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원준의 히브리어 산책] 아인
인류 마음 헤아리고 축복하는 주님의 눈 오늘은 히브리어의 16번째 알파벳 아인을 알아보자. 이제 남은 알파벳은 이제 6개뿐이니, 이 히브리어 산책은 7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 아인의 발전. 아인은 인간의 눈을 형상화한 동그란 폐곡선이다(왼쪽 파란색). 세로로 그리기도 한다(주황색). 아람어 계통에서는 눈을 절반만 그린 형상에 눈동자를 찍었는데(붉은색), 눈동자로 찍은 선이 점점 길어져서 히브리어의 아인이 되었다(자주색). 그리스어 글자 오미크론은 고대의 폐곡선을 계승했다(초록색). 한편 오메가의 소문자는 눈을 절반만 그리고 위가 터진 아람어 계통의 형태에서 유래했는데(붉은색 오른쪽) 오메가의 대문자는 반대로 아래가 터진 형상에서 왔다(회색). 눈(目) 고대 이집트 문자부터 아인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인간의 눈을 형상화한 아인은 동그란 폐곡선(閉曲線) 모양인데, 눈동자가 찍힌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눈을 세로로 그린 것도 있다. 아람어 계통에서 일부 글자는 눈동자가 폐곡선이 아니라 개곡선(開曲線)이다. 마치 눈을 절반만 그린 것 같은 형태인데, 눈의 윗부분이 아예 없다. 아마도 이렇게 해서 획수를 하나 줄이거나 더 빨리 쓰게 만든 것 같다. 이 형태에서는 눈동자가 강조되었다. 눈동자에 해당하는 짧은 선이 강조되며 더욱 길어져서, 결국 현대 히브리어의 아인이 되었다. 한편 그리스어 오미크론 문자에서는 폐곡선이 유지되고 눈동자가 사라져서 그저 동그란 원만 남았고, 현대 서유럽 문자의 오(O)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그리스어 오메가의 소문자는 눈동자를 표현한 채 위가 터진 형태에서, 대문자는 눈동자 없이 아래가 터진 형태에서 유래했다. - 아인. 아인은 눈을 뜻한다. ‘우물’ 또는 ‘샘물’이란 뜻도 있다. 눈에 관한 표현들 히브리어로 아인은 눈(目)인데, 흥미로운 표현이 많다. 시편에 보면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시편 17,8)라는 청원의 외침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동자’를 직역하면 ‘아인의 딸’이다. 눈 한가운데 작고 예쁘게 자리 잡은 것이니 ‘눈의 딸’이라 칭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눈동자를 가리키는 한자 ‘동’(瞳)이란 글자도 ‘눈’(目)과 ‘아이’(童)라는 글자가 합하여 만들어진 글자가 아닌가. 동서양의 직관이 이렇게 통한다. 히브리어로 ‘이마’는 ‘두 눈 사이’라고 표현한다.(탈출 13,9; 신명 6,8 등) 이 표현을 우리말로 ‘앞머리’로 옮기기도 한다.(신명 14,1) ‘물의 아인’은 ‘우물’이나 ‘샘물’을 의미했다. 불쌍한 하가르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곳도(창세 16,7) 아브라함의 종이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를 찾은 곳도(창세 24,13.43) 모두 ‘물의 아인’이 있던 곳이었다. 주님의 눈과 인간의 눈은 다르다. 인간의 아인(눈)에는 돈과 권력과 성적 쾌락 등이 들어오지만, 주님은 인간처럼 그런 것을 보시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사무 16,8) 구약성경의 의인은 주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었다.(창세 6,8 등) 또한 주님의 눈은 그 자체로 보호요 축복이었다. 광야에서 주님은 “눈과 눈을 마주하여” 백성을 지켜주셨다.(민수 14,14) - 이브리. ‘히브리 사람’을 이렇게 쓴다. 이 말의 어원을 무엇으로 보든, ‘이집트 탈출을 체험한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의미는 확실하다. 히브리인 아인으로 시작하는 낱말 중에 ‘이브리’가 있는데 ‘히브리인’이란 뜻이다. 이 말의 기원을 크게 두 가지로 풀이한다. 첫째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 부랑아, 도망친 사람’ 등을 뜻하는 아카드어 ‘하피루’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고대 근동의 전역에서 출토되는 문헌 중에 ‘하피루들이 도망쳐서 일을 시킬 사람이 없다’, ‘도망친 하피루의 무리가 도적떼가 되었다’는 등의 언급이 풍부하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노예들이기에 이들도 하피루로 불렸고, 점차 ‘이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브리’가 ‘지나가는 사람’ 또는 ‘넘어가는 사람’을 뜻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창세기의 조상들은 한 곳에서 땅을 점유하고 살았던 지주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끊임없이 옮겨 다닌 사람들, 곧 지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 아브람”(창세 14,13)은 ‘떠도는 사람 아브람’으로, “히브리 녀석”(창세 39,14)은 ‘지나가는 무리의 한 녀석’ 정도로 새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 탈출 사건으로 이 말은 전혀 새로운 뜻을 얻었다. ‘이브리’들은 갈대바다를 넘은 사람들, 곧 이집트 탈출 사건의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이 되어 결국 민족명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설명을 따르든, 히브리인들이란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요, 이집트 탈출 사건의 인연으로 정체성을 얻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들은 인간의 눈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겪은 사람들이요,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다. 오늘은 사회교리주간이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결국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교리 주간에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을 묵상한다. * 주원준(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 독일에서 구약학과 고대 근동 언어를 공부한 평신도 신학자다. 한국가톨릭학술상 연구상을 수상했다. 주교회의 복음화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사목평의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7년 12월 10일, 주원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