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단상] 회개 머리가 무거웠다. 읽을수록 모호해지고 모호해질수록 답답해졌다. 이번만 잘 넘기면 얼추 논문의 방향이 잡혀가겠는데,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쟝들롬 신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함께 소풍을 가자 하신다. 리옹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님으로 계셨던 쟝들롬 신부님께 논문에 대해 여쭤볼 심산으로 소풍에 함께했다. 일상을 비우긴 커녕 머릿속에 논문 자료들을 잔뜩 쑤셔넣은 채 나는 신부님과 함께 몽블랑 쪽으로 가고 있었다. 점심을 먹는 자리는 이탈리아와 스위스, 그리고 프랑스를 나누는 경계지점이었고 몽블랑이 저만치 바라보이는 곳이었다. “쟝 보스코, 저기 이정표 보이지?” 식탁이 펼쳐진 곳에서 멀지 않게 이탈리아와 스위스, 프랑스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었다. 신부님은 고민으로 찌든 내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누구는 이탈리아로 가고 싶고, 누구는 스위스로 가고 싶고, 또 누구는 프랑스로 가고 싶겠지? 예수란 존재는 내가 정한 목적지를 향해야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닐 수도 있잖아? 예수는 아마 함께 하는 자리를 위해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저 이정표처럼…” 그랬다. 정말 그랬다. 요한묵시록에 나타나는 어린양의 형상으로 논문을 준비하던 나는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지 답을 찾으려고 애썼고, 그래서 머리가 복잡했었다. 어린양은 그저 ‘함께하는 존재’인데, 나는 나의 논리로 어린양을 규정하려 했다.(묵시 5장 참조) 하느님을 따르는 신앙인에겐 하느님처럼 되는 것, 하느님처럼 완전하고 거룩하고 자비롭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늘 ‘회개’에 목말라하고 회개하는 것으로 하느님께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며 자위한다. 그런데 찬찬히 지난 삶을 돌아보면 회개할 때마다 얼마간의 허망함은 늘 주위를 맴돌곤 한다. ‘열심히 했는데 응답이 없다, 희생했는데 보람이 없다, 노력했는데 결과가 안 좋다.’ 하며 회개하는데 힘이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왜 그럴까.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 몰라서가 아닐까? 회개는 하겠는데, 회개해서 나아갈 곳이 어딘지 곰곰이 따져보면 딱히 떠오르는 개념이 없다. 완전한 게 제 삶의 인격적 성장인지, 거룩한 게 속세와 구분된 범접할 수 없는 윤리적 탁월함인지, 자비로운 게 온갖 폭력과 불의와 참상에도 온화한 미소를 머금을 수 있는 여유로움인지 도대체 무엇인지 우린 알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리스말로 ‘회개’는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다. 사순절마다 듣곤 하는 ‘메타노이아’의 뜻, 곧 ‘돌아서다.’라는 말은 제 욕망이나 악함에서 벗어나 하느님께 돌아가는 삶의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돌아서야 한다는 당위가 가능하려면 빗나간 삶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떠나 불충의 시간을 보냈다고 자각하고 반성했다.(2열왕 17,7-18) 예언자들은 날카롭고 직선적인 어투로 불충한 이스라엘 백성을 다그쳤고,(에제 16 참조) 하느님께 돌아오라며 재촉했다.(이사 30,15; 55,7; 예레 18,11; 에제 18,30-32; 33,11) 빗나간 삶이 있다는 건, 돌아갈 본디 삶이 있어야 한다. 회개하는 건, 새로운 삶에로의 이행이 아니라 본디 모습에로의 복원이다. 새로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에 묶여 더 나은 나로 발전해야 한다는 당위를 반복적으로 되새기는 우리에게 회개는 자기계발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신앙인의 본디 모습은 인간의 본래 가치와 다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규정한다. 어디로 튈지 몰라 무섭다는 중2 학생들도 사회생활의 원리로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 참여, 보조, 연대의 가치를 공부하고 실천한다.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한, 서로의 생각과 가치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삶이 인간됨의 기본이다. 인간은 본래 서로 되돌아보고 함께하는 ‘회개의 동물’이다. 잘 살아야 하는 일은 실은 같이 살아야 하는 일이고 그게 인간의 일이다. 루카복음 15장의 비유들은 회개의 좋은 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은전, 잃어버린 아들은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한 이를 주인공 삼는 이야기가 아니다. 양이 길을 잃었고 은전이 사라진 것이며 아들이 아버지를 박차고 나간 상황에 목자가, 어떤 부인이, 아버지가 찾아 나선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본래 있던 곳이 양들의 무리고 어떤 부인의 품속이었으며 아버지의 집이었다. 본래 자리로 되돌려 놓겠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가 루카복음 15장을 관통하는 중심주제다.(이사 19,22-25; 30,15; 45,1-25; 66,18-21; 호세 2,9) 하느님은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신다.(1티모 2,3-4; 갈라 3,8) 회개는 함께하고자 하는 이의 품안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의탁하는 무모함이지, 계산된 제 계획에 따라 스스로의 변화에 감탄하는 업적쌓기가 아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구원은 저 미래에 펼쳐질 무릉도원이 아니라 태초에 만들어졌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혹은 잊어버린 나를 찾는 일이다. 그러므로 제 삶을 단련시키고 제 삶의 처지에 민감한 의식을 갖는 건 회개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말하자면 제 삶이 혼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나아갈 다른 세상이 있고 다른 존재가 있음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예민한 자세는 회개의 기본이다.(히브 6,4-8; 1코린 9,24-27) 1859년 영국의 스마일스는 『자조론』이란 책을 간행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명제를 앞세워 ‘보다 나은 내일의 나’를 꿈꾸게 만들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제 삶의 본디 가치를 잊었고 ‘같이’의 가치를 내팽개친 채 제 앞길만 보고 달렸다. ‘지금은 아니야.’, ‘좀 더 노력해야 돼.’라는 강박증이 우리 신앙 안에서도 버젓이 횡행한다. ‘지금 함께함’으로 감사해야 할 신앙이, 멋진 나보다 소외된 이웃을 찾아나서야 할 신앙이 ‘내일의 나’를 위한 ‘제 밥그릇 지키기’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서로 함께 돕는자를 돕는다. [월간빛, 2017년 5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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