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독서 I.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1. 렉시오 디비나 유네스코가 1995년에 세계인의 독서 증진을 위해 ‘세계 책의 날’로 지정한 4월 23일은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돈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가 세상을 떠난 날이기도 하고,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근처에 위치한 카탈루냐 지방에서 제오르지오(George) 성인의 축일을 경축하며 책과 꽃을 선물하는 풍습이 행해지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 그곳에서는 ‘사랑을 위해 장미를, 영원을 위해 책을’이란 슬로건을 달아놓기도 하는데, 이는 책과 꽃이 지성과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랑을 지혜롭게 가꾸자는 뜻이 담긴 표현입니다. 독서는 학문과 인격을 갖추는데 가장 훌륭한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 선조들도 책을 가까이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도 책을 읽는 것과 연관된 용어입니다. 라틴어 명사형 ‘렉시오(Lectio)’라는 단어는 ‘수집, 모음’ ‘독서’ ‘강독’ ‘선택’ 등의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렉시오 디비나’에 담고 있는 ‘Lectio’는 ‘독서’라는 의미에 집중합니다. 독서이지만 단순히 읽는다는 것 이상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에 ‘신성한’ ‘신적인’ ‘하느님의’이라는 뜻의 형용사 ‘Divina’를 덧붙여서 ‘렉시오 디비나’라고 명명합니다. 이를 ‘신성한 독서’ 혹은 ‘거룩한 독서’라고 부릅니다. ‘독서’라면 렉시오 디비나는 무엇을 읽는 것일까요? 2. ‘ 렉시오 디비나’는 ‘거룩한 독서’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저런 책을 읽고 살아갑니다. ‘책의 날’을 특별하게 지정할 만큼 독서를 장려해야 하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다수의 책을 읽고 지식과 교양을 높여갑니다. 그러나 렉시오 디비나는 학문적인 책이나 여타의 종교 서적, 신심 서적과 같은 일반적인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독서의 대상, 방법, 목적이 일반 서적을 읽는 것과 달리 오직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기 때문에 세속적인 독서나 학문적인 탐구를 위한 독서와는 전혀 다른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한 성경을 읽는 것이고, 성경을 읽되 지적인 분석과 비판적인 접근 방법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기원은 하느님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이 말씀의 신비는 인간적인 노력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위로부터 각자의 마음에 내려오는 은총을 통하여 그 심오한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고려한다면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읽고 내면화하는 인간적인 활동인 동시에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인 활동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는 것이면서 또한 사무엘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고백하듯이 충실한 종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건네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도 합니다. [2017년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교황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II.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어느 작가가 운동과 다이어트에 대해 “잠깐 한번 노력해 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휴가 때 잠깐 운동을 하거나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당신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서 렉시오 디비나를 떠올렸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도 일회적이 아니라 꾸준히 할 때 가능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반복 한다.’는 의미의 ‘콘티누아(Continua)’라는 단어를 덧붙입니다. 따라서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는 ‘하느님과의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잠깐 한 번 노력해 보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한 번 크게 이는 폭풍우에 바위에 구멍이 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의해 구멍이 패이는 것처럼, 지속적인 노력이 병행될 때 무엇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진리를 알고는 있지만 어떤 행동이 자기 몸에 붙기까지 반복적으로 꾸준히 지속하는 것만큼 힘든 게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굳게 다짐하였으나 작심삼일이 되고 마는, 너나 할 것 없이 보편화된 실패에 대해 서로 관대해지나 봅니다.
