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Ihr seid Gottes Tempel!)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공동체에 보낸 첫째 서간에는 아주 담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쓰지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코린토라는 항구 도시의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동체의 수는 많아야 일이백 명을 넘지 않았지요. 게다가 그들은 영웅이나 성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안고 있던 문제에 대해 우리는 꽤나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온갖 추문과 사건으로 공동체는 깊이 분열되어 있었지요. 그 어떤 공동체도 코린토 공동체보다 바오로에게 어려움을 준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오로는 그들을 향해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의 찬란함 이 얼마나 담대한 말씀일까요? 이 담대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성전’이 어떠했으며, 또 ‘성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이 연상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곧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성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대상이었지요. 최고의 건축가들이 모여 성전을 건설했습니다. 가장 좋은 재료들을 사용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전 구역이 차지했던 비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역시 그에 못지않았지요. 헤로데가 기원전 20년에 증축을 시작한 예루살렘 성전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벽면 곳곳에는 순금을 입혔습니다.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를 때면, 성전은 눈부실 만큼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찬란함에는 다 이유가 있었지요. 성전은 하느님의 거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 내부의 지성소에도 대사제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사제마저도 일 년에 단 한 번, 곧 ‘속죄의 날(욤 키프르, Yom Kippur)’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달리 말해, 성전은 오로지 하느님께 속한 곳이었지요. 하느님만의 특별한 소유였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거처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성전을 얼마나 거룩하게 여겼던지, 율법학자들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성전이 예루살렘을 거룩하게 하고,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거룩하게 한다.” 무슨 말인지 분명합니다. 곧 탈출기에서 성막을 두고 이르신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에 그대로 적용된 것입니다. 탈출기 35-40장에서 성막은 창조의 완성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 후에 돌로 지어진 성전도 그 찬란함과 고귀함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미 창조 이전에 염두에 두셨던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전은 창조의 완성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온 우주(Cosmos)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구현된 것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지요.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더 나아가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곧 성전이 있는 곳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고요.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형형색색의 거대한 휘장에는 무수한 별들로 이루어진 하늘 궁창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런 배경을 놓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야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 얼마나 담대하고 엄청난 말씀인가요? 믿는 이들의 모임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믿는 이들의 모임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보물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부활하신 분께서 거처하십니다. 물론 이 모임을 이루는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죄 많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세계를 두고 오래전 이미 바라신 바가 우리에게서 볼 수 있게 드러나야 합니다. 또 더 나아가, 공동체가 모인 곳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됩니다. 바로 거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로 이루어진 하느님 창조의 완성이 오늘 이미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늘 다시 당혹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로서의 우리 삶이 매번 이 말씀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끊임없이 새롭게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이 말씀 때문에 우리 마음이 늘 다시 흔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대 세계의 혁명 뒤흔들어 깨우는 이 말씀이야말로 바오로 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지요. 저는 여기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기원후 2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고대 말기 유럽에서는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하나의 혁명이 진행되었습니다. 곧 로마 황제의 통치 시기였던 당시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성전이 신들의 거처라는 생각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지요. 심지어는 고대의 모든 성전 제의 자체를 의문시한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마치 도살자처럼 피를 묻혀가며 동물을 잡아 제물을 마련하는 일을 두고 사제들을 조롱하기도 했지요. 이런 철학자들은 성전을 그저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축의 걸작 정도로 여겼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다른 곳과는 분리된 거룩한 구역으로 여기지 않았지요. 게다가 고대 말기에 수많은 지식인들은 더 이상 신이 여럿이라는 믿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절대적 거룩한 존재, 이름 붙일 수 없는 오롯한 영적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야말로 최종적인 의미에서 ‘신적인 존재’를 믿었지요. 누구나 이 신적인 존재에게 두 손 들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는 웃음거리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누구나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면, 그 자신이 신적인 영의 거처일 수 있다고요. 