탕자는 처음에 아버지에게 당연히 유산을 요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보답 없이 종으로만 써주기를 청하기에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가 한 봉사나 헌금 등을 조건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아직은 종이 아니라 삯꾼입니다.

 

 

믿음 - 감사 : 연중 제28주일(루카 17,11-19)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 사람의 나병환자를 치유해주십니다. 그러나 자신이 병이 나은 것을 보고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믿음은 병이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열매는 마음에서 ‘감사’가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기도가 들어졌다고 자신의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열 명의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단 한 명에게만 믿음으로 구원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가르침의 목적은 우리에게서 감사가 솟아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점으로 미사를 세우셨습니다. 미사는 ‘파견하다’는 뜻의 ‘미사(Missa)’과 함께 ‘에우카리스티아(Eucaristia)’, 즉 ‘감사’라는 말로 불렸습니다. 특별히 미사 안의 정점인 성체성사를 ‘에우카리스티아(감사)’라 불렀습니다. 감사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는 ‘영광을 올려드린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라고 말씀하시며 감사하는 것이 곧 영광을 드리는 예배의 본질임을 일깨워주십니다. 주님은 이미 주실 수 있는 당신의 생명(생명의 빵)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시는데도 우리는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 - 밤낮 : 연중 제29주일(루카 18,1-8)

 

오늘 복음말씀의 주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고을의,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재판관이 ‘밤낮’으로 졸라대는 과부에게는 당해낼 수 없어 올바른 판결을 내려준다는 비유 말씀을 해 주십니다. 이런 못된 재판관조차 과부의 ‘꾸준함’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줄 정도인데 하느님이야 밤낮으로 부르짖는 이에게 미적거림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며, 결국 기도의 꾸준함이 곧 믿음임을 일깨워주십니다. 며칠 기도하고 마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밤낮으로 기도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면 믿음이 있는 것이고, 했다 안 했다 그러면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다. 어떤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드려비가 내리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드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의 기도도 그러해야 합니다.

 

 

믿음 - 세례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마태 28,16-20)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이전에 열한 제자를 갈릴래아의 한 산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고 명령하십니다. 복음 선포에서 결국 믿음의 유무(有無)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믿지 않는 이들은 복음 선포를 하지 않겠고, 반대로 복음 선포를 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 증명됩니다. 믿음은 이런 면에서 우리가 이웃들에게 믿음을 전하여 세례를 받게 하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아직도 선교를 하고 있지 않다면 믿음으로 구원받기는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믿음 - 나눔 : 연중 제30주일(루카 19,1-10)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자캐오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모실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실천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은 “저 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이라고 불평을 하면서도 정작 주님의 뜻은 실천할 마음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모신 믿음의 집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마구간 같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나의 집이 끊임없이 가난해지고 있지 않다면 믿음이 들어와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을 나눌 준비가 된 자캐오를 가리켜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성조입니다. 믿음은 내 집에 거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이전의 것은 다 비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10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11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떨기나무 : 연중 제32주일(루카 20,27-38)

 

이번 주 복음은 예수님과 사두가이파 간의 부활에 관한 논쟁 내용입니다. 사두가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데 그들은 신앙보다는 현 시대에 잘 적응해서 사는 것이 목적인 실질적 무신론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인이라고 칭하면서도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에 결탁해서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그만이라는 집단이 사두가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현세만 추구하며 살다가는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질문을 들고 나왔습니다. 모세의 법엔 형이 죽으면 그 형수를 동생이 챙겨야 하는데 그렇게 일곱 형제가 모두 차례로 죽어서 한 여자가 일곱 형제와 살았다면 내세에선 그 여자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들고 나오는 근거가 모세가 본 ‘떨기나무’입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미 죽었지만 하느님이 굳이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고 칭할 리가 없는 일입니다. 그들이 이승에서는 죽었지만 저승에서는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이 당신을 그들의 하느님이라 칭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본 불붙은 떨기나무는 바로 혼인을 통한 구원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혼인의 문제를 들고 왔지만 사실 혼인의 완성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에 있습니다. 떨기나무는 지상에 사는 아무 쓸모없는 것이지만 불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됨으로써 하느님 것이 된다는 상징입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그렇게 혼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혼인으로 구원을 얻은 이들에겐 내세의 혼인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 : 연중 제33주일(루카 21,5-19)

 

연중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종말에 관한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이번 주 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십니다. 성전의 파괴란 이스라엘의 종말을 상징합니다. 더 나아가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 자신들의 종말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들이 매우 무서운 것들뿐입니다. 전쟁, 기근, 전염병, 무서운 하늘의 표징들, 게다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고 박해까지 받아야 한답니다. 그리고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는 말로 마무리하십니다. 그런데 인내로써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3).

 

인내는 주님께서 시련을 주실 때 그 열매를 맺기 위해 가져야 하는 필수불가결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인내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은 또한 인내를 발휘해야 할 고난을 반드시 주시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참아내야 할 박해와 시련과 고통, 멸시 등이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으로 인내를 가르쳐야 하는데 우리는 꽃밭 길만을 가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인내를 가르치시기 위해 고난도 준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막상 그 고난이 닥쳤을 때 주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기회로 삼게 됩니다.

