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우주에서 아무 의미 없이?(Bedeutungslos im Kosmos?)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이언 매큐언(Ian McEwan)이 쓴 『토요일』이라는 단순한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신경외과 의사 헨리 퍼론이 겪는 단 하루의 토요일을 묘사한 소설이지요. 이 단 하루가 그에게는 격동의 토요일입니다. 그의 직업은 늘 반복적으로 사람의 뇌를 열고, 창백하고 허연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때문에 그는 단호한 물질주의자입니다. 소설은 첫 장에서부터 이 뇌 전문가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묘사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하지요. 그의 분석은 대략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신을 믿는 모든 이들은 위험할 정도로 지나친 자의식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관계성의 망상에 사로잡혀 산다. 그들은 세상을 오직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한다. 그들은 병을 앓고 있으며, 그 병은 인간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과대망상적인 연관 체계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신’ ‘창조’ ‘영혼 불멸’ ‘승천’ ‘영원한 생명’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연관 체계들은 정확히 말해 과대망상일 따름이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한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라고 여긴다. 하지만 끝없이 공허하고 차가운 우주에서 인간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먼지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자신들에게 위로를 주는 과대망상의 체계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 위에 형이상학의 탑을 쌓으려는 병적인 시도를 한다. 그 모든 체계와 모든 일신론의 주장은 결국 정신 이상의 징후일 따름이다. 이 모든 생각이 소설에서 그날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뇌 전문가가 하는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 토요일을 배경으로 소설이 펼쳐지고 극적인 전개가 이어집니다. 과대망상? 그런 생각을 가진 뇌신경학자가 우리 앞에 있다면, 우리는 그와 어떤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요? 어쩌면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이라고요. 그들은 건강한 생각을 가로막는 억압과 단편적인 시각에 갇힌 이들이라고요.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이야말로 많은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고 말해주어야 할까요?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창조된 세상의 아름다움도,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한에 대한 갈망도, 하느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인간 안의 깊은 구멍도 부정하는 사람들이고, 민족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정의에 대한 외침도 외면하는 사람들이라고요. 인간의 법정은 끝내 이룰 수 없는, 오직 하느님만이 똑바로 세우실 수 있는 그 정의에 대한 외침 말입니다. 어쩌면 그 자신이 하느님과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어서, 단지 그런 이유로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이들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요. 스스로 전능하고, 자기 자신이 법이 되고 싶어 합니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없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이면 무엇이나 제 식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이것이야말로 과대망상 속에 사는 게 아니고 무엇일까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말한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반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맞던 돌을 다시 되던지는 행위라고나 할까요. 그리되면 우리는 서로 끝도 없이 싸우게 될 뿐입니다. 누가 더 진짜로 세상을 왜곡하는 비현실적인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사는지 서로 계속 비난하겠지요. 예수님의 권한과 힘 이런 종류의 질문들에 자꾸만 휘말릴 때면, 제게 늘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인류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그러한 인물들을 ‘규범적인’ 인간이라 일컬었습니다. 그런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면, 이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분은 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그분이 받은 권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를 관통하며 변함없이 살아계시고 작용하시는 예수님의 그 감추어진 권한의 힘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힘은 국가의 권력도, 그 국가의 관료와 조직이 행사하는 권력도 아닙니다. 총과 탱크로 무장한 군대의 권력도 아닙니다. 돈의 권력은 더더욱 아니지요. 광장에서 전복을 외치는 군중의 권력도 아닙니다. 교묘하게 변화와 지지를 선동하는 강력한 정치 구호나 선전에서 나오는 권력도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지요. 그분의 힘은, “나는 진리이다.”(요한 14,6)라고 하신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이십니다. 그분만이 인간과 사회가 겪는 끔찍한 모든 고통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또한 바로 그 답이지요. 서로 함께 삶을 나누고 산상 설교에 따라 사는 이들의 공동체 말입니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고통에 대한 답은 그밖에 달리 없습니다. 이미 온갖 실험들이 실패로 끝났지요.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는 이기주의는 늘 이렇게 묻습니다. “무엇이 나에게 유익하고 좋은가?” 쾌락주의는 인간의 행복이 순간의 욕구 충족과 소비에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주의는 이렇게 말하지요.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다. 아무도 믿지 말라!”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는 어떤가요? 그들은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환원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에 인간을 강압적으로 몰아넣으려 합니다. 그러한 실험들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알아보려 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 모든 실험이 끔찍한 결과로 끝났습니다. 수백만의 사람이 처참하게 이름 없이 죽어갔지요. 평화와 자유 속에서 인류가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공동체에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답을 가져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그분의 권한이고 권력이고 힘입니다. 자신에게서 자유로운 분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힘은 무엇보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분이 오롯이 유일하게 바라신 단 하나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었지요. 그분은 오로지 하느님 백성을 불러모으고 새롭게 하기 위해 사십니다. 이 백성 안에서는 누구나 하나같이 귀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진정으로 한 백성을 이루지요.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게서 자유로우십니다. 때문에 그분은 온전히 자유롭게 하느님을 위해 사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몸소 행동하시고 그분 안에서 세상을 위해 현존하십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권능’에 속하지요. 그분의 힘은 조용하고 지극히 부드러우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힘입니다. 이 세상 권력자들의 힘과는 전혀 다르지요. 인간이 스스로 달성하거나 쟁취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힘입니다. 그런 힘은 다만 ‘주어질’ 수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마태오 복음서 마지막의 그 인상적인 장면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하늘로 드높여진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 규범적인 인물들을 다 열거해도 저는 그분과 같은 힘을 지닌 인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분과 같은 진리, 그분과 같은 선명성, 인간과 세상에 대해 그분과 같은 지식을 지닌 인물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그분과 같은 매력을 지닌 인물 역시 만나지 못했지요. 그분이 지니신 매력은 우리를 결코 그릇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선사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연관 체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안해낸 과대망상이 결코 아닙니다.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 자신이 참으로 의미 있는 존재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연관 체계가 아니지요. 우리의 신앙, 우리의 연관 체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아브라함 이래로 길을 걸었던 이들이 바로 그런 신앙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욕구가 투영된,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대상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따르는 것은 세상과 역사에 대한 체험에서 얻은 것으로, 이 체험은 수천수백 번의 시도와 시험과 고난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우주에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승천’ 등과 같은 거대한 연관 체계를 만들어냈다는 비난이 가당키나 할까요? 그러한 비난이야말로 성경과 그에 따른 전통이 정말로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냉철하게, 우리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전혀 왜곡하는 일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와 같습니다. 우주에서 작은 먼지에 불과하지요. 우리는 마지막에 결국 한줌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말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미 당신의 영광 속으로 들어 높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지금 이미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에페 2,6 참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승천” 대축일에 경축하는 내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5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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