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의 물신] 참사랑의 호세아 호세아와 엘리야는 바알을 극복하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세속화와 물신, 성적 유혹이 넘쳐 나는 현대에 호세아는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또한 복음적 자각 없이 물질적 안녕과 풍요에 자족하는 신앙에 경종을 울린다. 호세아의 개인적 체험과 메시지 독일의 저명한 구약학자 쳉어(E. Zenger)는 그동안 호세아 예언서 연구가 호세아의 개인적 이야기가 지닌 윤리적 측면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본질적인 것은 그 메시지”라고 지적했다. 불행했던 그의 가정사에 매몰되어, 그가 설파한 신학적 의미를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호세아의 메시지를 이해하려면 당시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와 신학의 특성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호세아를 이해하려면 당시 이스라엘의 독특한 바알 숭배를 깊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주님의 바알화 기원전 8세기 무렵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 백성 안에서 주님과 바알을 함께 섬기자는 이원주의에 맞서 유일 섬김(monolatry)을 강하게 주장했다. 정권에 탄압을 받았던 저항 예언자로서 개인적 삶은 불행했지만, 그를 계승하는 주님의 예언자들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도 북이스라엘의 정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엘리야 사후 100여 년이 지났을 때, 호세아 예언자가 맞닥뜨린 상황은 더 심각했다. 실제로 왕국 내부에는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외교적 문제가 꼬여 가고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나라는 안정과 풍요가 이어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저 막연히 경신례에 정기적으로 참여하고 번제를 드리면 자동으로 은총을 받는 것처럼 생각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감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게다가 이원주의적 종교 공존 정책은 더욱 기승을 부려 하느님 신앙과 바알 숭배는 얽히고설켰다. 보통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올바른 주님 신앙이고 어디까지가 풍요와 성을 약속하는 바알 숭배인지 선명하게 구분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 백성의 일부는 주님의 고유한 메시지를 깊이 자각하지 못한 채 주님을 바알처럼 생각하고 믿었다. 주님(야훼)을 마치 바알처럼 믿고 섬기는 것, 곧 ‘주님의 바알화’(Baalisation)는 이렇게 탄생했다. 호세아는 이 점을 정확히 꿰뚫은 선각자였다. 바알 이해의 변화 호세아 시대에 ‘이스라엘 안의 바알’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 바알’과 다르게 보아야 한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훨씬 신학화되고 일반화된 바알이다. 호세아서의 바알은 일종의 유적(類的)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바알은 특정 신의 이름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일탈한 것’을 통칭했다. 바알은 주님의 적대자를 대표하는 지위로 올라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바알화’는 올바른 하느님 신앙에서 벗어난 것, 하느님을 하느님이 아닌 것으로 믿고 섬기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참고로, 주님을 적대하는 대표자의 지위는 훗날 ‘사탄’과 ‘악마’가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바알을 어떤 특정한 장소와 시기의 바알로 연관시키는 것은 힘들 것 같다. 호세아서에 등장하는 ‘프오르의 바알’(9,10)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고유 명사라기보다 주님을 거스르는 ‘신학적 설명’의 일부로 쓰인다. 호세아에게 광야 시대의 사건(민수 25장)은 수백 년 전 조상의 일이다. 그러므로 호세아 시대의 ‘프오르의 바알에 대한 신학화된 기억’과 광야 시대의 ‘실제 프오르의 바알’이 크게 차이가 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역사적 자료로 프오르의 바알에 대한 믿을 만한 자료를 아직 지니고 있지 못하다. 창녀 짓과 불륜 ‘주님의 바알화’에 맞선 호세아의 노력을 조금 깊이 보자. 쳉어에 따르면, “호세아서는 체제와 제도에 급진적 비판을 가한다.” 호세아서는 ‘불륜을 저지르다.’ 또는 ‘창녀 짓을 하다.’ 등으로 옮기는 ‘자나’(hnz)라는 동사를 자주 사용한다. 이 말은 세속적 매음 행위와 종교적 매음 행위를 가리키는데, 우상을 섬기는 짓에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호세아의 개인사도 이 단어와 깊이 연관되지만, 호세아는 이 말로 이스라엘의 임금, 고관, 사제 등을 비판했다. 이들은 외형적인 풍요와 성공을 이끈 주역들로서, 스스로 자부심에 차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세아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 백성을 잘못 이끌고, 주님과 주님 아닌 것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버린 오도자(誤導者)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자기 하느님을 버리고 불륜을 저지르게”(호세 4,12) 만든 장본인들이다. 