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믿음의 힘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도발적인 말씀 이 말씀이 초대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이 말씀이 자주 인용된 데서 알 수 있습니다(마르 11,23; 마태 17,20; 마태 21,21; 루카 17,6). 바오로 사도도 이 말씀을 알고 있었지요(1코린 13,2). 이 말씀이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을 폭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할수록, 조금씩 표현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도 그런 경우이지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지라고 합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나무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지요. 이런 식의 변형은, ‘예수 전승’이 초대 교회에서 얼마나 역동적이고 유연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루카는 이처럼 자유롭게 전승되던 예수님의 말씀을 새로운 맥락에 자리 잡게 합니다. 조그마한 상황 하나를 바로 앞에 배치하지요. 곧 그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사도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이 청원을 받아들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답이, 나무를 옮겨 심는 이 믿음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의 청원과 예수님의 대답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믿음을 더해주셨을까요? 어느 모로 보나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도들의 청원이 합당하지 않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들의 청원은 언뜻 보면 훌륭해보이지요.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의 청원은 경건함을 불러일으킵니다. 말하자면 “우리 믿음이 너무 작습니다. 그러니 더 커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의미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이 청원은, 믿음의 일부분은 이미 자신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이미 언급했듯이, 참으로 경건해보이는 청원입니다. 흥미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하지요. 하지만 루카는 사도들의 청원이 실제로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아니 오히려 그 청원이 지닌 속내를 밝히 드러냅니다. 루카가 보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밑바탕에 두고 있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믿음이 여전히 너무 작다고, 그래서 믿음을 더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허상이고, 너희는 바로 그러한 허상 속에 산다. 너희의 믿음이 너무 작은 게 아니라, 사실 그런 믿음조차 아예 없는 것이다(루카 8,25 참조). 작은 믿음이라도 너희에게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족할 것이다. 곧 아무리 작더라도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이미 너희에게 있다면, 너희가 세상을 바꾸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돌무화과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는 표상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특히 뿌리가 크고 깊습니다. 그런 나무를 뽑아 겐네사렛 호수에다 심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지요. 생물학적 법칙이나 물리적 법칙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경험에도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겨냥하지요.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너희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세상과 세상의 법칙들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럴 수 없으니, 이는 결국 너희에게 아무런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경건한 듯 그렇게, 내가 너희의 믿음을 더해주라고 말하지 마라!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제 생각에, 이것이 루카 복음서의 텍스트가 말하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제 생각에, 이것이 루카 복음서의 텍스트가 말하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큼 예리하고 철저합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그런 믿음에는 더 적고 더 많고 하는 문제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둘 중에 오로지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이로써 믿음의 본질적인 단면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곧 믿음은 먼저 나 자신의 삶을 구축한 다음 그 위에 쌓아 올리는 무엇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사회에서 누구나 그렇게 하듯 나도 먼저 나의 삶을 설계하고 나서, 그다음에 멋진 장식품처럼 믿음을 거기에 덧붙이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일종의 보충제나 또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삶의 계획을 세련되게 꾸미는 치장에 지나지 않겠지요. 하지만 믿음은 그런 보충제나 장식품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을 온전히 새롭게 세우는 것이지요. 곧 믿음은 양자택일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믿든지 아니면 믿지 않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든지, 아니면 옛 세계에 그대로 붙박인 채 남아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새것을 향해 그저 고개만 까닥하고 만다면, 결코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믿음에 대해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고는 할 수 없지요. 예를 들면 이런 질문도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믿음은 본래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교리를 잘 아는 어느 한 그리스도인에게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믿는지 묻는다면, 아마 이런 대답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을요!” 올바른 대답이지요.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역시 올바른 대답입니다. 또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그리스도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올바른 대답이지요. 당혹스러운 것은 다만, 겨자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믿음으로 산을 옮기고 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옛 세상을 뒤엎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최우선적으로 겨냥하는 목표는 세상의 변화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좀 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루카 복음서에서 이 17장 6절의 말씀이 놓인 맥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곧 루카 복음서의 구성을 보면, 사도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더해주시라고 청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4) 끊임없는 화해 이 말씀이 무엇을 두고 이르는 말씀인지는 분명합니다. 이는 끊임없는 화해 위에 건설되는 하느님의 새 사회를 두고 이르는 말씀이지요. 이 사회의 본질이 바로 ‘날마다 거듭되는’ 화해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형제자매를 하루에 그저 한 번만 용서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곧 끊임없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무를 옮겨 심는 믿음에 대한 말씀이 놓인 직접적인 맥락이고,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늘 다시 새롭게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화해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것은 불가능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못 해!” “우린 애당초 그럴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대답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희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다른 이들을 늘 새롭게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그 어떤 앙심도 품지 않으며, 그들을 언제나 하느님의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화해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하다. 돌무화과나무를 겐네사렛 호수에다 옮겨 심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가능하다.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능하다. 경쟁도 계급도 없고, 세련된 억압 장치들도 없는 그리스도인 사회가 가능하다. 각자가 자기 길만을 가지 않는 함께하는 연대가 가능하다.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묻는 화해의 사회가 이루어진다. 그리되면 옛 사회는 뒤집어질 것이다. 자연의 법칙마냥 불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옛 사회의 법칙들도 와해되어 온전히 새것으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만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루카는 끊임없는 용서에 대한 말씀과 나무를 옮겨 심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분명히 합니다. 믿음이 추구하는 방향은 그 무엇보다 먼저 저 세상이 아니라고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요. 믿음이 추구하는 최우선적인 방향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것, 보이는 것, 바로 여기, 오늘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새 사회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한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화해의 세상을 목표로 합니다. 화해 안에서 하느님의 새 가족이 되는 것은 오로지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의 것을 향해 온전히 방향을 바꾸는 데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산더러 바다에, 나무더러 바다에 빠져라 해도 그리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옛 세상의 법칙들이 해체되는 하느님의 새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9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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