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물신] 바알에 맞선 신들 고대 근동 신화에서 우주의 질서를 세우고 생명을 주관하는 신은 혼돈의 신을 꺾고 죽음을 이겼다는 공통점이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구약 성경의 주님(야훼)과 우가리트 신화의 바알은 혼돈과 죽음을 꺾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두 신의 메시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혼돈의 신 얌무 바알 신화에서 바알의 적수는 둘이다. 첫째는 혼돈의 신 얌무(Yammu)다. 얌무는 바다의 신이면서 ‘판관 나하루’라는 호칭을 지녔다. 나하루(Naharu)는 강이란 뜻이니, 얌무는 물을 지배하는 신이다. 바알 신화 전반부의 이야기는 바알과 얌무의 갈등을 다룬다. 얌무는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는 신들에게 바알에 머리를 조아리지 말라고 호통쳤고, 신들은 얌무의 전령 앞에서 벌벌 떨었다. 최고신마저 얌무의 편을 들어 주어서 바알의 처지는 더욱 궁색했다. 결국 바알은 얌무와 일대일로 겨루어, 바다의 신 얌무를 두 조각으로 찢고 승리한다. 바알은 신들에게 잔치를 크게 베푼다. 고대 근동 신화에서 바다는 흔히 혼돈을 상징했다. 질서와 풍요를 상징하는 풍우 신이 바다 신을 찢어 승리하는 모티프는 풍우 신 신화에서 흔하다. 이런 ‘신들의 전투’(theomachy)를 통해 임금을 상징하는 풍우 신이 권위와 질서를 세웠다는 ‘왕권 신학’은 시리아와 북메소포타미아에서는 거의 필수적이라 할 만큼 광범위하게 등장하고, 그리스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바빌론의 「에누마 엘리쉬」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 죽음의 신 모투 바알 신화의 후반부는 바알과 모투의 대결이다. 두 번째 적수 모투(Motu)는 죽음의 신이요 최고신의 아들이자 전사다. 하지만 이 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의인화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적도 별로 없고, 그 호칭도 중의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바알과 모투는 근본적인 속성이 다르다. 바알은 매력적인 풍산의 신이다. 촉촉한 비와 이슬이 바알의 딸이었다. 모투는 이와 반대로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상징한다. 뜨겁고 메마른 성질의 모투는 죽음과 불모의 신이었다. 모투가 다스리는 저승은 어둡고 진흙투성이의 동굴처럼 묘사된다. 모투는 닥치는 대로 삼키는 특징을 지녔는데, 입이 매우 크게 묘사된다. 모투의 입은 “입술 (하나가)땅에, (다른)입술 (하나는)하늘에” 닿았고, “혓바닥은 별에” 닿았다. 모투는 “내 목구멍에는 사람의 아들이 부족하다/ 내 목구멍에는 땅의 군중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모투의 큰 입에 걸리면 수많은 사람이 저승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모투는 무척 두려운 존재였다. 바알은 모투와의 1차 전투에서 패배하여 죽었다. 바알은 모투의 입을 통해 지하의 저승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전쟁의 여신 아나투가 바알의 시체를 저승에서 꺼내 왔다. 아나투는 이 과정에서 모투와 일대일로 맞붙기도 했다. 결국 바알은 차폰 산에서 부활했고, 모투와 다시 겨루어 최후의 승리를 극적으로 쟁취했다. 이로써 바알은 혼돈을 꺾은 질서의 신이요 죽음을 꺾은 생명의 신으로서 화려하게 등극하여 자신의 신전에서 우주를 다스린다. 바알 신화는 도시 국가 우가리트에서 국가 종교의 텍스트로서 매우 소중하게 보관되었고, 중요한 절기에 대중 앞에서 낭독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신화의 줄거리는 한 해 동안 진행되는 계절의 변화와 잘 맞는다. 특히 뜨겁고 메마른 중동의 건기를 상징하는 모투를 꺾고, 바알이 농업과 목축의 ‘풍요의 순환’을 보장해 주기를 바라는 인간적 염원이 담겨 있다고 해석한다. 바다를 꺾으신 주님 주님(야훼)께서도 바다를 꺾고 승리하셨다는 모티프가 구약 성경에 등장한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 면에서 바알 신화와 무척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창조 시편과 일부 예언서는 하느님께서 바다를 지배하셨다는 말을 하지만, 다신교를 연상할 수 있는 ‘신들의 전투’ 모티프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단지 주님께서 바다(=혼돈)를 통제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시편은 “당신께서는 오만한 바다를 다스리시고/ 파도가 솟구칠 때 그것을 잠잠케 하십니다.”(89,10)하고 노래하고, 나훔 예언자는 “그분께서는 바다를 꾸짖어 말려 버리시고/ 강들을 모조리 바닥까지 드러내신다.”(1,4)고 말했다(이 밖에도 여러 구절이 있다). 주님의 역사적 개입의 의미 바다를 꺾고 승리한 모티프는 이집트 탈출과 광야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는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이집트 탈출의 가장 결정적 사건인 ‘갈대 바다 사건’에서, 모세는 주님의 명을 따라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가게”(탈출 14,16)하였다. 