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사랑을 알려 준 성 바오로 사도 바오로 사도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여러 인물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신약 성경 21권의 서간 가운데 13권이 바오로 서간이다. 이 바오로 서간은 라틴어로 ‘코르푸스 파울리눔’(Corpus Paulinum)으로 불리며, 그 신학적 깊이가 참으로 심오하기만 하다. 바오로의 서간은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빨리 집필되었고, 초대 교회사 연구에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만일 바오로가 자신이 쓴 그 편지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신자로서의 삶을 비추어 보는 경전이 된 사실을 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자부심 높은 디아스포라 유다인 청년 바오로는 자신을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고 벤야민 지파에 속한 바리사이로서, 율법에 따른 의로움으로 말한다면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필리 3,5). 자부심이 엿보인다. 보통 자부심이 높은 사람은 조직과 사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유다교에 대한 그의 높은 자부심이 전통을 충실히 지키려는 강한 의지로 나타났을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가득 차 그를 유심히 보며 말하였다.”(13,9-10)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그가 두 문화에 속한 사람임을 알게 한다. 한마디로 디아스포라 출신 유다인임을 말해 준다. 바오로는 타르수스 출신이다. 그곳은 헬레니즘 문화가 꽃핀 곳이었고 당시 교통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인종과 문화가 혼합되어 있었다(사도 21,39). 그의 이러한 디아스포라 유다인이라는 배경은 뒤에 ‘이방인의 사도’로 선교하는 데 문화적 이질감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바오로는 유다인인 동시에 로마 시민이었다(사도 22,25.28). 당시 로마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로마 황제나 장군들에게 봉사한 대가로 얻는 방법인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 전쟁에서 자신을 도와준 유다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기록이 있다. 그다음으로 시민권을 사는 경우인데, 바오로를 체포한 천인대장이 시민권을 매입한 경우가 이에 속한다(사도 22,28). 마지막으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출생을 통해 시민권을 얻는 방법이다. 바오로는 이 경우에 속한다. 뒤에 선교 여행을 할 때 그의 로마 시민권은 일종의 안전통행증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 유명했던 랍비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했다고 전해지는 바오로는 여러 언어로 말할 수 있었던, 지성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바오로가 아그리파스 임금 앞에서 자신을 변호할 때 총독 페스투스는 “바오로, 당신 미쳤구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치고 말았군.”(사도 26,24) 하고 외칠 정도였다. 그리고 바오로 자신도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둘째 서간에서 “내가 비록 말은 서툴러도 지식은 그렇지 않습니다.”(11,6)라고 했다. 뒷날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는 바오로의 지식을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3,15)라며, 바오로의 편지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고 한다. 출중한 지성의 소유자요 교회 박해자 바오로는 설득의 귀재였는데, 아그리파스 임금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서 죄수가 되었는지를 설명했을 때 아그리파스는 “당신은 조금 있으면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으로 행세하게 만들겠군.”이라며 감탄할 정도였다. 바오로는 자신이 젊었을 때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 동년배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고 했다(갈라 1,14). 회심한 뒤 고백했듯이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조상의 전통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적극적으로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열정은 불이 타는 것처럼 마음속 그 무엇에 몰입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열정이 균형을 잡지 못하면 그 불은 자못 자신을 태워 버릴 수 있다. 유다교에 대한 그의 지나친 열성은 이미 균형을 잃었기에 자신의 신념과 달랐던 그의 동족들을 배척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하고 복음을 전하다 다마스쿠스 길에서 바오로의 인생이 통째로 바뀐다. 그를 태울 불을 만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토록 믿고 있던 신념이 바로 그 길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회심 사건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9,1-8; 22,6-16; 26,12-18). 그 길에서 열성을 다해 부인해 온 그분이 직접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다. 바오로가 받았을 충격이 가히 짐작이 간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사흘이나 시력도 잃었다. 그는 예수님을 체험한 뒤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사도 9,19-20). 바오로는 자신이 믿는 것을 단호하게 실천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을 깊이 숙고하고 자신을 깊이 성찰할 능력도 있다. 