사실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행동을 10여년 정도 꾸준히 한다면 아마도 그 분야에서 상당한 전문가의 수준에 도달할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도 ‘독서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친숙해지게 하며, 친숙해지면 신앙이 자란다.’고 하였듯이, 우리가 성경의 세계와 친숙해지기 위해서는 꾸준히 읽고 자주 대하는 지속적인 인내가 필요합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지속적으로 집중해서 꾸준히 읽는 것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의 영혼과 육신이 서서히 말씀으로 관통될 정도로 매일 적은 시간이라도 여건이 되는 만큼 꾸준히 성경을 읽고 또 읽는 것입니다. 어느 날 식사를 많이 했다고 며칠을 굶는 것이 아니라, 식사 시간과 양을 규칙적으로 지속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렉시오 디비나도 규칙적인 시간, 정해진 시간을 요구합니다. 급하고 부적절한 시간에는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그때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알맞은 시간을 찾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열망 때문에 마치 하느님의 몫으로 정해놓은 맏배를 바치듯이 고요와 침묵에 도움이 되는 적절한 시간을 자신의 시간표에서 따로 떼어놓아야 합니다.
작은 행동이지만 꾸준히 하다보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 세상을 바꿀만한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매일 매일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렉시오 디비나를 하다보면, 내가 말씀을 읽고 있는데 오히려 말씀이 나를 읽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2017년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III.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1. 은총을 맞이하기 위하여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것저것 낚시 준비하는 자체가 즐겁습니다. 낚시할 장소에 도착해서 낚시대를 펴고 낚시하는 행동들이 다 즐겁습니다.
낚시 도구를 잘 차려놓은 다음 물가에 앉아 찌만 바라보고 있어도 혹은, 의자에 누워 낚시대가 드리워진 물과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고민도 시름도 불만도 다 잊고 기다림 가운데 알듯 모를 듯 자신에게 스며드는 설명 못 할 행복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어획이 없으면 아쉬운 감이야 있겠지만 비록 허탕치고 돌아와도 물가에 가는 그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서 다음 기회를 기다립니다.
렉시오 디비나를 하는 모습도 낚시꾼과 참으로 유사합니다. 오래전 우리와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형성된 성경은 ‘이해하기에 쉽지 않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삶을 비추는 힘이 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말씀을 갈망하지만 자기 자신을 만족하게 하려는 노력이 아니므로 낚시꾼이 어획 없이도 설렘으로 다시 낚시터를 찾듯이, 아무런 감동 없이 밋밋해도 지치지 않고 성경을 매일 읽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과 우리 각자를 읽으시고 보셨듯이 우리도 그 시선으로 세상과 자신을 읽고 보는 눈을 지니는 은총을 맞이하기 위해서 성경이 펼쳐진 말씀의 낚시터에서 예의(銳意) 주시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2. 게으름의 유혹
지난주에 우리는 성경을 읽는데 ‘꾸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았습니다. 매일 매일 지속해서 렉시오 디비나를 하는데 제일 큰 방해거리는 밖에 있기보다는 자신 안에 있는 게으름 즉, 태만이 원인인 경우가 많습니다.
경건을 빙자한 게으름은 자신을 속이면서 안일한 삶을 부추기고 얼마나 자주 영혼의 진보를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는 사랑의 반대말을 미움이 아니라 게으름이라고 주장하고, 악을 게으름의 극한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렉시오 디비나를 지속해서 실행하지 못하게 하는 1등 공신인 게으름을 극복할 수 있다면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갈 것입니다. 게으름과 더불어 방랑자처럼 방향 없이 사방으로 향하는 분심도 말씀의 샘에서 우리를 차단시키는 큰 장애물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마치 시집을 읽는 것처럼 천천히 읽으면서 깊은 맛을 보고 말씀 안에 잠긴다면 좋겠으나, 다양한 여건과 이유로 자주 밑도 끝도 없이 분심이 올라오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 성경을 덮기보다는 큰 소리를 내어 읽는다면 분심을 떨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눈으로 읽는 시각에다 소리를 덧붙이는 청각으로 주의를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소리를 내어 읽는 동안 마음이 다른 데로 분산될 여지가 매우 적습니다. [201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IV.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3. 성경을 통째로 읽는다
성경을 읽다 보면 구약에 담고 있는 수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복잡다단하게 다가오기도하고, 성경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마치 독립된 단막극처럼 서로 무관하게 펼쳐지는 듯이 보이기도 하여 구약과 신약의 조합이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개별 본문들을 총체적인 계시의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신·구약은 모두 현재를 조명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미래를 예고하기도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역사를 정리하면서 그들이 체험한 수많은 신앙과 교훈을 제공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말씀 안에는 신약이 예고되어 있고 신약의 말씀은 구약을 통해 더욱 명확해집니다.
