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단상] 해방(사랑) 성경을 공부하는 학교가 우리 교구에 서너 곳이 있다. 그 중 한 곳의 강의를 맡고 있고, 이런저런 성경 공부를 신자들과 함께한다. 없는 시간을 내서 어떻게든 하느님 말씀의 뜻을 새겨듣고자 찾아오시는 신자 분들의 열의는 감동적이다. 어느 날, 여느때처럼 강의는 시작되었고 몇몇 구절을 공부한 뒤 나는 한국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그 구절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한 자매님이 손을 들고 말씀하신다. “신부님, 성경 이야기 해 주세요! 저는 신앙적인 이야기 들으러 왔지, 세상 이야기 들으러 온 게 아닙니다.” 순간 교실에 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난 어떻게 답할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신앙 이야기와 세상 이야기는 다른 것인가? 신앙 이야기 속엔 세상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없는가?’ 하며 찰나의 시간을 쪼개어 자매님의 의견에 합리적인 답을 찾느라 헤매었다. 세상 속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겠다고 나선 교회가 언제부터 세상과 구분된 우리만의 또 다른 세상에서 하느님 말씀을 곱씹고 있었던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세상 안에 오셨는데 우리는 왜 세상 밖에서 우리끼리 고귀하다고 하는가? 숱한 질문이 싸한 교실 안과 대비되어 내 머릿속을 뜨겁게 했다. 어쩌면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유폐되어 있는지 모른다. 교회 안에 세워지는 멋진 건물과 신앙의 이름으로 계획된 멋진 사업과 행사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동네, 우리 도시,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아닌지 되돌아 볼 일이다. 신앙생활이 성당생활로 국한된 채 세상의 일에는 무릉도원의 해탈한 도인처럼 그 외곽에만 떠도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하느님 나라는 도무지 어디에 건설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하느님 나라를 그 세상 안에 짓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철없는 객기에 가깝지 않을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짐이 버겁기만 한데도 성당을 찾아 잠시 호흡을 고르고 바쁜 현실에 부딪히기 위해 옷매무새를 고쳐보는 시간을 가지려는 상황에 이웃을 챙기고 사회를 걱정하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또 다른 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은 당연한 게 아닐까? 예컨대 ‘우리는 왜 삶이 이렇게 바쁠까?’, ‘왜 이리 숨 가쁘고 버겁게 살아야 할까?’, ‘여유로운 삶은 애당초 우리에게 힘든 것일까?’ 기존 세상에 순응하며 사는 게 대개의 서민들이다. 간혹 영웅이 나타나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것을 보며 ‘사이다’를 마시듯 통쾌하게 여길 수는 있어도 스스로 영웅이 되는 건 할리우드 영화 속 이야기다. 결국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살다가 어느 날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마음은 늘 반복된다. 해방, 자유… 그 단어들은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우리 삶의 답답함을 방증한다. 해방과 자유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탈출기로 시선이 옮겨진다. 사막을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은 강렬했다. 죽고 사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의 삶을 떠올리며 사막의 현실을 불평했다. 먹는 게 부실했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었던 이집트의 익숙한 시간은 미래에 대한 그 어떤 희망이나 기대조차 가지지 못한 채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하루하루 견뎌야 했던 사막의 시간보다 나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막의 삶이 아무리 자유니 해방이니 해도 이집트의 종살이가 오히려 더 자유로운듯 여겼다. 기존의 익숙함을 벗어나 진정한 해방을 만끽하는 데 이스라엘은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느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향해 당신을 향한 자유와 해방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셨다. 요컨대 탈출기의 해방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닌다. 하나는 ‘~로부터의 해방이고 다른 하나는 ‘~에로의 해방’이다. 모세를 따라 나선 이스라엘 백성은 기존 이집트 삶으로부터의 해방과 하느님을 향한 해방, 이 두 가지 해방을 해내야만 했다. 해방은 익숙한 과거를 이겨내는 시련이었고 그 시련은 존재의 시작, 곧 하느님을 향한 고독한 여행이었다. ‘~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에로의 해방’을 하나로 엮어 제대로 보여준 이가 예수다.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다. 예수는 하느님의 자리를 떠나 참 인간으로 이 세상을 향해 온전히 자신을 내어던졌다. 두 가지 해방을 하나로 엮어낼 수 있었던 예수의 힘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인간에 대한 끝없는 사랑이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프랑스의 비평가이자 시인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가는 필요성(혹은 당위성) ; Le besoin de sortir de soi.” 어쩌면 사랑은 진정한 자유로움일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은 채, 자신의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은 채 타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내어주는 것, 이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해방일 것이다. 예수가 보여준 해방은 세상에 초탈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도인의 극기와 수련의 방법으로는 이뤄낼 수 없다. 