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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재의 수요일의 결심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7-10-08 조회수4,209 추천수0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재의 수요일의 결심(Vorsatze am Aschermittwoch)

 

 

좋은 결심?

 

‘좋은 결심을 품다’라는 말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삼십, 사십 또는 오십, 이렇게 10주년이 되는 생일을 앞두고 우리는 어떤 좋은 결심을 품습니다. 아니면 새해 아침에, 또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도 무엇인가 작심을 하지요.

 

계기가 있을 때마다 그런 좋은 결심들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내일부터 담배를 끊어야지!” “이제는 술을 적게 마셔야지!” “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티브이 시청을 절제해야지!” “아내에게 더 잘해야지!” “남편을 더 사랑스럽게 대해야지!” 또는 아주 철저하게 이런 결심을 할 수도 있겠지요. “내일부터 나는 모든 것에서 완전히 달라질 거야!”

 

한데 실제로 무엇인가 바뀌나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굳게, 변함없는 마음으로 품었던 결심들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집니다. 대개 작심삼일이지요. 처음에는 자신에게 ‘이것만은…’이라는 예외를 허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삶의 시작을 내일로 미루지요. 다음 주로 미룹니다. 하지만 다음 주가 되면 모든 것은 바람에 날려가고 아무것도 없지요. 늘 그랬던 것처럼, 옛 삶은 계속됩니다.

 

왜 늘 그 모양일까요? 그렇게 좋은 뜻으로 마음먹은 결심들은 어찌하여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까요? 왜 그 모든 것이 그처럼 믿을 만한 것이 못될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성경에는 ‘좋은 결심’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한 개념은 고대 철학에서 유래하지요. 이 개념을 깊이 숙고한 고대 철학에 따르면,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선택(propositium)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다음 그 선을 바라는 굳센 지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통찰이 중세 시대 이후로 고해성사 신학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곧 통회는 그 자체로 끝나서는 안 되고, 앞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센 결심과 연결되어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451항 참조). 이로써 엄숙함과 기쁨의 참회성사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삶을 바꾸겠다는 굳센 의지를 실현하는 자리가 됩니다.

 

 

개선이 아니라 회심을!

 

이미 언급했듯이 ‘좋은 결심’이란 개념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개념이 가리키는 바를 성경에서 아예 찾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지요. 그 내용에 대해서는 예언자들과 하느님 백성의 교사들이 아주 분명하게, 심지어는 아주 날카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회개하라!’는 그들의 외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그릇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점점 더 목적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데 있지요. 이와 달리 보통 대부분의 좋은 결심은, 전반적으로는 별로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개선이 필요한 몇몇 사안이 있다는 정도지요. 좀 깎고 다듬어야 할 면이 있거나, 고치고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틀에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개선의 결심은 이른바 사후 보수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훨씬 더 철저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선언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참다운 처지이지요. 이런 엄숙한 처지에 맞갖게, 재의 수요일의 전례는 요엘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3)

 

우리가 자신의 참다운 처지를 깨닫지 못하거나,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을 찢지 못한다면, 우리는 돌아설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결심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굳은 마음, 곧 “나의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만 영광을 드리겠다.”는 그런 마음을 먹기도 불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좋은 결심’도 대개는 물에 탄 듯 밍밍하고, 자신의 실제 현실을 가리는 방패막이입니다. 새 마음과 새 정신이 필요한데, 그저 외양을 치장하는 수준에서 끝납니다.

 

보통의 ‘좋은 결심’이 문제인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곧 그런 결심은 자신이 스스로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본인이 충분히 노력만 한다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런 식의 결심은 성경적인 믿음을 윤리적인 재무장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력구원이지요.

 

“오늘부터 나는 내 삶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 믿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요. 스스로의 힘으로 나 자신을 어디 바꿀 수가 있나요? 내가 돌아선다면, 내 삶이 새로워진다면, 그것은 언제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총이지요. 물론 돌아서는 것은 내가 돌아서는 것이고, 그렇게 회심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행동에 달렸지만, 모든 것은 늘 은총입니다.