분명한 것은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따로 떼어 분리하지 않고 ‘구원의 역사’라는 하나의 맥으로 관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째로 읽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말씀과 친숙한 사람들은 하느님 말씀을 총체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성경을 읽다가 간혹 출몰하는 몰이해의 부분적인 걸림돌에도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달리 성경을 전체로 바라본 경험이 전혀 없다면 말씀에 대한 안목이 짧을 수밖에 없어서 전체적인 균형을 잡기 어렵습니다. 성경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보다 주관주의와 같은 오류에 빠질 위험이 훨씬 클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전체로 읽고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렉시오 디비나에서는 성경을 부분이 아니라 통째로 읽을 것을 강조합니다. 단숨이 아니라 서서히 성경과 친숙해지기 때문에 렉시오 디비나를 실행해 가는 과정을 외국어를 배우는 데 비유하여 말하기도 하고, 농부가 가을걷이를 위해 꾸준히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 후 바로 수확할 수 없고, 외국어가 입에 붙어 말이 나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논밭의 작물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농부가 작물을 가꾸듯 시간을 내어놓지 않는다면 렉시오 디비나를 통한 영적 진보인 하느님과의 일치는 불가능합니다. 성경 말씀이 담고 있는 본래 의도를 잘 이해하고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능케 하는 렉시오 디비나를 하기위해, 가능하다면 새벽이나 일과 시작 전에 적어도 30분 정도를 할애하여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어 나가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겠습니다.
이러한 여건이 되지 못하다면 하느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게 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루 가운데 가장 적합한 시간을 찾아 빠지지 않고 실행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V.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숨은 그림 찾기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만들어지는 어린이 신문은 흥미롭고 인기가 있었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매번 신문에 게재되는 숨은그림찾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신문이 나오는 날이면 학교 앞에서 산 신문을 교실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친구들과 숨은그림을 먼저 찾으려고 부산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보물을 찾듯이 숨어있던 그림을 찾을 때마다 그 부분만 색칠해놓고 보면, 이곳저곳 얼마나 잘도 숨어 있는지 힐끗 보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정 관념을 가지고 피상적인 눈으로 보면 찾으려는 숨은 그림은 보이지 않고 그 이름처럼 꼭꼭 숨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세부적인 그림들도 내 시각을 뛰어 넘는 열린 순수한 마음의 눈으로 볼 때 숨어 있는 그림들이 하나둘 보입니다. 거의 다 찾고 나면 난도가 높은 마지막 한두 개는 좀 더 길게 씨름을 하고 그림을 이리저리 뚫어져라 본 후에야 찾을 수 있었던 기억들이 새롭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를 하는 데에도 고정 관념을 갖거나 자신의 시각만을 고집하며 성경을 읽는다면 숨은 그림처럼 말씀 안에 숨겨진 무수한 보물들을 하나도 찾지 못하고 스쳐지나갈 것입니다. 각각의 성경은 서로 내적 역동성을 지니고 있고 성경 전체는 하나의 통일체이기 때문에 전체를 보지 않고는 부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록 구체적인 한 부분을 읽고 있더라도 전체를 보는 넓은 시야가 필요합니다.