호세아의 개인사에 사용했던 표현들, 곧 창녀 짓을 했거나(1,2) 창녀의 자식들이라는(2,6)비판은 당대나 후대에 이런 권력자들의 일탈을 지적하는 표현으로도 쓰였다. 불륜에 빠졌다는 표현도 호세아서에 자주 등장하는데, 정치나 의례에서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다른 신을 섬기고 제물을 바치며 불륜을 저지른다(4,13-14). 그런 의례에 안일하게 참여하는 것만으로 주님의 은총을 얻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은 하느님을 떠난 일이요(9,1), 끔찍한 일이다(6,10). 결국 북이스라엘은 “더럽혀졌다”(5,3). 그래서 “그들은 그 행실 때문에 저희 하느님에게 돌아가지 못한다”(5,4). 호세아는 이런 배신이 북이스라엘을 떠나 남유다에 퍼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한다(4,15). 참풍요와 참사랑의 주님 호세아는 풍산의 신 바알에 맞서 풍요의 참된 근원은 하느님이심을 역설했다. 그는 바알을 숭배해도 진정한 풍요를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바알은 포만감을 주지도 못하고 자손을 불려 주지도 못한다(4,10). 사람들은 바알이 곡식과 포도와 올리브를 주었다고 믿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다(2,10). 우리는 바알 신화에서 바알의 딸들이 비와 이슬임을 보았다. 고대 근동 지역은 지금도 건조한 기후이기 때문에 이슬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14,6)주신 분은 바알이 아니라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6,3). 이처럼 주님 때문에 새싹이 돋아나고 뿌리가 뻗으며 열매를 맺는다(14,6-7). 호세아가 자주 말하는 싹, 줄기, 농사, 곡식, 각종 열매 등의 낱말은 모두 풍산신 바알의 속성이기도 하다. 호세아는 이런 모든 것의 참된 원천은 주님이시라고 주장한다. 바알은 성(性)의 신이었다. 이에 맞서 호세아는 주님이야말로 참사랑의 하느님이심을 가르쳤다. 그는 개인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아내로” 삼으신다고 선포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호세 2,21) 삼는 분이시다. 그분은 아무리 초라한 죄인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상대를 품어 주는 것이 사랑이심을 몸소 보여 주는 분이시다. 그래서 참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창녀 짓을 하고 불륜을 저질러 주님을 배신하였지만, 주님은 오히려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분노의 하느님이 아니다.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한없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11,9). 호세아는 바알로 대표되는 ‘하느님 아닌 것’과 ‘하느님의 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 이집트 탈출과 시나이의 계약이라고 말한다. 만일 하느님을 버리고 하느님을 바알처럼 믿으면, 이집트 탈출 사건은 모두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호세아는 ‘이집트로 돌아간다.’는 표현을 곧잘 사용한다(8,13; 9,3; 11,5). 결국 호세아의 메시지는 먼 옛날 이집트 탈출 때부터 하느님께서 이 백성에 지극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음을 깨달으라는 권고로 이어진다. “나는 이집트 땅에서부터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는 나 말고 다른 신을 알아서는 안 된다. 나밖에 다른 구원자는 없다”(13,4; 참고 12,10). 한 분만을 섬겨라 히브리인들은 작고 초라한 백성이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이집트 종살이 때부터 이 백성을 있는 그대로 지극히 사랑해 주셨고 함께해주셨다. 백성이 작은 풍요에 마음이 느슨해져 배신했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한결같이 사랑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지금이라도 회개하여 그분의 충실한 백성이 되는 것뿐이다. 하느님의 ‘나의 백성’(암미)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로 암미: 호세 1,9)가 중요하다. 그는 “너는 네 하느님께 돌아와 신의와 공정을 지키고 네 하느님께 늘 희망을 두어라.”(12,7)라고 권고한다. 그분의 백성이 되어 그분께만 희망을 두는 것은 오직 그분만을 섬기는 것, 곧 ‘유일 섬김’이다. 이 점에서 호세아와 엘리야의 메시지는 일치한다. 바알 숭배를 넘는 지름길은 풍요와 성과 권력을 미뤄 두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것이다. 호세아는 약간의 풍요에 취해 그저 막연하게 안정을 좇아 사는 일에 경종을 울린다. 작은 성공과 번영에 취해 자각 없는 신앙에 빠져들 때, 권력과 세속적 기준을 따르면서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이 들 때, ‘주님의 바알화’에 맞선 호세아를 기억할 일이다. *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고대 근동과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평신도 신학자이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이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 위원이다. 저서로 「구약 성경과 신들」과 「신명기 주해」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7년 11월호, 주원준 토마스 아퀴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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