버티고 참아내며 세상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려는 ‘독기’로는 진정한 해방은커녕 자기 기준으로 설정한 절제와 극기 속에 평생 노예생활을 할 뿐이다. 예수는 유다사회의 관습과 제도를 어지럽혔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고 죄인들과 어울렸으며 심지어 창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이유인즉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 그것으로 제 존재 모든 것을 내어던졌기 때문이다. 결국 예수가 보여준 해방은 ‘본디 인간됨’을 회복하는 여정이다.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인간만큼 전문가가 있을까 싶지만, 인간만큼 삶에 대해 무지한 존재는 없을 듯하다. 인간의 삶에 대해 뭔가를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인데 자기 삶이 무엇인지, 무엇을 향하는지 묻는 것이 ‘한가한 소리’로 여겨지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인간은 역설적이게도 인간 삶에서 철저히 소외된다. 인간으로서 소외된 채 인간처럼 굳이 살아가야 하는 역설 앞에 삶에 대한 이해와 사유는 애당초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는지, 그 불가능을 ‘현실논리’라 치부하며 본디 삶에서 비껴 사는 게 지금의 우리 모습이 아닌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늘 궁금한 채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예수가 보여주는 ‘본디 인간됨’은 서로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제 삶이 바쁘다고 제 건강과 제 삶의 여유조차 챙기지 못한 채 바삐 살아가는 현실, 제 밥이 급하다고 배달음식을 조급하게 재촉하고 조급한 만큼 목숨을 건 위험천만의 오토바이 운전은 시급을 받는 아르바이트생들에겐 필수적이어야만 하는 현실, 자기 아이의 성공을 위해 어떻게든 더 빨리, 더 많이 배우게 해서 남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부모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자식사랑이라 여기는 현실, 그리고 자기 돈과 권력, 명예가 있어야 인간 꼴을 갖추고 살 수 있다는 착각으로 자기 자신을 사회적 계급이나 직분과 동일시하는 현실, 이 모든 현실을 뛰어넘고 이웃과 사회를 조금씩 살펴보는 것과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이 실은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 ‘본디 인간됨’을 사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의 삶에서 해방되지 못한 채 답답함과 절망과 피곤함으로 사는 건 어쩌면 진정 사랑할 것을, 사랑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떠도는 나그네 삶이라 그런 건 아닌지? 경쟁 가득한 세상에 사랑할 것과 사람을 찾아 나서는 건 종종 자기 자신을 세상의 제물로 내어바치는 꼴이 될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주지하다시피 예수는 사랑한다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었다. 그런데 세상을 이겼다니 역설이고 모순이다. 예수가 말하는 승리는 세상의 것과는 분명 다르다. 세상에서 고난을 겪는 것이 승리한 것일 수 있는 건 세상의 체제나 현실의 논리를 회피하지 않는 용기를 지닐 때 가능하다.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예수는 세상을 끝까지 사랑했고 그 사랑을 꺾지 못해 그 사랑을 회피하고 제거한 세상은 오히려 패배자다. 신앙인이 세상을 이기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잔인하고 각박하고 차가워도 세상을 결코 포기하는 일 없이 세상과 끝없이 하나되는 사랑을 실천하는, 세상과 연인이 되는 것, 그것이다. 히브리서는 이런 사랑의 삶을 깨끗함이라 가르친다.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는 죽음의 길을 걸었다. 죽음을 통해 사랑을 실천한 건, 실은 생명으로 나아가는 힘찬 발걸음이었고(히브 2,14-15), 그로 인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우리는 깨끗해졌다.(히브 10,22) 깨끗함은 목욕탕 들락거리는 일도, 내면의 정화를 위한 묵언수행도 아닌 피와 살로 대변되는 척박한 세상살이를 하루하루 헤쳐 나가는 것이다. 예수가 피와 살로 살다가 피와 살의 고통 속에서 죽은 것처럼 하루하루 그의 삶을 좇아 사는 것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 어쩌면 가족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히고 이웃과 사소한 말다툼으로 가슴에 멍 자국을 남기는 우리의 일상은 깨끗해지기 위한 힘겨운, 그러나 값진 정결의 자리임에 분명하다. 같이 산다는 것을 그 멍 자국만큼 선명하게 확인시켜주는 게 또 있을까. 같이 살기 싫어 도망치고 숨어버리면 그건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감옥에 갇히는 게 아닐까. 강의를 할 때마다 세상과 대립되어 또 다른 세상에 유폐된 이들을 가끔씩 만난다. 어떤 분은 이렇게도 말한다. “신부님, 신부님은 다 좋은데 신앙이 없으세요. 세상 이야기를 하면 안 돼요. 거룩한 하느님 이야기만 해주세요.” 그분은 신앙을 세상 밖 어느 곳에서 만들어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세상 안에서 매일같이 밥 먹고 자고 뒷간 가는 나는 이슬만 먹고 사는 천사일 수 없다. 투표도 하고 논쟁도 하고 부족한 돈이라도 지니고 있어야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믿는 나는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세상 이야기를 제외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방법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신앙이 있든 없든, 세상은 하느님이 육화하신 자리다. 세상을 사랑할 도리밖에 없고 그래서 난 사회서적을 종종 읽곤 한다. 세상을 알고 세상 안에서 함께 숨 쉬며 사는 오늘이 나에게는 진정한 해방의 자리이자 사랑의 자리이다. 무턱대고 그냥 사랑하고 살자. 부족하지만 그냥 사랑하고 살자. 모든 분노와 원한과 절망과 자괴감은 사랑의 힘으로 이겨내자.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월간빛, 2017년 10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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