나무도 보고 숲도 보는, 부분을 깊이 바라보는 것과 전체를 넓게 보는 안목을 병행하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성경을 읽을 때 취사선택하거나 되는대로 성경을 넘겨서 읽는다면 렉시오 디비나를 하는데 있어 그 흐름을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내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성경 본문을 선택하고 싶은 유혹을 일시적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경을 무작위로 펼쳐서 눈에 닿는 첫 구절을 읽는다거나, 일부만 읽고 어떤 부분은 제외하며, 친숙하지 않거나 모호한 부분을 자주 건너뛰면서 성경을 두서없이 읽는 스쳐 읽기 등은 주님의 말씀을 자칫 사탕발림으로 전락시킬 수 있습니다. 성경은 각자가 원하는 것만을 보여주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서 마음에 드는 말만 선별하려는 유혹을 경계하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데로 따라가는 순박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드는 성경 구절만 찾아다닌다면 성경을 하나의 구급상자처럼 만들어 버려 하느님 말씀을 단지 도구적 역할로 한정시키게 되는 오류를 범할 여지가 많습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대충대충 읽지 않고 또한 듣고 싶은 말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현재 자신에게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는지 온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착한 종을 고대합니다. [201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VI.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렉시오 디비나의 4가지 단계
교회의 역사 안에는 여러 가지 성경 읽기 방법이 있어왔지만, 12세기 카르투시오 수도회의 원장이었던 귀고 2세(Guigo II)는 하느님과의 높은 일치를 향해 올라가야 할 영적 단계로써 1) 읽고(Lectio) 2) 묵상하고(Meditatio) 3) 기도하고(Oratio) 4) 관상하는(Contemplatio), 4부분으로 성경 읽기 방법을 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궁극적 목적인 영적 여정의 4단계는 각 단계마다 명칭으로는 구분되지만 고리로 연결된 것처럼 사실상 뚜렷이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이 4단계는 영적 여정을 하는 사람들을 점차 더 깊은 내면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읽기 단계를 충실히 하다 보면 자연스레 다음 단계인 묵상과 기도, 관상으로 나아가게 도와줍니다.
1단계라고 할 수 있는 성경 읽기가 묵상으로 심화되지 못한다면 읽기는 그 자체로 메마를 수 있고, 2단계인 묵상이 1단계인 읽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렉시오 디비나를 한다고 하지만 오류에 빠지기 쉽습니다. 3단계인 기도도 마찬가지로 그 이전 단계인 묵상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면 기계적인 것이 되어 냉담해지기 쉬운 반면, 묵상이 기도로 심화될 때 그 기도는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인 관상의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각각의 단계는 단절되지 않고 다른 단계들을 위해 작용하는 유기적 관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 단계인 ‘읽기’를 마지막 단계인 ‘관상’보다 소홀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렉시오 디비나의 시작인 읽기 단계가 가장 기본이 되기 때문에 더 중요합니다. 읽기는 글자 그대로 본문을 읽는 것으로 외적 감각을 통해 성경의 세계로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묵상은 읽기를 통해 발견한 말씀의 보물을 더 주의 깊게 숙고하고 되새기는 것입니다. 읽기가 외적 감각의 작업이라면 묵상하기는 내적이고 지적인 작업이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머무는 시간입니다. 렉시오 디비나를 하면서 자신의 일상과 그 일상이 몸담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내 시각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읽기와 묵상하기 그리고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해 올리는 기도하기의 단계를 능가하는 관상은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선물입니다.
관상은 우리 스스로 고집하여 받을 수 있는 선물은 아니지만 읽기, 묵상하기, 기도하기를 충실히 준비하고 실행하였을 때 기대할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합니다. [2017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VII.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메디타시오(Meditatio 묵상)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읽고 그것을 알아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룩한 삶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읽은 말씀을 근간으로 묵상함으로써 하느님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마음속에 꼭꼭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 표출하려 애씁니다. 깊은 우물과도 같은 성경의 세계에서 우리가 생명의 물을 긷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묵상’이라는 두레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을 읽는 것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에서 비롯되고 묵상에 사용할 묵상 자료는 1단계인 성경 읽기에서 제공해 줍니다. 거룩함에서 흘러나온 말씀을 묵상함은 거룩해지는 것을 지향합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매일매일 살아가는 자신의 일상과 그 일상이 연관된 사건들을 말씀을 읽는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삶을 서서히 복음의 관점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수도생활을 시작한 초심자 시절, 지도 수녀님이 애써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묵상이었습니다. 매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체조를 하고 성당에 들어가면 공동기도 전에 의무적으로 묵상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새벽의 고요함 속에 백 명이 넘는 수녀님들과 함께 묵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의무로 앉아있자니 무엇을 해야할지도 모르고 긴장과 정적 가운데 애꿎게 밀려오는 졸음과 싸우며 장궤틀에 놓인 시계만 보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묵상은 이론적인 가르침만으로 되지 않고 가르침과 함께 몸과 마음에 붙을 정도로 익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묵상을 의무감만으로 한다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큰 짐이 될 것입니다.
