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46) 위선을 조심하며 두려워 말고 복음을 증언하라(루카 12,1-12)
최후의 심판 날에 떳떳할 수 있는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을 꾸짖으신 이야기에 이어 루카는 군중이 몰려드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군중 앞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소개합니다. 이를 세 부분으로 나눠 살펴봅니다. 위선을 조심하라(12,1-3) 수많은 군중이 몰려들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첫 말씀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12,1)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난 호에서 살펴본 내용, 즉 어떤 바리사이의 초대를 받아 가신 자리에서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과 연결됩니다. 바리사이들은 잔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은 사악과 탐욕으로 가득하고 십일조를 중시하지만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의 실천은 나몰라라 하며 사람들 앞에 나서고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드러나지 않은 무덤처럼 자신들의 행위를 은폐합니다.(11,39-44 참조) 이런 것이 위선이지요. 복음서에서 누룩은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로 다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룩을 하느님 나라(하늘나라)에 비유하기도 하십니다.(마태 13,33; 루카 13,21) 하지만 여기에서는 누룩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속에 든 것은 없이 겉만 부풀리게 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누룩은 위선을 나타내는 데 적합한 표상일 수 있습니다. 참고로 같은 내용을 소개하는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는데, 누룩을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의 가르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마태 16,11-12 참조) 겉 다르고 속 다른 위선을 조심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 너희가 어두운 데에서 한 말을 사람들이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12,3) 아무리 남몰래 행동한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속삭인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두에게 알려지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위선적인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12,4-7) 누군가가 자기 목숨을 앗으려 하고 또 그럴 힘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육신을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그것도 제자들을 “나의 벗”이라고 부르면서 말입니다(12,4) 그러면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라”(12,5)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을 죽이는 일은 힘있는 사람이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죽은 다음에 그 사람을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진 분은 단 한 분, 하느님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육신의 생명을 죽이는 누군가가 아니라 이승의 삶이 다한 후에 우리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제자들에게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하느님이시라고 말씀하신 후에는 또 정반대로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12,7) 왜 하느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 …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12,6-7) 이 구절에서 두 ‘닢’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앗사리온(ασσαριων)’인데, 동전 한 앗사리온은 로마 화폐 단위인 한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하는 가치라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지요. 따라서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린다’는 것은 가난한 이들의 음식으로 팔리는 참새의 가치가 매우 하찮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보잘것없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잊지 않으십니다. 그 참새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귀한 존재이겠습니까. 우리의 머리카락 개수까지도 다 세어두실 정도로 우리는 하느님께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니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를 증언하라(12,8-12) 그렇지만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2,8-9)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거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천사들 앞에서 우리를 안다고 또는 모른다고 하시는 것은 바로 이 삶을 다하고 난 후 심판 때의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로, 곧 예수님을 증언하거나 부인하는 그 일로 심판 때에 우리가 구원을 받거나 단죄를 받거나 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서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12,10)이라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으로 전합니다. 이 말씀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거슬러서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를 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바로 예수님의 영인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학자들은 이와 관련하여, 부활 이전 예수님의 지상 생활 동안에 예수님을 거슬러서 말하고 행동한 잘못은 모두 용서받을 수 있지만, 부활 이후 곧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후 성령의 인도로 부활하신 예수님에 관해서 선포할 때에 이를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어서 용서받을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성령을 모독하지 않도록 주의가 요청됩니다. 어느 것이 성령의 이끄심인지를 헤아리는 지혜와 분별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할 때에 우리를 반대하거나 박해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12,11-12) 이 말씀을 우리가 정말로 진실하게 주님을 증언한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 주시리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떨까요?
생각해 봅시다 위선의 덫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합시다. 그렇다고 하느님을 겁내지는 맙시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두실 정도로 끔찍이 우리를 아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다만 용기 있게 복음을 선포하고 진리를 증언합시다. 바른길을 걸읍시다. 나머지 것은 성령께 맡겨 드립시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1월 8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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