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칼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세월호 참사 3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올해 4월 16일은 부활절이다. 주님께서 희생자와 미수습자 모두를 당신 부활의 빛 안에 받아 안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린다. 누군가 말했다. 세월호 참사가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다른 이는 말했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이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과연 그럴까? 이러한 생각들은 ‘이미 일어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는 가정을 전제하는 듯하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굳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매일 같이 기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기도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은 늘 이루어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미 일어난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이라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도 하느님의 뜻이라 말인가?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도 하느님의 뜻이란 말인가? 이는 결국 하느님께서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까지도 당신 뜻에 따라 미리 정해 놓으시고, 우리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하고 계시다고 고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지독한 오해가 낳은 결과다. 누구든 자기가 죄를 지어 놓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권력집단이 저지른 거대한 범죄나, 개인과 공동체가 겪은 비극적 참사에 대해서는 특히 더 함부로 하느님의 뜻을 운운하지 않아야 한다. 자칫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는 십계명을 거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가톨릭교회교리서》 2822항)이다. 이 하느님의 뜻은 진리, 선善, 정의, 사랑, 자유, 평화, 그리고 생명 안에서 드러난다.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37-50장)는 비극적인 일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적절한 예다. 야곱에게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 차지하는 요셉을 질투했다. 형들은 급기야 요셉을 죽이려고까지 하였지만 르우벤과 유다의 만류로 목숨만은 살려 준다.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가서 파라오의 신하인 포티파르의 종이 된다. 이집트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포티파르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자 도리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다. 거기서 함께 갇혀 있던 파라오의 두 시종장의 꿈을 풀이해 주는데, 과연 요셉의 풀이대로 헌작 시종장이 복직된다. 이 년 뒤 파라오가 꿈을 꾸었는데 아무도 풀이를 하지 못하자 헌작 시종장은 요셉을 추천한다. 파라오는 자신의 꿈을 풀이해 낸 요셉에게 이집트의 살림을 맡기고, 요셉의 말대로 7년의 풍년 동안 곡식을 비축해 둔 이집트는 뒤이은 7년의 기근을 잘 버티어 낸다. 가나안에도 기근이 들자 형들은 이집트로 곡식을 꾸러 왔지만 재상이 된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다. 긴 고뇌와 번민 끝에 요셉은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말한다. “내가 요셉입니다! …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3.5). 요셉은 자신의 고난 중에 하느님께서 섭리하셨다고 고백한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삶에 어떻게 섭리하셨는가? 형들에게 악한 마음을 주어 요셉을 죽이게 하셨는가? 포티파르의 아내에게 나쁜 마음을 심어 요셉을 유혹하게 하고 감옥에 가두게 하셨는가?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서는 악으로 섭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고, 또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야고 1,13). 하느님은 선으로 섭리하는 분이시다. 형들이 요셉을 죽이려 할 때 르우벤과 유다로 하여금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창세37,21) 하고 설득하게 하여 요셉을 살리신다. 감옥에서 두 시종장의 꿈을 풀이하고 파라오의 꿈을 풀이할 때에 요셉에게 지혜로써 섭리하신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꾸민 악 가운데에서도 그것을 선으로 바꾸기 위해 섭리하고 계시지, 악 자체에 가담하여 섭리하시지 않는다. 요셉은 고백한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창세 50,20). 하느님의 선하심은 결코 악에 굴복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이 모든 악을 물리치고 승리할 것이다. 그것이 부활이다. 부활은 아버지의 뜻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고귀한 생명이 허무하고 억울하게 스러져 가는 것을 아버지께서 보고만 계시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뜻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요한 6,39). 하늘에서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이 하느님의 뜻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일제의 식민지배가, 남북분단이 하느님의 뜻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독립운동과 평화통일이 하느님의 뜻이다. 세월호 참사가 하느님의 뜻이었는가? 아니다. 모두가 구조되는 것이, 애초에 그러한 참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었다. 이제 인간의 잘못으로 빚어진 엄청난 참사의 희생자들이 부활하여 영원히 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길은 무엇인가? 2천 년 이상 당신 아드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우리가, 3년밖에 안 된 이 비극적 희생을 잊지 않는 것,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 그래서 유가족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치유되도록 우리가 협력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진리와 생명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 김유정 신부는 대전교구 소속으로 2000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캐나다에서 영성신학, 로마에서 사제 양성을 공부했다.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 총장이며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다. [성서와함께, 2017년 4월호, 김유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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