메디타시오(묵상)는 성경 말씀을 추론하거나 분석하는 작업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내면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말씀을 내면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적인 숙고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고, 읽은 말씀을 잠시 생각하고 되새기(ruminatio)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매일 렉시오 디비나를 하면서 그날 읽은 내용이 무엇인지,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지,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숨은 그림을 찾듯이 잘 들여다보고 곰곰이 생각하고 다시 살펴봅시다. 들려준 말씀이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깊이 음미하는 묵상의 반복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은 죽어 있는 글자가 아니라 생동감 있는 말씀이 됩니다. 삶과 마주하는 쌍날칼처럼 살아 있는 말씀은 차츰차츰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VIII.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오라시오(Oratio 기도하기)
침묵은 사방에 퍼져 있는 우리 시선을 모아 성경을 읽는 중에 오직 말씀에만 집중시키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간혹 텔레비전 등을 통해 이스라엘인들이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 혹은 몸을 앞뒤로 오뚝이처럼 흔들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에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은 ‘주님께 영혼을 들어 올리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이는 자기 이탈을 뜻하는 것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여러 분심으로 갈라질 수 있는 자신의 존재를 하나로 통일하여 주의 깊게 듣고자 갖추는 자세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도는 신앙인이 자신이 믿고 있는 신과 연결하는 자연스러운 매개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의 법으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면 인간은 기도로 하느님께 말합니다. 주의 깊게 성경을 읽고, 읽은 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온 이해력을 다해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그 의미를 깊이 찾아 들어가는 묵상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하느님과 만나는 기도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기도 없는 묵상은 열매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형태의 책읽기와 렉시오 디비나를 구분하는 가장 큰 특징은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읽고도 읽은 것을 깊이 생각하고 되새기고 그 의미를 짚어보는 묵상단계와 같은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주님 안에서 말씀을 듣고 그에 응답하는 기도는 거룩한 독서의 단계에서 행하는 독특한 과정입니다.
렉시오 디비나는 영적 서적을 경건하게 읽는 것 이상의 무엇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독자의 이성만이 아니라 마음의 차원으로 내려와서 머무는 기도의 방식이기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당신 현존을 느끼게 해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엘리야 예언자가 호렙산에서 체험한 것처럼 거친 폭풍이 아니라 부드러우면서도 고요한 가운데 부르십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기도하는데 집중력을 높이고 고요함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외적인 공간 또한 중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되도록 번잡한 곳을 피하고 쉽게 집중하여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고요한 분위기가 유지될 수 있는 공간이면 매우 좋겠습니다.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지평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 삶의 리듬을 고려해서 렉시오 디비나를 잘하는 데 도움이 될 적당한 공간, 말씀을 접하고 어떤 원의나 소망을 품으며 말씀을 독대하고 음미할 수 있는 성막과 같은 장소면 좋겠습니다.
공간의 침묵을 통해 마음의 침묵을 이끌기 때문에, 그곳이 비록 시장 골목과 같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어도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찾아 말씀과 함께 머무는 고요한 성막을 만든다면 더 깊이 ‘기도하기’에 이를 것입니다. [2017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IX.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콘템플라시오(Contemplatio 관상)
성경을 읽고 성경의 세계에 잠긴다는 것은 단지 많은 책들 중에서 책 한 권을 읽거나 연구하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유한한 인간은 성경 안에 담긴 말씀의 진의를 여느 책과 달리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을 접하면 접할수록 인간의 모든 지성을 초월하고 인간이 자랑하는 과학과 기술을 능가하는 신비와 직면하게 되는데, 이런 신비를 기도 가운데 ‘관상’(觀想)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관상이란 무엇일까요?
