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마노아의 아내 작금의 사회를 특징짓는 부나 가난의 대물림 현상을 두고 ‘수저론’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춘향의 눈물과 홍길동의 설움을 일찌감치 잊어버린 사회는 ‘기회의 박탈’이라는 낡은 무기로 새로운 차별을 낳고 있습니다. 독점과 박탈로 얼룩진 인간의 길은 그 누구도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 길을 닦고 포장합니다. 그 길 위에서 세상과 미래를 향한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울며 서성이고 있습니다. 계급화된 조선사회의 경직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이들에게 천주교의 만민평등사상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일부 양반들은 기득권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진 모든 것, 목숨까지 잃으면서 만민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모두가 균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어야 함을 천명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이라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였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 신자들은 하느님의 길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그저 이상적인 유토피아가 아님을 그들의 삶을 통하여 증거하였습니다. 양반과 상민이 나란히 앉아, 한 분이신 하느님을 함께 아버지라 부르면서 형제자매로 사는 일이 가능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들에게 가능한 것이었다면 분명 우리에게도 가능할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길을 따라 걸을지에 대한 우리의 결단입니다. 이번 달 구약성경의 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에는 대세의 힘에 눌려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른 대안이 없다고 외치는, 저를 포함한 겁 많고 소심한 기성세대들을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잊고 있었거나 몰랐던 하느님의 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그 길을 선택하고 따를 용기를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경 속에는 인간의 길과 다른 하느님의 길, 인간의 생각과 다른 하느님의 생각을 보여 주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한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이야기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두 길을 대조시켜 보여 주는 듯합니다. 고대의 가부장적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삼손의 탄생과 관련된 이야기(판관기 13장)는 당시 세상의 논리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그것을 비트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삼손이 탄생할 무렵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필리스티아인들의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판관기의 이야기 도식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느님 찾아간 사람, 곧 하느님 계시의 담지자가 될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천사가 찾아간 여인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그의 남편 이름만 주어집니다. 남편의 주권만 존중되었던 당시 사회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이름이 없을 뿐 아니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기준으로는 쓸모없는 존재였던 사람입니다. 주님의 천사는 남편인 마노아가 아니라 그의 아내를 찾아갑니다.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고, 그에게 하느님의 계시를 전달합니다. 이 여인이 아이를 낳게 될 것이며, 그 아이는 모태에서부터 나지르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아기가 자라서 이스라엘을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에서 구원해낼 것입니다. 여인은 놀라 남편에게 달려가 하느님의 사람을 만났노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사의 전갈을 남편에게 전하되, 태어날 아기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합니다. 마노아는 아내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사람을 다시 한번 그들에게 보내어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는 당시의 통념대로 계시의 담지자 역할을 자신이 떠맡으려는 듯이 보입니다. 마노아의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주님의 천사를 마노아가 아니라 들에 있던 마노아의 아내에게 보냅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급히 남편을 불러 오고, 그 남편이 나서서 천사에게 말을 건넵니다. 마노아가 태어날 아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이며,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자 천사는 그것에 대해 응답하는 대신 자신이 이미 여인에게 말했던 바를 여인은 명심하고 지켜야 한다는 말만 합니다. 마노아는 기어이 주인공 역할을 떠맡으려는 듯이 천사에게 이름을 알려주기를 청하지만 천사는 거부합니다. 마노아가 새끼 염소 한 마리와 곡식 제물을 준비하여 주님께 바치자 제단에서 불길이 일어나 주님의 천사도 그 불길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다. 마노아는 그것을 보고서야 자신이 만난 분이 주님의 천사였음을 알고 극도의 두려움에 빠져, 죽게 될 것을 염려합니다. 이번에도 그 계시를 올바르게 해석한 이는 그가 아니라 그의 이름 없는 아내입니다. 여인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죽이려는 목적을 가지셨다면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남편을 안심시킵니다. 사회적인 기준으로 보면 계시의 담지자는 당연히 남편인 마노아가 될 것입니다. 여성에게는 법정에서 증언할 자격조차 부여하지 않았던 사회에서 불임으로 인하여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던 여인이 계시의 담지자가 된다는 것은 당시 사회의 통념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굳이 마노아의 아내를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삼손의 탄생 이야기에서 계시의 담지자와 해석자는 이름 없는 여성이 됩니다. 태어날 아기의 사명이 무엇인지도 오직 이 여인에게만 알려졌습니다.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살았던 시절에 인간이 걸었던 길은 지금 우리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회가 박탈되었던 여인을 천사가 굳이 찾아온 것은 인간의 길과 다른 하느님의 길이 있음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은 완전하고 하느님의 모든 길은 올바릅니다(신명 32,4 참조). 그분의 길에서만 모든 이가 함께 웃을 수 있습니다. 수저론이 거론되는 이 세상의 길을 닦아온 기성세대가 이제는 다른 길이 있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인간의 기준에 맞지 않아도, 자격 없는 것처럼 보여도, 든든한 배경이 없어도 누구나 살 권리가 있음을 우리는 다시 외쳐야 하고, 그것을 살아내야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천사라면, 오늘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당신 덕분에 세상의 수많은 마노아의 아내들이 참된 삶의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비정상적인 상황도 오래 지속되면 정상적인 것으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렇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생활성서, 2016년 2월호, 김영선(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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