 

‘애가’는 그리스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에서 예레미야 예언서 끝에 부록처럼 들어 있는데, 이런 탄원으로 마무리합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소서.”(애가 5,21)

 

그 어떤 신학도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아낼 수 없겠지요. 회심은 언제나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 돌아선다 해도, 이는 ‘그분의’ 업적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구원 역사와의 만남을 통해

 

‘애가’는 인간의 회심이 하느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통찰이 그저 경건한 생각과 말에서 나온 것만은 아닙니다. 애가에는 이미 남부 유다 왕국의 멸망과 기원전 586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에 대한 기억이 녹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충격의 한 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지요. 애가에 나오는 ‘우리’는 두들겨 맞고 흩어진 하느님 백성을 가리킵니다.

 

어쩌면 분명, 이스라엘이 국가라는 형태를 계속 고집한다면, 정말로 회개는 영영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586년의 파멸을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삶으로 돌아서기 위한 회심의 기도를 간절하게 바칩니다.

 

이로써 회심이 일어나는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해집니다. 곧 회심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해서, 이것이 마술적인 방식으로 저절로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눈이 열려 내가 처한 현실과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나 자신의 역사와 하느님 백성의 역사, 모든 민족의 역사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전 세계적인 불행과 불의의 역사 앞에서 마음이 움직일 때만, 진정한 회심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초래한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민족들의 불행에서 어떻게 온전히 새롭게 시작하시는지를 깨달아야만, 돌아설 수 있습니다.

 

회심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관련해 덧붙일 점이 또 있습니다. 곧 진정한 회심은 언제나 교회와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회심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전제합니다. 재의 수요일에 봉독하는 신약성경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이 점은 모든 회심의 기본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해 말하는 이들이야말로 내가 처한 참된 상황을 바라볼 눈을 열어주고, 하느님과 화해할 마음을 내게 불러일으킵니다.

 

회심은 말하자면 좋은 결심으로 가득 들어찬 서랍이 아닙니다. 회심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는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는 데서 일어나는 속 깊은 사건이고, 결국 이 역사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일입니다. 회심은,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새롭게 마련하시는 새것을 조금이라도 맛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보고 만지는 일도 맛보는 일도 없이 삶 전체의 방향을 어찌 온전히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모르던 기쁨을 맛보게 될 때, 비로소 회심이 가능합니다.

 

 

기쁨을 맛본 데서 오는 회심

 

회심은 아주 흔히, 근원적으로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납니다. 구약성경의 ‘애가’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루카 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를 치는 일꾼으로 전락한 다음에야, 말하자면 밑바닥에 떨어진 다음에야, 회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곤궁한 처지에서 방향을 바꾼 작은아들의 이 회심마저도,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그가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테지요. 아버지 집에서는 누구나 모두 배불리 먹는데…!

 

작은아들을 일어서게 한 것은, 그가 겪는 삶의 곤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 집에서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진수성찬을 차릴 것입니다.

 

큰아들 역시, 곧 동생만큼이나 회심이 꼭 필요했던 그 형 역시 함께 기쁨을 나눌 때만, 비로소 회심이 가능합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회심은 무디거나 어정쩡한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는 여러 요소들이 필요하지요. 이를테면 ‘좋은 결심’도 그 가운데 한 요소입니다. 작은아들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루카 15,18 참조).

 

그리스 철학에서 하는 말은 옳습니다. 곧 올바른 행위와 선의 실천은 먼저 내적인 선택을 통해 그것을 지향할 때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일어나야겠다!’는 작은아들의 내적인 선택이 그의 온 삶을 바꿉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이 새로운 상황, 기쁨이 넘치는 이 상황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이 말씀을 우리는 재의 수요일 독서에서 듣지요.

 

‘좋은 결심’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세상 구원의 역사와 깊이 연결될 때만, 마침내는 그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그럴 때만, 좋은 결심들도 더 이상 내 생각에서 오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에게 길을 보여주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외부에서 옵니다. 그래야만 나의 결심들도 더 이상 나 자신의 아성을 쌓는 데 쓰이지 않고,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이루시는 일에 협력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좋은 결심은 기쁨에서,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쁨에서 옵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좋은 결심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기쁨에서 솟아나는 결심만이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끌어 갑니다. 사라져 갈 흙과 같은 우리의 나약성과 우리 스스로 초래한 파국에서 하느님 몸소 새롭게 이루시는 그 창조 속으로!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3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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