광야에서 단련되던 시절이 끝나고 요르단 강을 건널 때도 마찬가지다. 하느님 백성 앞에서 마치 갈대 바다 사건처럼 물이 갈라졌다(여호 3,15-17 참조).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이 일을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혼돈을 통제하신 사건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말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우리가 갈대 바다를 다 건널 때까지 우리 앞에서 그 바다를 마르게 하신 것처럼, 주 너희 하느님께서 우리가 요르단을 다 건널 때까지 그 물을 마르게 하셨기 때문이다”(여호 4,23). 시편도 이런 해석에 동참한다(114,1-5 참조). 이런 모티프를 통해 역사적 사건의 초역사적 의미가 드러난다. 주님께서 바다와 강을 가르시고 백성을 구원하신 사건은 단순히 중동의 한 지역에서 먼 옛날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의미를 지닌 보편적 사건이다. 그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는 세상의 질서를 새롭게 세우셨다. 주목할 점은 이런 ‘역사적 사건의 초역사적 성찰’이 이미 사건이 발생한 때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히브리 백성은 이 사건을 체험하면서 거의 동시에 이 사건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근동에 널리 알려진 신화적 언어로 그 의미를 표현했다. 그러므로 신화적 모티프는 ‘해석과 성찰의 언어’를 제공한 것이다. 이렇게 신화적 모티프의 언어는 비슷하지만, 그 메시지는 무척 다르다. 바알 신화에서 바알은 가난한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바알은 자신의 신전을 짓고자, 자신이 우주의 최고신으로 등극하고자 큰 신들과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극적으로 성공한다. 하지만 주님(야훼)께서는 홀로 가난한 백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어(계약)역사에 개입하셨고, 본디 당신을 위한 신전 같은 것은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셨다. 또한 바알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순환하는 승리를 얻었지만, 주님(야훼)의 승리는 역사적으로 전승되며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드러난다는 점도 다르다. 죽음을 이기시는 하느님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셨다는 모티프도 구약 성경에 등장한다. 우가리트어의 ‘모투’에서 주격 어미(-u)를 떼면 히브리어의 모트가 된다. 구약 성경의 죽음(모트)은 ‘저승’을 의미하는 ‘셔올’과 자주 병행한다. 구약 성경의 모트는 우가리트어의 모투와 거의 비슷하다. 하바쿡 예언자는 물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모든 것을 삼켜도 끝이 없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사람은 마치 목구멍이 아주 넓고 닥치는 대로 삼키는 모트 같은 사람이다. “저승(셔올)처럼 목구멍을 넓게 벌린 그자는/ 죽음(모트)과 같아 만족할 줄 모르고”(2,5). 이사야 예언자도 이와 비슷한 표상을 사용하였다. 셔올로 내려가는 길은 모트의 목구멍처럼 한없이 크고 수많은 사람이 빠져들 것이다. “그리하여 저승(셔올)이 목구멍을 한껏 벌리고/ 그 입을 한없이 열어젖히면/ 그들의 영화와 법석거림이/ 떠들썩하게 기뻐 뛰던 자들이 그곳으로 빠져들리라”(5,14).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는 무척 독특한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25,8)라고 말했는데, 이 문장을 직역하면 “그분께서는 모트를 영원히 삼켜 버리셨다.”로 옮길 수 있다. 큰 목구멍으로 닥치는 대로 삼켜 버리는 모트를, 오히려 주님께서 삼켜 버리셨다는 말이다. 이사야 예언자의 성찰은 두 가지 의미에서 우가리트 신화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첫째는 주님이 모트를 물리치시는 방법이다. 입을 벌려 삼키는 것은 모투의 고유한 무기였다. 바알은 이런 모투에 당해서 죽어야 했다. 하지만 이사야는 주님께서 죽음의 고유한 방식으로 죽음을 물리치셨다고 전한다. 곧 죽음의 신이 사용하는 방법도 주님께 속한 것이요, 주님은 죽음보다 훨씬 크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둘째는 주님께서 죽음의 방식으로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음을 선언한 것이다. 우가리트 신화에서 바알은 순환하는 승리를 얻었다. 자연의 변화에 맞춰, 삶과 죽음의 순환을 전제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영원히’이기셨다고 선언했다. 이사야 예언자는 삶과 죽음의 순환이 완전히 끊어질 먼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주님의 승리는 모든 것을 종결짓는 궁극적인 것이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7년 5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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