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유명한 스승 니코데모가 모르는 그것 그 밤, 어둠 속 촛불은 조용히 타오르고 니코데모는 예루살렘의 밤의 어둠 속으로 순순히 걸어갔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는 사람을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청년 예수도 이스라엘이 존경하는 시대의 석학인 니코데모가 자신을 조용히 만나자는 제안에 기분 좋은 설렘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당대 원로 지성인과 새롭게 떠오르는 젊은 랍비는 그 밤 촛불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어둠의 정적에 촛불만이 조용히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빛과 어둠’의 대비가 잘 드러나는 렘브란트의 니코데모 성화처럼 말이다. 조용하지만 서로를 모르는 데서 오는 약간의 긴장과 좋은 설렘이 뒤섞인 방 안의 시선을 촛불이 한곳으로 모으고 있었다. 니코데모는 패기 넘치는 갈릴래아 사투리를 쓰는 젊은 청년 예수를 마주 보고 있다. 항간에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고 그 가르침이 하도 신선해서 한번 꼭 보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하였다. 니코데모는 바리사이에 율법 학자일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의 의원이다. 한마디로 그는 당대 실세 중의 실세였다. 그가 속한 바리사이들은 역사적으로 보면 마카베오 전쟁 뒤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가 우상 숭배를 강요하고 율법을 말살시키려 했을 때 불같이 일어나 율법을 사수하던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다. 뒤에 종교적 기득권 세력으로 자리 잡으며 점차 형식주의로 기울기도 하지만,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집단이다. 그리고 산헤드린은 유다교의 ‘최고 의회’로서 입법, 사법을 동시에 관장하는 기구이다. 니코데모가 산헤드린 의원이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권력층에 속한 실세였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는 비싼 몰약과 침향을 충분히 살 정도의 부자이기도 했다(요한 19,39). 부와 명예, 그리고 지성과 고매한 인격까지 갖춘 니코데모가 갈릴래아 청년 예수를 찾아오기는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설령 예수님의 존재가 궁금해도 직접 만날 필요까지는 없었다. 사람을 시켜 알아봐도 되니까.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율법 학자로서 이 범상치 않은 청년을 율법에 규정되어 있는 대로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7,51)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밤이 안전했다.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말들에서 벗어나 조용히 예수님이 진정 누구이시며 어떻게 해서 그 엄청난 일들을 행하실 수 있는지 알려면 말이다. 그 밤이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여는 까만 밤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니코데모는 자신의 오래된 인식의 문을 열었다.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 의심이 필요하다 니코데모는 랍비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은 청년 예수에게 스스럼없이 “랍비!”하고 조용하고 차분히 불렀다. 마치 ‘난더후투’(難得糊塗) 경지에 오른 겸손한 중국의 대학자 지셴린처럼 말이다. ‘난더후투’는 재물이 많고 학식이 뛰어나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자신을 낮춰 어수룩하게 행동하는 것으로, 도덕적 소양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그는 부드럽고 원숙한 목소리로 말한다.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3,2). 예수님을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으로 인식하는 니코데모와 달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기는 군중에게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7,49)라고 단언하는 배경에는 예수님의 출신 때문이다. 그들에게 메시아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하는데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출신(7,41 참조)이시기에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합리적인 의심’일 것이다. 손석희 아나운서는 ‘거짓 뉴스’가 판치는 ‘탈진실’(post-truth) 시대에 시민이 살아남는 방법은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이며 이것이 현대인의 덕목이라고까지 했다(2017년 2월 21일, JTBC ‘뉴스룸’ 참조).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다면 그런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지만(3,2) 그래도 여전히 진실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다. 정식 율법 학자가 아님에도 사람들이 경이롭게 생각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고’(마태 7,28; 마르 1,22; 루카 4,31 참조), 그분이 말씀하실 때 풍기는 카리스마적인 권위는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메시아가 오시더라도 저분께서 일으키신 것보다 더 많은 표징을 일으키시겠는가?”(요한 7,31)라고 사람들이 말하듯이, 니코데모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신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닌 이상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하실 수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니코데모가 그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한 ‘표징들’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세메이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요즘 말로 한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이다. 