슬프게도 유다인과 그리스도인들 양쪽 모두 그리스도인이 된 바오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사도 9,20-23.26). 사람들은 바오로를 그렇게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복음을 전한다고 했다(갈라 1,23). 바오로에 대한 반감으로 유다인들 중에는 바오로를 죽이기 전에는 먹고 마시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들까지 있었다(사도 23,12). 유다인들이 펠릭스 총독에게 그를 고발한 내용을 보면 그 반감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유다인들은 “이 사람이 흑사병 같은 자로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 사이에 소요를 부추기는 자며 나자렛 분파의 괴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사도 24,5)라고 했다. 그렇지만 바오로는 회심한 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이 유다교와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같은 연속선상에 있다고 보았기에 굳건히 앞으로 나아갔다(사도 24,14). 예수님을 전하고자 겪은 수많은 역경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1세기에 바오로의 세 차례 선교 여정을 보면 육체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경외감이 들 정도다. 그리고 아테네 아레오파고 광장에서 그리스인들이 모시는 ‘알지 못하는 신’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소개하는 바오로의 연설은 그의 뛰어난 지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바오로는 그 누구보다도 선교 중 수많은 역경을 몸소 겪은 사람이다. 감옥살이, 파선, 숱한 매질, 강도, 동족과 이민족 · 거짓 형제들에게서 받은 마음고생에다 굶주림과 목마름, 추위와 헐벗음 등을 수없이 겪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교회에 대한 염려가 가장 컸다고 고백한다(2코린 11,22-28). 바오로는 가정 교회를 통해서도 선교하였다. 젊은 에우티코스가 그의 설교를 듣다 깊은 잠에 빠져 삼 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바오로가 그를 끌어안고 “걱정하지들 마십시오. 살았습니다.” 하고 말한 뒤 다시 살아난 에피소드는 가정 교회를 통한 그의 선교가 사람들에게서 큰 관심을 받았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사도 20,9-10). 그가 교회를 신설하고 확장하는 데에는 남성뿐만 아니라 부부 선교사들과, 프리스카, 리디아, 포이베 등 많은 여성이 동역하여 크게 기여했다. 그는 편지에서 그들의 노고에 대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한다(로마 16,1-3 등). 이토록 새로 세운 교회들이 잘 정착될 수 있게 하려는 그의 노력은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쓸 정도였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쓴 이유는 당시 코린토 교회가 직면해 있었던 신자들 간의 여러 불협화음 때문이었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현재 본당 공동체에서도 볼 수 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삶 안에서 이기심이나 남을 무시하지 말고,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유익을 위한 행동을 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마침내 사랑의 찬가를 부르다 우리는 자주 사람의 성격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오로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주장을 쉽게 꺾지 않는다. 회심 이후 함께 잘 지내던 온순한 바르나바마저 선교에 대한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헤어질 정도였다(사도 15,37-39). 당시 지도자의 자리에 있던 베드로를 형제들 앞에서 비겁한 행동을 했다고 핀잔을 준 ‘안티오키아 식탁 사건’은 바오로의 올곧은 면을 잘 보여 준다. 바오로는 ‘케파(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는데, 그가 단죄 받을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갈라 2,11). 형제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기에는 바오로는 너무 정의로웠다. 그렇게 정의로웠던 바오로는 긴 여정을 통해 예수님을 닮은 사랑의 사도로 변해 갔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사랑의 찬가를 불렀다(1코린 13장). 아마 한 생애를 바오로만큼 깊이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는 ‘사랑의 찬가’에서 모든 신비와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사랑이 없다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지성과 자부심이 대단했던 바오로였기에 ‘사랑의 본질’에 대한 그의 깨달음은 더 설득력이 있다. ‘사랑’은 인류와 교회에 생명을 불어 넣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덕목이다. 다가오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도 바오로가 알려 준 ‘사랑의 길’은 여전히 우리 모두가 살아야 할 자리이다. * 한 해 동안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을 집필해 주신 허귀희 수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 허귀희 클라라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수녀. 예수회 영성 센터에서 ‘성경과 영성’을 가르치며, 성경의 학문적이고 영성적 의미를 통합하고자 연구하고 있다. 미국 엘름스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가톨릭대학교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향잡지, 2017년 12월호, 허귀희 클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