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Wenn der Menschensohn kommt) 대림절의 전례는 결코 부드럽거나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엄중하고 분명하지요. ‘성탄절을 앞둔’ 달콤한 분위기로 우리를 현혹하려 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대림 제1주일의 복음은 우주적 재앙에 대해 말합니다. 태양은 어두워지고 달은 빛을 내지 않으며 바다는 요동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마구 흔들릴 것이라고도 하지요. 세상이 종말에 다다른 것입니다. 세상 종말? 세상 종말을 이야기하는 성경의 본문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 대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끔찍한 장면들을 실제로 일어날 재앙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인류에게 닥칠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 핵무기 재앙 등과 연결시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종말의 이 끔찍한 장면과 위협적인 묘사들이 위기 상황 때마다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세계관에 속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때문에 순전히 위기 속에서 태어나는 그러한 일시적인 세계관에 우리가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 본문이 말하는 이 재앙의 장면들을 그저 인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내면적인 사건들로 축소합니다. 어쨌든 이 모든 말은 핵심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는 생각들입니다. 성경의 이 끔찍한 장면들을 단순히 우리 시대의 가공할 몇몇 재앙의 징조들로 뒤바꾸거나 아무 해로움이 없다는 듯 미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아주 오래된 것들이고, 성경의 여러 대목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은 그러한 장면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장면들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근본적 재앙 묵시적인 이 재앙의 장면들은 단순히 ‘그 어떤’ 재앙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재앙, 곧 불신앙에 대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은 처음 장에서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불신앙은 결코 그저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비가시적인 일에 그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물론 불신앙은 머리와 마음에서 발생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지요. 밖으로 밀고 나갑니다. 구체화됩니다. 세상 한 구석을 마비시키고, 불행을 퍼뜨립니다. 믿지 않는 데서 오는 불신은 본래는 낙원일 수 있었던 세상을 파괴합니다. 인간에게는 가공할 만한 교만함이 가능합니다. 자만심으로 눈이 멀고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교만과 자만이 세상에 재앙을 만들어냅니다. 미래에 인간이 기술력과 정보력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될수록 그러한 재앙이 더욱 첨예화하리라고 우리는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불신앙이야말로 성경의 묵시적 재앙의 장면들이 말하고자 하는 첫 번째 의미입니다. 불신앙은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인 재앙입니다. 그것은 인간 마음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땅 위에 불행이 자라나게 합니다. 그리하여 작은 불신앙이 수많은 이들의 불신앙이 될 때, 이는 광범위하고도 전 세계적인 불행이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심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대림 제1주일의 복음이 본래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에 대한 서곡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에 싸여 오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마구 뒤흔들리는 것은 불신앙 때문만은 아닙니다. 결국 그러한 묵시적 사건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것 그 자체 때문에 일어납니다. 정말로 세상이 뒤흔들리는 이유는,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와 불신앙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인 진리이십니다. 곧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그분이 나타나시면, 세상과 사회의 진정한 상태가 밝혀집니다. 교만과 오기로 가득 찬 옛 세상은 그분의 오심으로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빛나는 진리 앞에서 옛 세상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 세상은 무너지고, 새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과연 언제 일어날까요? 하느님의 이 새 세상은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아니 우리는 그렇다고 말해야 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이미 그 새 세상이 보입니다. 주변 세계의 모습과 환경은 옛날 그대로지만, 그 한가운데에 이미 새 세상이 자라고 있습니다. 늘 다시 복음의 진리가 얼굴을 드러냅니다. 늘 다시 우리 한가운데 누군가에게서 신앙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늘 다시 누군가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분을 따르기로 응답합니다. 옛 세상으로 침입하는 하느님의 이 새 세상이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밀고 들어오면 무엇인가 일어납니다. 때문에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당연히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이자 우주적 드라마로 묘사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세계 안으로 맞아들이게 되면, 우리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그 내부를 넘어 밖으로도 널리 모든 것이 요동칩니다. 물론 우리는 대개 지금의 상태가 뒤집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옛것이 뒤집어지고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들은 너무도 강력해서, 그것들이 무너지는 것은 사회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정말로 하늘에서 ‘별들’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깊은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오십니다. 이미 오늘, 이미 우리 삶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한밤중에 도둑처럼 갑자기 그분은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것이 언제일지 우리는 미리 알지 못합니다. 각자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뒤흔드는 사건으로, 불의의 사고나 질병으로, 뜻밖의 죽음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 보통 하느님은 당신의 대리자라고 할 수 있는 인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신학적으로 말해 세상 종말은 불현듯,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시작됩니다. 이제는 그 어떤 무엇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가장 고유한 일,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다스림이 결정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 순간 어떤 이는 갑자기 숨이 막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울 수도 있습니다. 또는 깊은 두려움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에서 천사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삶의 한가운데서 갑자기, 이제는 통치권을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출구라는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말하자면 세상 종말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곧 옛 세상이 끝나고 새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에 있는 것입니다. 새 세상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종말은 기본적으로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낡고 오래된 옛것과 결별하고 하느님의 새 세상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느님의 새 세상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니 해마다 회개의 문이 새롭게 열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립니다. 우리는 그저 그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됩니다. 대림절의 삼중적 의미 대림이라는 말은 다가옴, 도착이라는 뜻의 라틴어 adventus(아드벤투스)에서 왔습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경축합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우리는 이 오심을 삼중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대림은 시간의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실 분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 대림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왔습니다. 예수님은 한밤중의 도둑처럼 이미 우리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세상은 그분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그고 막았지만, 그분은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멈추지 않고 계속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가 듣는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받는 성사들을 통해, 교회에 늘 선물로 주어지는 위대한 성인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마지막으로 대림절의 날들은 구유에 누운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이야말로 그분의 모든 오심과 도래의 시작이었습니다. 모든 분께 은총의 대림시기와 복된 성탄 축일을 보내시라고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오시기를 빕니다. “마라나타 -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 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12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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