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나병 환자의 간청(Das Flehen des Aussätzigen) 나병이 예전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나병은 흉측할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파괴하는 질병이었지요. 물론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경에 나오는 나병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한센병과는 다른 것입니다. 한센병으로 불리는 나병은 세균성 질환의 일종으로 혈관이 막히고 신경이 파괴되며 신체의 특정 부위가 썩어 들어가는 병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나병은 일종의 피부 질환으로, 피부가 하얗게 변하거나 마른버짐이 생기는 등의 증상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성경에서의 ‘나병’이 그런 증상들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당시 그런 피부 질환에 따른 가장 결정적인 조치는 사회적 격리였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들은 마을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누군가 정상인 사람이 그들에게 다가가기라도 하면, 그들은 경고의 표시로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레위 13,45) 하고 외쳐야 했지요. 그들은 실제로 ‘소외된’ 이들이었고, 사회적으로 죽은 이들이었습니다. 사회적 격리 그러한 사회적 격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좀 더 생각해보면, 나병 환자와 건강한 이들 사이에는 그 어떤 접촉도 허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먼저 크게 다가옵니다. 나병 환자들 자체가 ‘만져서는 안 되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전염에 대한 공포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는 가족이라고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나병 환자에게는 그 어느 누구도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멀리서 눈짓 손짓만을 할 수 있었지요. 이로써 나병 환자는 ‘잘려나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삶에서 떨어져나간 채, 자신을 실패한 사람, 낙오자로 여겨야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나병 환자들이 어떤 심정으로 살았을지 오늘날 우리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려나간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흔히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곧 악성 질병에 짓눌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의사에게 불행하게도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말을 방금 들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공포와 충격에 휩싸이며 근본적인 물음들이 밀려오겠지요. “어떻게 이런 일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다니…, 하필이면 왜 나란 말인가?” 건강하고 멀쩡한 이들과는 이제 자신이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을 받겠지요. 갑자기 혼자가 된 것입니다. 건강한 이들 역시 자주 혼란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망설입니다. 자신들도 당황스럽고, 자주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어쩌면 환자에게 용기를 주려고 이런 말들을 하겠지요.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다시 회복하고 일어설 거야. 요즘 암 치료법이 엄청나게 발전했잖아!”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무엇인가가 서로를 갈라놓고,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무엇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예전에 아프리카의 한센인 마을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들었던 낯선 느낌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한 수도회가 그 마을을 모범적으로 돌보고 있었지요. 환자들은 시설이 좋은 숙소에서 지내면서 효능이 좋은 약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질병이 멈춘 상태였지요. 그들은 마침 자신들을 방문한 저를 아주 기쁘게 맞이해주었습니다.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지요. 하지만 저는 이상하게도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에 무엇인가 남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지요. 나중에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나병 환자는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하여 더 큰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를 간과해서는 안 되는데, 바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내치고 벌하셨다고 느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질병이 부모의 죄든 자신의 죄든 무거운 죄 때문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가족이나 자신의 잘못이 겉으로 드러나 그것이 누구나 알 수 있도록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것이라고 믿었지요. 그들은 하느님께서 내치신 이들이었습니다. 손을 대시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복음서에 나오는 나병 환자들의 치유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곧 그들은 다시 건강하게 되리라는 희망조차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었지요.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격리된 고립에서 벗어날 희망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지요. 그들은 하느님 앞에서마저 불행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하느님마저도 자신들을 버렸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들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십니다. 나병 환자를 대해야 하는 모든 법칙을 즉시 무너뜨리고 그들에게 다가가십니다. 마르코는 이미 자신의 복음서 1장에서 이 이야기를 전합니다. 어떤 나병 환자 하나가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하며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 40) 마음이 동요된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 1, 41) 그러자 곧바로 그에게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해집니다. 예수님은 적당히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고립 상태에 놓인 나병 환자를 구해주십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대십니다. 그를 손으로 만지십니다. 소외의 벽을 무너뜨리십니다.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다.”는 말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장식이나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이는 아주 간단한 행동이지만, 위생이나 미풍양속, 법규, 심지어는 토라에 반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일까요? 이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선포하시는 그분의 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과 함께 이스라엘 안에서, 또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에서 피조물이 새롭게 됩니다. 본래 의도했던 모습, 원래 그래야만 하는 모습으로 바뀝니다. 땅은 온갖 부패에서 해방되고, 온전하고 아름답고 싱싱한 모습으로, 치유를 받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분은 사로잡힌 이들을 풀어주시고,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셔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이들에게 손을 대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치유되고 해방된 새 세상에서는 모든 사회적 고립과 소외가 끝장나고 공동체가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병 환자의 간청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의 행동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기에 앞서 그 나병 환자가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도 중요합니다. 그는 적당히 떨어져야 하는 거리를 유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옵니다. 그러고는 도움을 간청합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고자 하시면”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다가옵니다. 그의 치유 여부는 오로지 예수님의 의지에 달려 있는데, “하고자 하시면”이라니요? 성경을 아는 유다인이라면 누구나 이 대목에서 으레껏 열왕기 하권에 나오는 ‘나아만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람 임금이 아끼던 장수인 나아만은 나병을 앓고 있었지요. 그의 주군은 그를 고쳐 달라는 편지와 함께 그를 이스라엘 임금에게 보냅니다. 물론 아람 임금의 편지는 이스라엘 임금의 통치 아래 활동하고 있던 엘리사 예언자가 나아만을 고치도록 해달라는 의미였지요. 여기서 아람 임금은 틀림없이 외교적 언사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임금은 이 외교적인 표현을 곡해하고서는 화를 내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2열왕 5,7) 이 말을 잘 살펴보면, 나병은 당시 죽고 사는 문제였음이 분명합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삶의 영역에서 분리되어 죽음의 영역으로 떨어진 것이지요. 사회적 고립은 살아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아가 “내가 하느님이라는 말인가?”라는 이스라엘 임금의 말은 또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곧 하느님만이 죽음에서 구해주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나병을 치유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나병 환자의 말은 예수님에게 신적인 능력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은 최종적인 신뢰의 표현이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몸소 행동하고 계심을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바랍니다. 우리의 간청은? 우리도 이 나병 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청하나요? 그처럼 한없는 신뢰를 지니고 간구하나요? 고통을 겪을 때 예수님께 간절히 청하나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삶의 모든 어려움을 다 말씀드리나요? 한없는 신뢰 가운데 그분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어려움에서 구해주시리라고 기대하나요?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 가운데 하나가 열심한 신앙인에게서도 흔히 나타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나는 내 문제로 하느님께 감히 도움을 청하지 못하겠어. 개인적인 어려움이나 질병, 뜻밖의 사고나 고민거리, 이런저런 업무나 얽히고설킨 일들로 하느님께 도움을 간청해도 괜찮을까? 우리의 기도는 좀 더 위대하고 심오한 일, 이를테면 세계 평화나 사회의 고통, 또는 교회에 관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말하자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 말이야.” 이런 생각을 경건하고 신심 깊은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예수님께 더 이상 아무런 청도 드리지 않게 됩니다. 이런 태도가 올바른 것일까요? 제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나 어려움이 ‘하느님 나라’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라면 그런 태도도 그르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실제로 하느님 나라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고, 자기 자신만을 안중에 둔 채 자신의 행복과 안녕만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과 희망과 사랑 가운데 사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삶의 방향을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에 맞추어 사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을 간청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큰 것을 청해도 되고, 삶에서 오는 여러 작은 어려움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고 간청해도 됩니다. 그런 사람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되리라고 기대해도 됩니다(마태 6,33 참조).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8년 2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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