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세계] 왕국분열 (1) 솔로몬이 죽자 이스라엘은 급속히 약화되고 분열한다. 북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로 갈라진 것이다. 북쪽 10지파는 새 임금으로 예로보암(Jeroboam)을 선택한다(1열왕 12,20). 기원전 931년의 일이다. 따라서 왕국분열 역시 931년으로 보고 있다. 북쪽 왕이 즉위하자 분열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주변국 간섭이 노골화된다. 솔로몬 때는 대등한 군대로 맞섰지만 약체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민족끼리 다투면서 군사력을 허비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쩔 수 없이 남과 북은 인근 강대국에 기대게 된다. 남쪽은 이집트 비위를 맞추었고 북쪽은 아시리아 눈치를 보며 다가갔다.
분열의 싹은 솔로몬 말기부터 있었다. 학정과 세금에 시달린 군중은 왕의 죽음을 노골적으로 기다렸던 것이다. 마침내 르하브암(Rehoboam)이 왕위에 오르자 지파들은 세금만이라도 낮춰주길 청했다. 하지만 새 임금의 반응은 차가웠다. 부왕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더 무겁게 하겠소. 부왕께서는 가죽 채찍으로 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칠 것이오(1열왕 12,14). 르하브암이 이렇게 나오자 북쪽 지파들은 분열을 서둘렀다. 강공에는 강공으로 맞선 것이다.
르하브암은 솔로몬과 암몬출신 나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1열왕 14,21). 나아마는 후궁이었다. 솔로몬은 40년간 다스렸고(1열왕 11,42) 르하브암은 41세에 왕이 된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를 때 나아마는 총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마(Naama)는 즐겁다는 뜻이다. 자신의 아들을 끝까지 밀어붙여 후계자로 만들었으니 총명한 여인이다. 솔로몬은 암몬의 민족신 밀콤(Milcom)을 섬겼다고 성경은 전한다(1열왕 11,5). 나아마 영향이었을 것이다. 르하브암이 철권통치를 펴고 우상숭배에 빠진 것도 그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재위 17년 동안 18명의 아내와 60명의 후궁을 맞이했으니(2역대 11,21) 호사스런 왕실이었다.
주님의 경고는 르하브암 5년에 일어난다. 이집트 임금 시삭(Shishak)이 침공한 것이다. 6만의 정예군을 앞세워 한순간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과 왕궁을 약탈했다(2역대 12,3). 르하브암은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한다.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이후 르하브암은 몸을 낮추고 예언자의 충고를 듣는다. 시삭은 이집트 22왕조를 창시한 세숑크(Sheshonq) 1세로 보고 있다. 그의 가나안 침공은 나일 강 상류 테베(Thebe)에 있는 신전 벽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2017년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교황 주일, 연중 제13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왕국분열 (2) 솔로몬이 죽자 12지파 대표는 르하브암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스켐에 모인다(1열왕 12,1). 예루살렘 북쪽 50km 지점에 있던 도시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대한 말씀을 들은 곳이며(창세 12,7) 이집트에서 모셔온 요셉의 유골이 안치된 곳이다(여호 24,32). 여호수아는 임종을 앞두고 12지파를 스켐에 소집한 뒤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이렇듯 스켐은 초기 이스라엘의 상징적 성지였다. 그런 이유로 르하브암은 이곳에서 솔로몬 후계자로 선언되었던 것이다.
북쪽 지파는 새 임금에게 부역과 세금의 경감을 청한다. 하지만 차갑게 거절당한다. 그러자 모두들 충성을 거부하고 돌아섰다. 르하브함은 부역 감독관 하도람을 보내 수습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 돌로 쳐 죽였다(2역대 10,18). 분노의 표출이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르하브암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정예 18만을 선발해 징벌에 나서려 했지만 내부반발로 무산된다. 이로써 왕국분열은 기정사실로 되었다. 북쪽은 10지파 연합체였고 남쪽은 유다 지파 독주에 벤야민 지파가 참여하는 형태였다.
르하브암은 기회를 기다리며 북쪽 지파 응징을 준비했다. 하지만 재위 5년 이집트 침공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성전과 왕궁이 왕창 털렸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영화는 바닥으로 추락한 것이다. 르하브암은 41살에 즉위해 17년간 다스렸고 기원전 915년경 죽었다. 아비얌(Abijam)이 왕위를 이었다(1열왕 15,1). 맏아들이 아닌데도 후계자가 되었다. 어머니 마아카 영향이었다. 르하브암은 어떤 아내나 소실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다고 성경은 전한다(2역대 11,21). 왕자가 28명이었지만 일찍부터 아비얌을 후계자로 지목해 뒤를 잇게 했던 것이다. 르하브암의 또 다른 모습이다. 아비얌이 왕위에 오를 때 북쪽은 예로보암 1세가 18년째 왕으로 있었다.
