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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하바쿡서, 스바니야서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3 조회수4,029 추천수0

[성경 속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 하바쿡서, 스바니야서

 

 

하바쿡은?

 

하바쿡이 어떤 인물인지 또 그가 예언활동을 하던 시기가 언제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제 내가 사납고 격렬한 민족 칼데아인들을 일으키리니”(1,6)라는 표현에서 그때가 바로 신바빌론 제국 시대임을 짐작하게 됩니다.

 

기원전 626년에 시작된 신바빌론은 기원전 612년에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점령함으로써 고대 근동지방의 절대자가 됩니다. 히브리말 구약성경 안에 하바쿡이라는 이름은 하바쿡서에만 나옵니다(제2경전, 다니 14,33-39 참조).

 

 

하바쿡 시대는?

 

당시 최고의 강대국 (신)바빌론 제국(칼데아인들)이 등장하여 주변 작은 나라들을 얼마나 괴롭히고 또 많은 피해를 입혔는지 다음 구절이 밝혀줍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두 낚시로 낚아 올리고 그물로 끌어 오리며 좽이로 모으고 나서는 기뻐 날뛰며 자기 그물에다 제물을 바치고 좽이에다 분향을 합니다. 그것들 덕분에 그의 몫이 기름지고 음식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1,15-17)

 

 

하바쿡에 나오는 악인은?

 

유다왕국의 지배층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칼데아인들(바빌론제국)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먼저 유다 지배층의 악인을 봅니다.

 

“그러니 법은 스러지고 공정은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니 왜곡된 공정만 모습을 드러냅니다.”(1,4)

 

다음 구절에서 악인은 신바빌론제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눈이 맑으시어 악을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잘못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시면서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1,13)

 

 

하느님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하바쿡?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 백성이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두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바쿡은 백성의 죄상을 고발하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이들의 불행을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제가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재난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제 앞에는 억압과 폭력뿐, 이느니 시비요 생기느니 싸움뿐입니다. 그러니 법은 스러지고 공정은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니 왜곡된 공정만 모습을 드러냅니다.”(1,3-4)

 

유다 백성이 정의와 공정의 길을 외면하여 왕국이 몰락의 길을 걸어 악인들이 주름잡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대제국의 횡포 속에 유다인들이 억압당하여 신음하는데 그분께서는 여전히 침묵하신다고 하소연합니다(1,12-17).

 

 

그분의 응답을 듣는 하바쿡?

 

하느님께서는 하바쿡의 두 번에 걸친 하소연(1,2-4; 1,12-17)에 두 번에 걸쳐 응답하십니다. 우선 칼데아인들로 하여금 유다백성을 치게 하여 ‘자기 힘을 하느님으로 여겨 죄를 지은 유다 지도층을’(1,11) 벌하시겠답니다(1,5-11).

 

이어서 예언자가 제기한 하느님 정의에 대한 물음, 곧 칼데아인들의 폭정에 대한 답이 나타납니다. 그 답은 ‘그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은 틀림없이 온다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지금 이 환시는 정해진 때를 기다린다. 끝을 향해 치닫는 이 환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늦어지는 듯하더라도 너는 기다려라. 그것은 오고야 만다, 지체하지 않는다.”(2,3)

 

 

신앙인의 자세는?

 

신앙인은 누구나, 그가 의인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그때까지 성실함 속에서’ 늘 그날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어 ‘성실하다(emet)’는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와 중간 글자와 맨 끝 글자를 합성해 놓은 문자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성실함’은 처음에나 중간에나 끝에나 변함없이 한결같음을 의미합니다.

 

훗날 사도 바오로는 칠십인역 하바쿡서(2,4)에 바탕을 두고 ‘의로운 이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곧 자신이 쌓아올린 공로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화된다.’고 선포합니다(로마 1,17; 갈라 3,11).

 

 

스바니야의 등장은?

 

기원전 640년 요시야가 아직 18살의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올라 왕권을 정비하지 못하자 대신들과 왕자들이 전면에 나서 실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다음 구절에서 엿보게 됩니다.

