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단상] 부활 가끔 서울 강남으로 강의를 갈 때가 있다. 조용한 걸 견디지 못하는 나는 약간의 시끄러움 속에서 글도, 공부도 잘되는 편이다. 흔히 ‘백색소음’이라고 하던가. 혼자 방안에서 책을 읽을 때도 ‘백색소음’을 다양하게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을 켜 놓곤 한다. 타지에 강의를 갈 때는 어느 정도 일찍 가서 근처 카페에 앉아 강의할 내용을 검토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에 나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강남의 카페에 앉아 있는 젊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다들 엇비슷한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뾰족한 턱과 오똑한 코, 눈 밑의 애교살까지… 다들 어쩜 저리 예쁠까가 아니라 어쩜 저리 똑같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강남 쪽은 성형외과가 많다. 우리나라가 성형을 잘한다는 건, 성형한 사람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예뻐지고 싶은 욕구야 당연한 듯 하지만 예쁜 게 한 가지 모습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선뜻 이해가 가질 않는다. 성형은 마치 자신을 죽여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강남의 카페에 앉을 때면 간혹 죽음을 생각한다. 모두들 자신의 모습에 죽었구나, 하면서 쓴웃음을 짓는다. 지금의 모습을 경시하는 태도, 지금 나의 본디 모습을 부족하다 여기는 태도, 이건 묵시주의에서 도드라진다. 묵시주의하면 으레껏 우리는 요한묵시록을 떠올린다. 신천지 덕택(?)에 한국 교회 안에 요한묵시록에 대한 관심이 많다. 대개 그 관심은 미래에 펼쳐질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로 축약되며, 지금보다는 내일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끔 가르치고 배운다. 묵시주의는 지독한 이원론에 기반한다. 지금보다는 내일, 여기보다는 저 천상을 향해 하루하루 살게 만드는 게 묵시주의적 작품들의 특징이다. 희망 찬 미래를 꿈꾸게 하는 것이 뭐가 나쁜가 싶지만 실은 지금이 너무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묵시주의적 작품으로 쏟아진 것이다. 지금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내일에 대한 집착으로 환치된 게 묵시주의다. 예수의 부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이러한 묵시주의적 배경을 다루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신약성경에 예수의 부활을 표현한 동사들이 묵시주의적 배경 안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예수의 부활을 두고 대개 세 가지 동사가 사용되는데, ‘깨어나다( 1코린 15,3-5)’, ‘일으켜지다( 1테살 4,14)’, ‘들어높여지다( 필리 2,6-11)’가 그것이다. ‘깨어나다’와 ‘일으켜지다’는 유다 묵시문학에서 ‘마지막 때’를 가리킬 때 사용된 동사이기도 하다. 예컨대 ‘깨어나다’라는 동사는 다니엘 12,1-3에서 죽은 이들이 깨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어누리는 것으로 묘사될 때 사용되었다. ‘일으켜지다’, ‘들어높여지다’라는 동사는 ‘에녹의 승천’이라는 묵시문학작품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헤르메스주의, 곧 인간의 삶을 신성을 향한 여정으로 보았던, 그래서 신에게 다시 다가서야 한다는 인간의 운명을 담아내는 동사다. 예컨대 예수의 부활을 표현했던 동사는 ‘마지막 때’의 희망과 바람이 스며든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예수의 부활은 묵시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말하자면 지독한 이원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시주의적 표현들로 넘쳐나 그 묵시주의에 저항했던 요한묵시록이 보여주듯, 어린양으로 분하여 나타난 예수는 지상의 삶 한가운데에, 고통의 한가운데에 살았고 인간 삶의 처지를 온몸으로 감내했다.(묵시 5, 6장 참조) 예수의 부활은 천상의 신비 안에 계시된 것이 아니라 지상의 삶 한가운데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부활은 죽는 것만큼 힘든 지금의 삶과 직결된 문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금 삶과 전혀 다른 육신의 재생이 아니라, 지금 삶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조망될 것이 부활이다. 이건 지금에 대한 회피가 아니라 지금에 정직하고 솔직하게 응답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삶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부활에 대한 사유는 때로는 얼마나 훌륭히 살아내어야 하는가의 인간적 문제로 천착될 위험이 있다. 이를테면 부활을 훌륭한 삶의 결과나 열매로 이해하는 태도가 대부분의 신자들이 갖는 것이다. 이른바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만 부활을 이해하는 태도는 우리 죄의 유무, 나아가 우리가 어떤 몸으로, 어떤 영광 안에 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집중하게 한다. 사실 예수의 부활이 인간의 구원 문제와 연결되어 해석되는 건, 사도 바오로 서간 안에 수시로 나타난다.(1코린 15,3-5; 1테살 4,14; 로마 14,9; 1,3-4; 4,25; 필리 2,6-11) ‘우리를 죄와 잘못에서 구원하기 위해 예수는 죽고 부활했다.’ 정도로 요약되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들로 인해, 부활을 통해 우리는 죄를 벗어던지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신앙 고백이 교회에 자리잡고 있다. 이런 관점은 예수의 부활을 우리의 부활로 환치하는 부작용을 동반한다. 무슨 소리냐? 예수의 부활은 절대적으로 타자의 사건이었다. 나의 사건이 아니다. 그 사건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려면 조건은 하나다. 예수처럼 살아야 하고, 예수에 대한 믿음과 의탁이 필수 요건이다.(요한 20,31) 예수는 모든 이를 위해 죽고 부활했지만 예수는 ‘아무나’를 위해 죽고 부활한 게 아니다. ‘모든’으로 규정되는 보편적 구원은 지극히 ‘관계적 개념’이라 인간이 거부하면 하느님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역설적인 나약함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나지 않나. 