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규 신부와 떠나는 신약 여행] (87)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 12,1)
모든 유혹과 시련에 맞서 하느님께 나아가라 - 히브리서는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하면서 ‘집’으로서의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또 우리는 하느님이 지으신 집이며 집안을 맡은 분은 예수님이라고 설명한다. 그림은 예수님의 수난을 그린 가르파초 작 ‘그리스도의 수난과 도구’, 캔버스에 유채, 1496년, 이탈리아 우디네, 역사와 미술 시립박물관. 출처=가톨릭굿뉴스. 신약성경에서 기원후 1세기 후반에 기록된 서간들은 공통적으로 당시의 공동체가 생각했던 교회에 대한 언급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이하 히브리서)이 말하는 교회의 모습은 사목서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어떤 집이든 그것을 지은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물을 지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집안입니다. 우리의 희망에 대하여 확신과 긍지를 굳게 지니는 한 그렇습니다.”(히브 3,4.6) 히브리서는 예수님과 모세를 비교하면서 ‘집’으로서의 교회를 언급합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의 집을 맡아 하느님의 백성을 이끈 인물이 모세라면 예수님께서는 모세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지으신 집이며 집안을 맡은 분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희망을 간직할 수 있고 그런 이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하느님의 집입니다. 하느님의 집, 교회 하느님의 집인 교회의 중심에 놓인 것은 예수님의 업적과 그분의 충실함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업적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히브 10,19) 이 성소는 히브리서에서 안식처로 표현되고 또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는 의미에서 ‘본향’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히브 11,14.16) 히브리서가 말하는 교회는 하늘의 본향을 향해가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 안에 있는 제도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지도자’만을 언급합니다. 히브리서는 교회 안의 여러 직무나 개인들의 은총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에 집중합니다.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준’ 사람들로 자신의 삶을 통해 믿음을 증언하는 이들로 소개됩니다.(히브 13,7)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지속적으로 신앙인들의 ‘영혼을 돌보아주는’ 이들입니다.(히브 13,17) 그들의 믿음을 본받도록 권고하는 내용과 함께 히브리서는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실천적인 삶에 대해서도 강조합니다. 히브리서는 두 방향으로 신앙의 실천적인 면에 대해 언급합니다. 첫째는 흔들리는 신앙을 간직한 이들과 세상의 삶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회개를 거부하는 이들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이들로 표현됩니다. 그들의 행동은 “스스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욕을 보이는 것”입니다.(히브 6,6)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약속을 얻지 못한다고 여기고 기쁜 소식을 들어도 그것을 통해 희망을 간직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반면에 신앙인들을 향해서는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자고 권고합니다.(히브 10,22) 실천을 통해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자고 권고합니다.(히브 12,14) 이런 권고가 평화로운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당시의 상황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죄에 맞서는 행동을 설명하고 지도자의 모범을 이야기하면서 죽음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당시의 박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히브 12,4; 13,7) 그렇지만 히브리서는 박해라는 구체적인 상황보다 그것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신앙을 흔드는 모든 것들’을 시련으로 표현합니다. 신앙인들이 모든 시련을, 곧 죄짓게 하는 모든 어려움과 유혹을 견디어내도록 용기를 불어넣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훈육하듯 신앙의 인내를 설명할 때에 히브리서는 다시 ‘집안’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신앙의 인내는 자녀들이 아버지로부터 받는 훈육에 비길 수 있습니다. 마치 가정 안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을 훈육하듯 영적 아버지인 하느님 역시 자녀들을 훈육하는 분으로 그려집니다. 훈육이 당장은 기쁜 일이 아니지만,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자녀들에게 궁극적으로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슬퍼하지 말고 어려움을 견뎌내는 것 역시 신앙에 필요한 일입니다. 인내를 통해 하느님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브 12,12-13)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2월 25일, 허규 신부(가톨릭대 신학대학 성서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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