이사야 예언서 1장 1절에는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 본 하느님의 환시”라고 소개하면서 히브리어 단어 ‘하존’을 사용하는데, ‘하존’은 ‘응시하다.’ ‘주시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하자’의 명사형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의 마지막 단계를 ‘관상하기’로 잡습니다. 관상을 뜻하는 라틴말 ‘콘템플라시오’는 그리스말 ‘테오리아’에서 기원하는데 이 단어도 ‘바라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관상이라는 단어는 내적인 눈으로 단순히 보는 행위, 깊이 응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실재와 신비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분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주님의 현존에 열중하여 다른 어떤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완전한 집중을 하기 때문에 관상상태에서는 자신 안에서 찾고 생각하는 모든 움직임들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현존 앞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게 됩니다. 관상은 기도라든지 기도의 결과로 받게 되는 것, 즉 개인적인 노력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겸손 없이는 하느님 말씀을 통찰하는 관상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일치에 이르게 되는 기도의 궁극적 열매를 맛보는 관상은 오롯이 주님의 현존에 집중하는 어떤 강렬함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탈혼 혹은 비범한 체험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범한 것, 일상적인 것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비움으로써 하느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는 관상의 눈은 일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모든 것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감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도체험은 하느님의 모상인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분리될 수 없듯이,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즉 거룩한 독서를 통해 형성된 관상의 눈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 결과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향해 확장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렉시오 디비나를 통해 관상에 머문다는 의미는 ‘홀로 영적 황홀감에 도취해 있으라.’ 는 의미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은 영원한 사랑이시다.’라는 진리를 알리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재촉하는 것입니다. [2017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X.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다윗 이야기(1사무 17장)
다윗은 누구보다 두드러진 인물이어서인지 그림뿐 아니라 ‘베르니니의 다윗 조각상’, 청동으로 제작한 ‘도나텔로의 다윗 조각상’ 등 다윗을 묘사한 여러 작품이 제작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다윗 조각상은 너무 크고 결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피렌체 대성당 작업장에 오랜 세월 버려뒀던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조각상은 미켈란젤로가 버려진 대리석을 구입해, 다윗이 사무엘기 17장에 등장하는 거대한 필리스티아인 투사 골리앗에게 돌팔매질하려는 순간을 멋지게 포착하여 조각한 불후의 작품입니다. 돌팔매 가죽끈을 둘러맨 어깨와 목덜미 근육이 뻣뻣하게 서있고, 돌을 던질 오른팔과 손은 잔뜩 힘이 들어가 핏줄과 근육이 곤두서있는 인간 다윗의 두려움과 힘의 역동성이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표현되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사울의 왕궁 악사로(1사무 16장) 그리고 골리앗을 쳐부순 전쟁의 영웅으로(17장) 전개되는데, 다윗 이야기 가운데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사무엘기 17장의 역동적이고 긴장감이 도는 긴 이야기에서 다윗의 깊은 믿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천천히 읽으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승리하기까지 다윗의 움직임을 봅니다. 자신의 힘만을 믿는 골리앗과 달리 다윗은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저를 빼내 주신 주님께서 저 필리스티아 사람의 손에서도 저를 빼내 주실 것입니다.”(1사무 17,37) 라고 고백하며 목동생활을 할 때 온갖 위험 속에서 자신을 구해 주셨던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구원을 확신하며 골리앗과의 결투를 자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골리앗과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진정한 승리의 원천이신 만군의 주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가능함을 고백합니다(1사무 17,45-47). 결투를 하려면 군복과 놋 투구, 왕의 검 등 장비를 갖추어 입어야 하지만 군장을 사용해 본 경험이 없는 다윗은 군장이 너무 무거워 벗어버리고, 평소에 양을 치던 지팡이를 손에 든 채 돌팔매질에 사용할 다섯 개의 매끈한 돌을 골라 주머니에 넣고 싸움터에 나갑니다. 골리앗은 홍조를 띤 소년 다윗을 보고 조롱하고 멸시하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였으나 두 사람의 본격적인 싸움에 이르자 골리앗의 육중한 움직임과 다윗의 번개처럼 빠른 동작이 대조됩니다. 군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단지 몰매와 돌을 가지고 나간 다윗은 평소에 하던 돌팔매로 표적을 적중시킨 것처럼 골리앗의 육중한 몸을 땅바닥에 쓰러뜨려 죽였습니다.