정결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원거리 치유를 하셨으며,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며,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걸어 나오게 하시는 것 등이다. 그중 최근 파스카 축제쯤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여 주신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의 용기 있는 열정 또한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유다 사회의 지도자급인 사제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성전에서 그들이 성전을 “장사하는 집”(2,16)으로 만들었다며 다 뒤엎었다.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장사로 이득을 보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의 행위는 성전의 권위를 위협했다는 이유로 대사제와 유다 지도자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지만 말이다. 인식의 블랙홀, 갑자기 떠난 항성 간의 여행 아, 그런데 이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3,3)니. 예수님의 말씀은 니코데모를 블랙홀에 빠지게 했다. 갑자기 우주의 다른 차원에서 다른 언어로 넘어가 버렸다. ‘율법을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해 온 내가 못 알아들을 말이 있다니!’ 3차원에 꼭 붙어서 묻는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3,4)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아노텐’(anothen)이다. ‘아노텐’은 ‘위로부터’와 ‘다시’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 차원이 열리면 다른 차원은 더 쉽게 열 수 있지 않은가. 이제는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그동안 유다교는 정결례로써 죄를 씻는 것만으로 충분했는데 물로 태어나고 게다가 성령으로까지 태어나야 하다니 다른 행성에서 들을 법한 말이다. 엄격한 율법을 지켜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며 율법을 어기면 심판을 받는다는 종교관을 가진 그에게 위로부터의 ‘다시 태어남’은 도통 알 수도,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다. 예수님과의 대화로 니코데모가 인식의 블랙홀에 빠진 것은 그가 삶에서 고수해온 프레임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프레임을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로서 우리가 듣고 말하고 생각할 때 이것은 늘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니코데모를 혼란에 빠지게 했던 것처럼 루카 복음서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겠는지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며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기 때문이다’(17,20-21 참조).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중에 계속 새로운 가르침을 보여주시지만 많은 사람은 자신들이 고수해 온 삶의 틀 때문에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진리의 ‘푸가’는 우주를 향해 울려 퍼지고 청년 예수의 말은 확실히 새로운 진리의 언어였다. 유다교의 가르침에 충실한 니코데모는 바흐의 ‘푸가’처럼 멜로디를 뒤따라가듯이 되풀이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언어를 점점 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3,9 참조)는 그의 질문에 ‘세상의 것을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하늘 일을 어찌 믿겠느냐?’(3,12 참조)는 예수님의 일침은 니코데모가 그때까지 쌓아온 앎의 지평을 초라해 보이게 했을 것이다. 율법의 사고 체계 속에 사는 니코데모에게 진리의 세계는 ‘불고 싶은 데로 부는 바람처럼’ 영적이며 자유로운 것이다. 여기서 ‘바람’이라고 사용한 단어는 ‘프네우마’인데 ‘성령’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우리는 바람을 볼 수 없지만, 나뭇가지가 흔들릴 때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영에서 태어난 사람도 바로 바람처럼 그 행위를 보고 아는 것이다. 곧, 우리가 행동으로 사랑의 삶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초막절 축제 마지막 날 말씀하신 ‘자신을 믿는 사람은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인데 그것이 바로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7,39 참조)이라고 하셨다. 다시 태어남은 성령의 은총 속에 이루어진다. 청년 예수를 직접 만난 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된 니코데모의 마음속 갈등은 참으로 컸다. 물론 당대 이름난 스승인 니코데모의 지혜가 부족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는 지금 새로운 진리를 배워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니코데모가 익혀 온 프레임은 한계에 직면했고 예수님께서 펼쳐 내시는 ‘진리의 코스모스의 세계’로 넘어가야 한다. 마치 칼 세이건이 말하듯이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코스모스」).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지혜를 얻는 아주 쉬운 방법을 가르쳐 준다. “지혜는 자기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미리 다가가 자기를 알아보게 해 준다. 지혜를 찾으러 일찍 일어나는 이는 수고할 필요도 없이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지혜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다”(지혜 6,13-15). * 허귀희 클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수녀회 수녀.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미국 엘름스 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7년 4월호, 허귀희 클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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