이후 남과 북은 네 차례 전쟁으로 크게 부딪친다. 첫 전쟁은 아비얌의 등극과 함께 시작되었다. 왕국통합이란 명분으로 북쪽을 공격한 것이다. 남쪽 40만과 북쪽 80만은 이스라엘 중앙산지 에프라임에서 맞붙었다(2역대 13,3). 수적으로는 남쪽이 훨씬 불리했지만 전투에서는 이긴다. 북쪽의 정예군 50만을 궤멸시킨 것이다. 이후 예로보암은 재기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죽음을 역대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주님께서 그를 치시니 그가 죽고 말았다(2역대 13,20). 아비얌과 예로보암의 전쟁은 군사력이 아니라 주님의 개입으로 판가름 났다는 암시다. [2017년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왕국분열 (3) 첫 남북 전쟁에서 남쪽 유다가 승리한다. 원인은 솔로몬의 손자 아비얌과 병사들의 정신력이었다. 수적으로 열세였기에 주님께 의지했던 것이다. 패배한 북쪽 임금 예로보암은 재기하지 못하고 죽었다. 상황은 계속해서 남쪽에 유리해졌다. 하지만 통합에는 실패했고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예로보암은 솔로몬이 발탁한 인물로 원래는 건설현장 감독관이었다(1열왕 11,28). 예언자 아히야를 만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주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솔로몬에게서 이 나라를 찢어 너에게 열 지파를 주겠다. 너는 이스라엘 임금이 될 것이다. 네가 나의 규정과 계명을 지키면 나는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1열왕 11,31).
누군가 아히야의 예언을 솔로몬에게 고해바쳤다. 당장 예로보암을 잡아들이라는 왕명이 내렸다. 어쩔 수 없이 이집트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때를 기다리며 저항세력을 규합했다. 솔로몬이 죽자 곧바로 돌아왔고 르하브암이 왕이 되자 전면에 나섰던 것이다(1열왕 12,3). 이후 북쪽 지파의 지지로 임금이 되었고 스켐을 임시 수도로 정하며 예로보암 체제를 시작했다. 그의 치세는 22년이었고 아들 나답(Nadab)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하지만 2년 뒤 바아사(Baasha)의 쿠데타로 나답은 살해된다(1열왕 15,27). 예로보암 왕조는 그의 아들 대에서 끝난 것이다.
예로보암의 최대 실수는 우상숭배 허용이었다. 그는 왕족출신이 아니었다. 평민에서 왕이 된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뽑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생 잊지 말아야할 이 사실을 망각한다. 권력을 쥐자 방심했던 것이다. 왕이 된 그는 예루살렘으로 예배 가는 걸 막는다. 성전에 들어갔다가 사람들 마음이 변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궁리 끝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베텔(Bathel)과 단(Dan)에 세우고는 이렇게 홍보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오신 주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1열왕 12,28). 예루살렘으로 예배 가지 말라는 거짓 정보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금송아지 앞에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렸다. 임금의 우상숭배였다.
레위 지파가 즉각 반발했다. 목숨을 걸고 반대했다. 그러자 사제직을 박탈하고 다른 지파에게 사제직을 허락했다. 이 또한 율법을 어긴 행위였다. 예로보암이 죽은 뒤에도 후계자들은 베텔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철거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백성들의 예루살렘 출입이 꺼림직했던 것이다. 예로보암은 살아생전 자신의 맏아들이 죽는 비극을 체험한다. 민중을 죄짓게 한 보속이었다(1열왕 14,10). [201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왕국분열 (4) 왕국분열 이전 이스라엘 제전의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민족의 자부심이며 영적 구심점이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뒤에도 북쪽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남쪽 성전에서 제사를 봉헌하곤 했다. 북쪽 지도자들에게는 정치적 부담이었다. 예로보암이 베텔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든 뒤 절하게 했던 진짜 이유다. 전통신앙 대신 토착 신앙을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우상숭배였다. 사제들이 반발하자 자신의 지지자를 사제로 임명했다. 레위 지파가 아닌데도 임명했다(1열왕 12,31).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는 율법도 무시했던 것이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 그의 가문이 몰락하게 되는 이유다.
예로보암이 죽자 아들 나답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2년 뒤 살해됨으로 예로보암 왕가는 사라지고 만다. 왕권을 가로챈 이는 바아사(Baasha)였다(1열왕 15,28). 이사카르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 장수였다. 당시 나납은 필리스티아인 도시를 포위 공격하고 있던 중이었다. 전쟁터에서 군 지휘관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죽인 것이다. 권력을 잡은 바아사는 예로보암 일족을 몰살시킨다. 열왕기는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했다(1열왕 15,29). 바아사는 24년간 통치했지만 금송아지를 철거하지 않았다. 그 역시 백성들이 남쪽으로 가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정통신앙은 위협받고 있었다. 바아사는 ‘바알은 태양이다.’라는 뜻이다.