부활로 가시화된 구원의 완성이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어야 하고, 알지 못하는 천상과 한계 지워진 지상의 온전한 합치여야 한다. 부활을 생각하면서, 제 삶의 완성과 그 끝자락에 대한 고민에만 머무는 것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쩌면 다시 육의 범주 안에 스스로 갇히는 꼴이 아닐까? 죽어가는 육의 행실과 그것의 옳고 그름을 놓고 예수 부활의 의미를 곱씹는 건, 사도 바오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죄의 유무를 따지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게 아닐까. “율법에 따른 행위에 의지하는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습니다.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한결같이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갈라 3,10) 나에겐 고마운 동기 신부가 있다. 같이 교구청에 근무하고 있고, 같이 운동도 다니고 휴가도 함께한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 형이라 부르는 동기 신부다. 형은 그랬다. 아는 게 없다고 스스로 낮출 줄 알고, 뭐든 내가 하자면 그러자고 맞장구 쳐준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다. 사회 문제와 인권 문제, 생태 문제와 경제 문제에 해박한 지식과 나름의 주관이 뚜렷한 형이다. 자신이 뚜렷하다고 타인을 재단하지 않는 형이 나는 좋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함께 목욕갔다가 씻지 않고 탕에 들어오는 이들을 두고 쓴소리를 하니, 그 형이 이렇게 말했다. “인류애를 느껴봐. 저 사람들의 땀과 함께 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생각할 거리는 많았다. 성격은 다르지만 나에겐 고마운 동기 신부가 또 있다. 그 신부와는 만났다 하면 싸운다. 그 신부와의 입씨름은 즐겁고 고맙다.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한 그 신부는 지금 뮌헨에서 교포사목 중이다. 얼마전 만나서도 신학과 신앙에 대해 나름의 생각들을 늘어놓고 한바탕 싸웠다. 그 신부가 좋은 건, 제 생각을 가지고 싸울 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이 전부이듯, 제 목소리가 자신에게 해로울 수 있음에도 제 신념을 가지고 논쟁 할 줄 아는 그 신부를 만날 때면 나 역시 ‘내 것’을 지니고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가끔씩 싸우지 않는, 그래서 늘 인자한 미소를 짓는 지식인들을 만났을 때 놀랍게도 많은 경우 그들이 게으른 사람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스러워질 때가 있다. 과거 자신이 몇 자 배운 것으로 평생을 우려먹으며 제 삶에 대해서, 제 지식에 대해서 어떠한 투쟁도, 손질도 하지 않은 채 제 삶을 소비하는 사람을 나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싸우지 않는 지식인은 자신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자신의 껍데기에 관심이 많고, 그 껍데기를 유지하고 더 나은 껍데기를 덮어쓰는 데 열중하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세련된 처세로 다가선다. 이른바 ‘간판주의’로 학위나 직분으로 자신을 말하는 이는 보기에 민망하고 애처롭다. 이런 이들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에 충실하나 지금이 전부가 아닌 듯 돌아볼 줄 아는 여유를 지닌 동기 신부, 지금의 자리에 전부를 쏟아붓듯 전투적으로 살아가나 ‘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나 바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긴듯 자유로이 사는 또 다른 동기 신부, 그들은 나에겐 선물이자 부러움이다. 그들은 자신을 살되 자신에게 묶여있지 않는, 진정한 해방을 사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의 부활 선포가 ‘빈무덤’의 형상과 함께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나는 마르코 복음의 빈무덤을 자주 묵상한다. 마르코 복음의 빈무덤은 ‘십자가에 못박힌 이’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알리지만 사람들은 넋을 잃고 당황스러워한다. 예수는 부활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기존 생각과 신념에 사로 잡혀있다.(마르 16,1-8. 마르 16,8 이하는 후대에 첨가된 부분이다) 비어있다는 건, 꽉 차 답답하지 않는, 채워져야 할 무엇을 규정하지 않는 자유로움의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넋을 잃은 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마르코의 빈무덤이 아닐까? 마르코 복음은 줄곧 제자들의 완고함을 질타한다. 규정하고 단정하고 갈망하는 것에 저당잡힌 제자들의 마음을 예수는 답답해했다. 빈무덤은 어쩌면 그런 제자들의 완고함을 걷어낼 수 있는 비움의 자리일 것이다. 우리가 부활을 인식하는 데 필요한 것은 지금 삶에 대한 완전한 개방이다. 사는 것에 대한 충실이라고 해도 좋고, 사랑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굳이 제 삶이 어떤 기준에 딱 맞아 떨어져야만 세상이 괜찮다고 하는, 삶의 모습에 안착해야만 만족해하는 우리의 강박증에서 해방되는 게 부활을 이해하고 사는 것이다. 비움의 여유를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가끔씩 강의를 마쳐 갈 무렵에 신자분들께 드리는 말이 있다. “제 멋대로 살아보시라.” 우리는 한 번이라도 제 멋을 가지고 살아본 적이 있는가? 대개 어디에 얽매인 노예생활을 제 삶이라 착각하며 사는 게 아닌가? 지금의 삶이 부활일 수 있는 건, 제 멋이 뭔지 늘 되묻는 작업에서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떻게 사는 게 가장 멋있을까? 등등의 질문에 정직하고 솔직한 답변이 가능할 때 우리는 부활한다. [월간빛, 2017년 12월호,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성서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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