 

 

신 포도주 : 그리스도 왕 대축일(루카 23,35ㄴ-43)

 

이번 주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지만 실상 복음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초라하고 비참하기 그지없는 왕으로 등장하십니다.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 위에는 “이자는 유다인의 임금이다”라는 글이 쓰인 현판이 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의 그리스도를 보며 ‘정말 왕이신가?’라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당시도 그런 의문과 조롱이 빗발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다가가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말하였다.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

 

그들이 생각하는 왕은 구원자였습니다. 다윗 임금의 모습으로 와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줄 임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그런 모습과 전혀 다르게 나아가시는 그분에게 실망하여 쓸모없는 왕이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그렇게 조롱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참 메시아는 참 포도주를 주는 임금입니다. 구원은 이 포도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피로 우리 죄가 씻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포도주가 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신 포도주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참 포도주를 주셔 구원을 이루시는 참 임금이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유령 : 대림 제1주일(마태 24,37-44)

 

성경에 유령(희랍어로 판타스마, 혹은 프네우마)이란 말은 그리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번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당신을 유령으로 보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에게도 어느 정도 우리가 생각하는 귀신의 개념이 있었던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살아계신 예수님까지도 유령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도 그들은 기겁을 하며 저마다 “유령이다!”를 외쳤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를 외치십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 못에 뚫린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십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심판하실 것 같고 우리 잘못을 탓하실 것 같아서 우리는 두려워 지금도 나무 뒤로 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의 시작인 이 때에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을 먼저 없애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나타나면 유령을 본 것처럼 두려워할 것이라면 주님께서도 우리 앞에 나타나시기를 꺼려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살과 뼈로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우리 모든 죄를 다 아시고 보속해 주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언제든 그분 앞에 나아가서 안길 어린이와 같은 마음을 준비해야겠습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11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2016년 12월 복음 속 ‘상징어’ 뜻풀이

 

 

키 : 대림 제2주일(마태 3,1-12)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인 요한 세례자는 다가오시는 그리스도를 손에 ‘키’를 드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해 내시는 심판자로 예고합니다. 요한은 또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라고 말하며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그 준비란 자신이 주는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회개의 세례 없이는 그분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의 세례는 쭉정이를 알곡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에 ‘키’를 드시고 그저 곡식을 들었다 내렸다 하면 바람에 의해 ‘저절로’ 알곡만 남고 쭉정이는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니 알곡만 남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사람을 심판하는 주체는 예수님이라기보다는 바람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를 원하시지만 속이 빈 쭉정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우리 속을 채워 쭉정이가 되지 않도록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에 따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루카 3,11 참조). 즉, 사랑의 실천은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하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이는 마치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이 혼인의복을 미리 준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웃 사랑을 위한 꾸준한 실천을 통해 평소에 회개했다는 표를 지니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언자 : 대림 제3주일(마태 11,2-1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요한 세례자를 파견된 ‘예언자’, 혹은 이미 오시기로 되어 있던 엘리야 예언자(마태 11,14 참조)라고 정의해 주십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있는 요한은 예언자로서는 조금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게 한 것입니다. 분명 예언자라면 그리스도께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병을 고치고 죽은 이들을 살리는 등의 기적들을 보여주시고는 그 보고 들은 것들을 요한에게 전하라고 하시며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요한이 의심을 품은 온전하지 못한 사람처럼 평가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의심했던 것일까요? 예언자인 요한의 이런 행위를 이해하려면 구약의 예언자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예언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예언을 전하는 이들로부터 박해받고 고통 받았습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낮아짐과 비워짐으로 주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요한 세례자가 진정한 예언자라는 사실은 오늘 복음처럼 주님을 의심하는 사람처럼 비난받으면서도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향한 참 믿음을 심어주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 세례를 줄 때부터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확고하였지만 제자들을 위해 자신이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자신은 작아지고 주님만이 커지셔야 한다는 믿음으로 스스로 의심 많은 사람이 되기를 자처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요한의 예언자직 수행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동정녀 : 대림 제4주일(마태 1,18-24)

 

‘임마누엘’은 복음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표징으로 한 동정녀에게서 당신 아드님이 성령으로 잉태되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이십니다. 아드님을 낳으시고도 평생을 동정으로 사셨습니다. 남자만 모르는 것이 동정이 아니라 평생 죄를 모르고 깨끗하게 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죄는 부부관계를 통해 전해집니다. 따라서 아드님이 죄에 물들지 않으시기 위해서는 깨끗함을 간직하고 계셔야 했는데 오직 성모님만이 그런 정신과 몸의 순결한 동정성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그런 깨끗한 동정성을 봉헌하는 성모님과 같은 분을 통해서 주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성모님의 동정성은 주님의 오심을 위한 준비가 되었고, 그 동정성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 우리와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이 동정성을 주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의 정욕을 이기기 위해 장미 밭에서 구르며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참아냈습니다. 또 수산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정결을 지키려 함으로써 주님은 청년 다니엘을 통해 당신이 직접 수산나를 노리던 두 노인을 심판하셨습니다(다니 13장 참조). 이렇듯 우리의 정결함은 사람들의 속셈은 물론 주님의 함께 계심이 드러나게 만드는 재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려면 성모님의 정결한 동정성을 본받아야 합니다.

 

 

빛 : 예수 성탄 대축일(요한 1,1-18)

 

오늘 ‘빛’이신 ‘말씀’께서 ‘육체’가 되신 날입니다. 빛이 육체 안에 쌓여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이 빛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그분 안에 빛과 생명이 있음을 믿는 이들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믿었고, 요셉도 꿈속의 천사의 말을 믿었으며, 목동들은 하늘에서 노래하는 천사의 말을 믿었고, 동방박사들은 하늘의 별들이 말하는 것을 해석하여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어떤 누구도 그분을 직접 보고 믿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빛을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육체를 보지만 그 안에 빛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 말하고 행동하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빛이 곧 예수님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진 것입니다. 그분이 빛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빛은 빛 자체로서 그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볼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행동이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자신의 삶의 어두움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미 빛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을 좋아합니다. 물론 부끄러운 면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빛을 감당하며 그분 앞에 머무르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도 점점 삶을 바꾸어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게 됩니다. [나눔의 소공동체, 2016년 12월호,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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