북쪽이 우상숭배에 빠져들자 남쪽으로 이주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정통신앙 수호자들이 가족과 함께 북쪽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바아사는 이탈을 막고자 남쪽 경계선에 성곽도시 건설을 시도한다. 라마(Lama)였다(1열왕 15,17). 남쪽 임금 아사(Asa)는 외교전으로 맞섰다. 다마스쿠스의 임금 벤 하닷에게 북쪽공격을 충동질한 것이다. 성공을 위해 성전과 왕실의 보물 수천 점을 바쳤다(1열왕 15,19). 벤 하닷이 북쪽 몇몇 도시를 공격하자 바아사는 라마를 세우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남쪽 임금 아사는 두고 간 성곽자재를 거두어 국경지대 게바와 미츠파 도시를 보강하는데 사용했다(1열왕 15,22).
남쪽은 아비얌과 아사 왕으로 이어지는 안정기였다. 하지만 북쪽은 쿠데타로 집권한 바아사가 우상숭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차에 아사 왕은 다마스쿠스의 벤 하닷을 끌어들여 북쪽을 제압했던 것이다. 남쪽 아사가 41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북쪽은 6명의 왕이 바뀌는 혼란이 계속되었다. 우상숭배의 보속이었다.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성경의 세계] 왕국분열 (5) 북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여섯 명의 왕이 바뀌는 불안한 정국으로 출발했다. 남쪽에는 정통성을 지닌 다윗 가문이 있었지만 북쪽은 없었던 탓이다. 첫 임금 예로보암은 솔로몬 말기 예언자 아히야의 천거로 등장했다(1열왕 11,37). 학정에 질렸던 민중의 대변자였다가 왕이 된 인물이다. 주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우상숭배에 빠짐으로 그의 왕조는 끝난다. 그분 손길이 떠났기 때문이다. 뒤를 이은 왕들도 금송아지 우상을 철거하지 않았다. 혼란이 계속된 이유다.
혼돈시대 여섯 임금. ① 예로보암 아들 나답(Nadab). 치세 2년에 살해됨. ② 쿠데타로 왕이 된 바아사(Baasha). 3번째 왕으로 24년 통치. 금송아지 제거를 미룸. ③ 아들 엘라(Ela)가 4번째 왕이 되지만 2년 뒤 살해됨. ④ 반란의 주인공 지므리(Zimri)는 7일간의 왕. ⑤ 그를 죽이고 오므리(Omri)가 6번째 왕이 됨. 군사령관으로 왕위찬탈에 반발해 쿠데타를 일으킨 것. ⑥ 하지만 또 다른 군의 실세 티브니(Tibni)도 왕으로 선언. 두 명의 임금이 등장. 양쪽 세력은 4년간 싸운다. 승리한 오므리는 티브니 세력을 제거하고 단독 왕이 된다.
오므리는 12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내정에 힘썼다. 왕위찬탈은 없었고 안정이 찾아왔다. 그의 왕조는 100년간 지속되고 아들 아합(Achab)과 손자 아하즈야(Ahaziah)와 요람(Jehoram) 때까지 계속되었다. 왕이 된 오므리는 6년 뒤 수도를 바꾼다. 티르차에서 사마리아로 옮긴 것이다. 기존 세력에 대한 견제였다. 북쪽 최대 성지 스켐에서 북서쪽 11km 지점에 세운 신도시였다. 남쪽 수도 예루살렘과는 68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사마리아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열왕기는 사마리아 땅 구매를 이렇게 전한다.
오므리는 사마리아 산을 세메르에게서 은(銀) 두 탈렌트로 산 뒤, 그 산을 요새로 만들고 자기가 세운 성읍 이름을, 산의 본래 소유자 세메르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하였다(1열왕 16,24). 구릉지로 평지보다 100m 정도 높았기에 방어에 유리했다. 훗날 아시리아 침공을 받았을 때 사마리아는 3년을 버티며 저항하다 식량부족으로 항복했다. 난공불락 요새였던 것이다. 이후 오므리는 동쪽의 모압을 정복했고 서쪽의 해안도시와도 동맹을 맺었다. 페니키아의 항구 티로와 시돈은 아합 시대에는 가까운 이웃이 된다. 아합과 정략혼으로 맺어진 이제벨(Jezebel)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이었다(1열왕 16,31). [201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가톨릭마산 14면, 신은근 바오로 신부(의령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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