 

“주님이 희생 제물을 잡는 날, 대신들과 왕자들과 외국 옷을 입은 자들을 벌하리라.”(1,8) 이렇게 볼 때 예언자 스바니야의 등장 시기는 기원전 63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강대국 아시리아가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으며 유다 왕국은 우상숭배로 몸살을 앓고 있던 때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집필 예언자들의 전성기를 대라면, 스바니야보다 120여년 앞서, 기원전 750년경 등장한 아모스를 선두로, 호세아, 이사야 그리고 미카까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잠시 잠잠해졌다가 기원전 630년경 스바니야가 등장하고 이어서 예레미야, 나훔, 하바쿡이 활동합니다.

 

 

스바니야는?

 

무엇보다도 유다 왕국에 두루 퍼져있던 가나안 종교 바알 신 숭배와 종교 혼합주의를 단죄합니다. “지붕 위에서 하늘의 군대를 경배하는 자들, 주님을 경배하고 그분께 맹세하면서도 밀콤[암몬인들의 신]을 두고 맹세하는 자들, 주님을 찾지도 않고 주님에게 문의하지도 않는 자들을 나는 없애버리리라.”(1,5-6)

 

기원전 687년에 권좌에 오른 므나쎄 임금은 아시리아 제국 신들의 제단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우기까지 합니다.

 

 

므나쎄가 한 일은?

 

므나쎄는 히즈키야가 없애버린 우상들을 다시금 공적으로 인정한 셈이 됩니다. “히즈키야 임금은 산당들을 없애고 기념 기둥들을 부수었으며, 아세라 목상들을 잘라버렸다. 그리고 모세가 만든 구리뱀을 조각내었다. 느후스탄이라고 불리던 그 구리 뱀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때까지도 향을 피웠기 때문이다.”(2열왕 18,4)

 

이러한 히즈키야의 대개혁을 므나쎄가 무력화시킴으로써 수많은 유다인들이 아시리아를 비롯한 인접 국가들의 종교를 받아들여 갖가지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므나쎄는 열두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쉰다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자기 아버지 히즈키야가 헐어버린 산당들을 다시 짓고, 바알 제단들을 세웠다. 또 이스라엘 임금 아합이 하던 대로,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모든 군대를 경배하고 섬겼다…… .”(2열왕 21,1-3)

 

 

우상 숭배는?

 

온 나라를 부패하게 만듭니다. 임금을 따라 신하들, 지도자들이 온통 부정과 부패에 빠져들게 됩니다. “예루살렘 안에 있는 대신들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들, 그 판관들은 저녁 이리떼, 아침까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예언자들은 허풍쟁이, 믿을 수 없는 사람들, 사제들은 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율법을 짓밟는다.”(3,3-4)

 

 

주님의 날?

 

주님의 날은 곧 주님께서 당신 자신이 누구신지를 극적으로 보여주시는 날, 악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 날입니다. 스바니야는 이제 그 날이 다가왔다고 선언합니다.

 

“주님의 위대한 날이 가까웠다……. 그 날은 분노의 날, 환난과 고난의 날, 파멸과 파괴의 날,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이다.”(1,14-15)

 

 

주님의 날에는?

 

유다인뿐 아니라 온 세상이 그분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나는 모든 것을 땅 위에서 말끔히 쓸어버리리라. 주님의 말씀이다.”(1,2) “정녕 가자는 인적이 끊기고 아스클론은 폐허가 되리라. 아스돗 주민들은 대낮에 쫓겨나고 에크론 사람들은 모조리 내몰리리라.”(2,4) “모압은 소돔처럼 되고 암몬 자손들은 고모라처럼 되리라.”(2,9ㄴ)

 

“에티오피아 사람들아 너희도 내 칼에 맞아 죽으리라.”(1,12) “그분께서는 북녘으로 손을 뻗으시어 아시리아를 없애시고 니네베를 폐허로, 광야처럼 메마른 땅으로 만드시리라.”(2,13)

 

 

주님의 날은?

 

주님의 의로움이 성취되는 날입니다. 징벌의 날이자 구원의 날입니다. 심판을 통하여 백성이 정화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바니야는 의로움뿐 아니라 겸손을 추구하라고 외칩니다.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2,3) 스바니야는 겸손함이 하느님과 나를, 나아가 이웃과 나를 하나로 만들어주는 끈이요 구원으로 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7년 10월호,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인천교구 용현5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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