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50)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사도 12,5)
박해, 복음 선포의 밑거름 - 프란치스코 데 수르바란 작 ‘성 대 야고보의 순교’, 1639년,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스페인.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이후 박해는 점차 확대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박해를 피해 사도행전은 사도들만이 예루살렘에 남아있고 다른 이들은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사도행전은 가장 처음 사도들을 박해하고 스테파노 부제를 죽인 이들을 대사제와 사두가이들로 표현합니다. 이 박해는 종교적인 차원의 박해입니다. 유다교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처럼 하느님을 모독하고 자신들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합니다. 이후 계속되는 박해는 직접적으로 유다인들에 의한 것뿐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그즈음 헤로데 임금이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었다.”(사도 12,1) 여기서 등장하는 왕은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여러 명의 헤로데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주로 표현되는 헤로데 왕은 세 아들(헤로데 아르켈라오스, 헤로데 안티파스, 헤로데 필리포스)을 두었고, 그의 손자뻘 되는 인물이 바로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입니다. 신약성경에는 이들이 모두 ‘헤로데’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헤로데 아그리파스 1세는 친(親) 유다교 성향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며 41~44년까지 이스라엘 전역을 다스리던 영주였습니다.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사도 12,2-3) 이렇게 교회를 박해한 헤로데 아그리파스는 실제로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죽음을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그에 대해서 사도행전은 하느님에 의해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고 표현합니다.(사도 12,23)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인 야고보 사도가 순교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께서 부르셨던 어부 중의 한 명으로 제베대오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으로 표현됩니다.(마르 1,19-20) 신약성경에서 언급하는 야고보 역시 두 명입니다. 한 명은 헤로데에 의해 순교한 예전에 ‘대(大) 야고보’로 불렸던 야고보 사도입니다. 복음서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청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의 잔을 함께 마실 것이라고 예고합니다.(마르 10,39) 야고보 사도의 순교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예수의 형제’로 불리던 야고보입니다. ‘소(小) 야고보’로 불리기도 하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큰 역할을 했던 인물로 “교회의 기둥”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사도 12,17; 갈라 1,19; 2,9) 이 일과 함께 헤로데는 베드로 사도 역시 잡아들입니다. 쇠사슬에 묶여있던 베드로 사도는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을 탈출합니다. 기적처럼 묘사되는 이 이야기에서 천사는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빨리 일어나라.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어라.”(사도 12,7-11) 천사의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의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탈출 12,11)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신 것처럼 베드로 역시 헤로데의 손에서 탈출합니다. 로마에는 베드로 쇠사슬 성당이 있는데 이곳에 지금도 베드로 사도가 묶였던 쇠사슬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초기 교회의 모습은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복음 선포를 통해 성장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지만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해’입니다. 새로운 정체성과 함께 유다교와 분리되고 종교적인 탄압은 초기 교회의 가장 큰 어려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초기 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바로 박해를 피해 흩어졌던 이들이 여러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게 된 것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가톨릭평화신문, 2017년 5월 28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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