우리도 삶의 여정에서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이 힘에 겨운 골리앗을 대면해야만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불필요한 군장’에 연연하지 않고 신앙으로 무장하고 싸움터에 나아갔던 다윗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용기가 나지 않을까요? [2017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XI.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솔로몬의 기도(1열왕 8,22-66)
해발 약 800m에 위치한 예루살렘은 산상 도시입니다. 히브리어로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그 이름과 달리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않는 그곳에 주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주님께서는 “내 이름이 거기에 머무를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1열왕 8,29).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의 현존을 느끼게 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보호와 이끄심을 확신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솔로몬이 등장하는 열왕기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성전 건립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은 제1성전(1열왕 6-8장; 2역대 3-5장)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던 장소로 알려진 예루살렘 동쪽 언덕에 위치한 모리야 산 위에 동서로 긴 장방형 구조로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주님을 모실 성전을 건립한 감격과 함께 주님께 올리는 솔로몬의 간절한 기도를 봅니다.
다윗 왕조를 위한 기도로 시작하는 솔로몬의 기도는 예루살렘 성전의 유일무이한 특성인 주님께 예배드리는 곳,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는 장소임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에게 주님의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신 주님을 찬양하고 이어서 다윗의 후손들에게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구적으로 허락해 주겠다는 두 번째 약속도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솔로몬이 바치는 기도는 물리적으로 성전 안에서 성전을 향하여 드리지만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께 올리는 기도입니다.
기도의 중반부(8,30-43)에는 주님의 성전이 수행하게 될 기능들을 다섯 가지 경우와 상황을 들어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솔로몬이나 그의 백성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주님이 하늘에서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과 두 사람이 주님에게 맹세하며 상반된 서원을 했을 때 주님이 진실을 가려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돌아와 성전에서 용서를 간청하면 주님이 용서하고 회복해 주실 것과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으면 가뭄으로 벌하시고, 그들이 돌아와 뉘우치면 용서하시고 비를 내려 주실 것을 청합니다. 제때에 비를 내려주신다는 것은 그해 수확의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확대하여 그들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그들의 호소를 들어 주실 것을 간청하는데, 이는 모든 민족이 주님을 알고 경외하도록하기 위함입니다. 온 우주마저도 모셔 들일 수 없는 주님은 초월적인 분이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솔로몬은 그런 주님이 현존하신다고 믿고 있는 성전을 향해 자신과 그의 백성들이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 짓게 될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오늘 주님이 계신 성전을 찾은 우리는 주님의 성전을 향해 무엇을 간청합니까? [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XII.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레위기와 민수기에 잘 설명되듯이 이스라엘의 교계제도는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평신도 계층으로 구분됩니다. 사람과 장소 그리고 물건들을 거룩한 것과 비속한 것으로 엄격하게 분리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속한 내부자들과 이방민족인 외부자들을 철저하게 구분하였습니다.
남북왕국으로 분열되어 통치하던 시기에 북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는 당시 근동의 패권자가 된 아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하여 지배를 받습니다. 민족들을 서로 혼합시키려는 아시리아의 의도적인 교차정책(cross deportation)은 유다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들과 진배없이 경시하게 된 기원이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천천히 읽어봅니다. 한 율법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던진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에 다 거론되는 예리코는 산상도시 예루살렘에서 약 30k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예리코는 해저 약 260m에 위치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를 가려면 계속 하행길을 가야만 합니다.