심지어 사제가 필요 없다고도 했습니다. 철학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사제라는 것이지요. 현명한 이들의 지식과 미신에서 벗어난 대 사상가들의 지성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요 참된 제단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를테면 불온한 종교 비판이었지요. 오늘날 이러한 비판을 배제하고서는 서구 문화 자체를 아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성전과 제물에 대한 그러한 비판은 2세기에 들어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이른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자신들보다 600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에게 기반을 둔 이 고대 말기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미신에서 깨어난 종교 비판을 발전시켰습니다. 곧 모든 제물과 제사의 시대는 지나갔고, 성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역설했지요. 성전과 제물에 대한 성경의 비판 지금까지 제가 말한 고대의 종교 비판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수많은 지성인들과 특히 종교사 전문가들에게도 일반적인 이론입니다. 곧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근대적 의식은 고대의 그러한 종교 비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이들과 이른바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이들마저도 놓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계몽의 발전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끼친 영향과 역할입니다. 사실 이스라엘과 초기 교회의 종교 비판은 신플라톤주의의 종교 비판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지요. 이미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거처하시며(레위 26,11; 즈카 2,14 참조), 돌로 지은 성전으로는 하느님을 모실 수 없다(1열왕 8,27 참조)는 생각이 확연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안의 사회 정의를 그 모든 제물보다 더 중하게 여기신다고요(호세 6,6; 시편 50; 잠언 21,3 참조). ‘찬미의 제물’이, 달리 말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데서 나오는 기도가 동물을 잡아 바치는 모든 제사보다 훨씬 낫다고요(시편 51,19; 로마 12,1 참조). 신플라톤주의보다 훨씬 앞서 이미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돌’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로 이루어진 성전을 중시하는 생각이 발전했습니다. 여러 쿰란 문서들의 작성자로 여겨지는 유다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의 예배를 비난하며 자신들을 종말의 거룩한 성전으로 이해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공동체 자체가 성전인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성전 예배와 의식을 실질적으로 끝장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최후 만찬에서, 그분은 당신 목숨을 바치는 일을 모든 성전 제물을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성금요일에 제물이 되십니다. 히브리서는 올바르게도 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로써 제물을 바치는 성전의 모든 제사는 완결되었다! 곧 지나간 것이 되었다! 돌로 지은 성전이 핵심은 아니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보는 이는, 종말의 도성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다고 말합니다(묵시 21,22 참조). 하느님 몸소 당신 백성 한가운데 거처하시고, ‘단 한 번 영원히’ 당신을 제물로 바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신들의 옛 형상과 모든 성전 예배를 대체하십니다(묵시 5,6; 21,22 참조). 이처럼 무엇보다 구약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에서, 그러니까 신플라톤주의보다 훨씬 앞서, 제물을 바치는 옛 제의를 끝장내는 계몽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는 광범위한 부분에 영향을 주게 되었지요.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더욱 깊고 분명한 이해에 도달한 것입니다. 또 나아가 더욱더 인간적인 사회상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런 맥락에서 이제 여러 중대한 물음이 전면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먼저,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은 제물을 필요로 하는 분이신가? 인간에게 자애를 베풀기에 앞서 늘 제물을 원하는 분이신가? 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끊임없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제물을 바쳐야 하는 존재인가? 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회는 늘 누군가를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는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점찍어 그를 죽음으로 내몬 다음에야 적어도 잠시 동안은 평온과 단결이 유지되는 조직인가? 세 분야에 걸친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르고도 유일한 대답은 바로 유다 그리스도교의 계몽의 역사에서 나옵니다. 아테네와 로마의 철학과 문화는 여기에 보조 역할을 했지요. 땅을 갈아엎은 것은 그들이었지만, 일찌감치 씨앗을 뿌린 것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공동체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다시 말해 백성 전체가 하느님의 거룩한 거처입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이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곧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성당 안에, 좀 더 좁혀서 말해 우리가 조배하고 기도하는 감실의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십니다. 그분은 또 우리가 세례와 견진성사에서 받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도 계십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하느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우리가 서로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는 그 모임 한가운데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우리의 모임 어디에나 그 한가운데 계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분께서 늘 함께하시기 때문이지요(마태 18,20 참조). 우리의 모임은 언제나, 부활하신 분이 이미 그 한가운데 거처하시는 부활의 모임입니다. 우리의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모임인 성찬례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제사를 완결한 단 하나의 제사를 거행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하느님의 진정한 성전이 되지요. 이 성전은 더 이상 죽은 돌로 이루어진 것도, 그렇다고 순전히 ‘영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살아 있는 이들에게서 온전히 현실이 된 성전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4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