내려가는 길 도중에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봉변을 당하고 버려진 장면에서 비유가 시작됩니다. 그 길을 지나가는 사제와 레위인은 길 위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칩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시체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율법에 명시한 규정을 어기지 않겠다는 나름 타당한 이유로 무심히 지나치면서도 개의치 않습니다(레위 21,1). 이어서 등장한 사마리아 사람은 불행해진 이웃을 두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급히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치료한 뒤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극진히 보살펴줍니다. 이튿날 사마리아인은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그를 돌보아 달라고 부탁하고 다시 돌아와서 나머지 비용을 갚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떠납니다.
마음에 품은 연민과 자신의 재산을 바르게 씀으로써 사랑과 선(善)을 예증하는 이 비유는 평소에 형제라고 여기지도 않았던 생면부지의 사람이 강도 맞은 이의 참된 이웃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제나 레위인처럼 그도 거부할 이유를 찾으면 궁색하지 않을 변명 하나쯤은 생각해낼 수 있을 텐데 불행해진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그를 함께 가야 할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진실을 수반한 사마리아인의 태도는 말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참된 이웃의 모습을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 사랑의 이중계명에 자유롭지 못함에도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해야 할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다른 시간에, 다른 날에... 등을 읊조리며 미루다 보니 인생에서 제일 바쁜 날은 매번 ‘내일’이 되고 맙니다. 이런 헛똑똑이 같은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은 다시 묻습니다. 너는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2017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XIII. 렉시오 디비나 콘티누아(Lectio Divina Continua)
밭에 숨겨진 보물(마태 13,44-46)
놀랍게도 이스라엘인들의 독립선언문에서 성경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 민족은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났다 …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민족적이며, 또한 보편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한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또한 이 땅에서 책 중의 책, 영원한 성경을 전 세계에 선사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이 지닌 성경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구절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성경을 신앙과 지혜의 원천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성구갑에 넣어 머리와 팔에 메고 다니거나 옷단에 넣어 다니기도 하여 하느님 말씀에 대한 지극한 공경과 겸손을 삶에서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들이 이처럼 성경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밭에 묻힌 보물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지혜는 보물(잠언 2,4; 이사 33,6)과 진주(잠언 3,15; 욥 28,18)로 간주하고 지혜서에서는 지혜를 반드시 사들여야 할 보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13장에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일곱 가지 비유를 모았는데 그중에서 하느님 나라를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보물의 비유와 진주 상인의 비유를 천천히 읽어 봅니다. 두 비유를 보면 3가지 측면에서 역동성을 지닙니다.
1. 찾음 : 전문적으로 재산을 위탁할 기관이 없던 고대 세계에서 보물을 땅에 감추는 것은 진귀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 밭을 수시로 지나다녔어도 숨겨진 보화를 알지 못했던 것과 유사하게 하느님 나라도 존재하지만 숨겨진 형태이기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묻혀 있는 보물처럼 창조주, 인간,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두는 사람에게만 하느님 나라는 발견될 것입니다.
2. 발견 : 보화나 진주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능가하는 발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발견에 단순히 기뻐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립니다.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가지려 애쓰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그 보물은 마치 없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그 은총의 선물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전심전력으로 응답하고자 애쓰는데 그것은 또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3. 행동 : 이 비유의 강조점은 찾아내는 것에 있지 않고 그 발견에 따른 엄청난 반응 즉 행동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에게서 숨겨진 보물을 보았던 제자들처럼 하느님 나라를 발견한 큰 기쁨이 그로 하여금 더는 다른 헛된 것을 쫓을 수 없게 한다는 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반복되는 일상의 기복 속에서 발견되는 신비임을 깨닫고 기뻐하며 응답하기 때문입니다. [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수원주보 3면, 황미숙 마리루갈다 수녀(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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