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55) 제자직(루카 14,25-35)
가족까지 ‘미워하라’는 스승 말에 하늘이 무너진 제자들 -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모든것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사진은 예루살렘 성지에서 십자가를 들고 십자가의 길 순례 기도를 하는 성지 순례단. 가톨릭평화신문 DB.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길을 가던 군중에게 당신을 따르는 제자 직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여간 혹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떤 말씀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버림과 따름(14,25-33)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중입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시어” 말씀하십니다.(14,25) 돌아서신다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군중에 앞서 가시고 군중은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모습을 상상하게 해줍니다. 제자들이야 예수님과 함께 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많은 군중이 왜 그분을 뒤따라갈까요? 군중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직접 보았거나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하는 이들도 있었을 테고 호기심에서 함께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충격적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6) 학자들은 “미워한다”는 극단적인 표현과 관련해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언어 군(群)인 셈족 언어에는 비교급이 없어서 “덜 사랑한다”는 표현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미워한다”고 표현한 것이라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이라는 표현을 “(예수님보다) 덜 사랑하지 않으면”이라는 뜻이라고 풀이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데서는 그런 식으로 예수님의 표현 강도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기도 하지요.(「주석 성경」 참조) 확실한 것은 예수님이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리고”(5,11) 예수님을 따라나선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 야고보와 요한 형제 또는 레위(5,28) 같은 제자들과는 달리, 군중은 그냥 따라나선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어 따르려면 부모와 형제자매는 물론 아내와 자식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 미워할 정도로 큰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신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이 말씀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어오는 말씀 곧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14,27)는 말씀과 관련하여 찬찬히 새겨보면 “미워하라”는 말씀의 뜻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에는 당신의 죽음이, 그것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지셔야 하는 십자가였고,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처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나 형제나 아내나 자식을 미워할 정도로 포기하지 않는 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십자가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식들이 눈에 밟혀 배교했다가 다시 순교의 월계관을 받은 복녀 이성례 마리아(1801~1840)가 이와 관련한 좋은 사례입니다. 남편(최경환 프란치스코)은 순교하고 장남(최양업 토마스 신부)은 사제가 되고자 머나먼 이국에 가 있었습니다. 이성례는 젖먹이 막내 스테파노가 옥에서 죽어가자 자식들이 눈에 밟혀 배교하고 말지요. 그러다가 다시 체포된 이성례는 네 명의 자식을 둔 채 마침내 순교의 월계관을 받습니다. 반어(反語)적으로 표현한다면 네 명의 자식을 포기할 정도로 미워했기 때문에 어린 자식들을 두고 순교의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린 자식들을 남겨 두고 혼자 죽어야 하는 것 자체가 이성례 마리아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정도로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결단을 내려야 하지만, 결단을 내린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결단을 내리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 결단한 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흔히 봅니다. 어쩌면 우리 자신의 삶 자체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결단을 내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내리는 결단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지를 잘 헤아리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일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비용을 잘 계산해 봐야 한다는 말씀(14,28-30)과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기 전에 이길 수 있는지 먼저 헤아려봐야 한다는 말씀(14,31-32)은 바로 이를 강조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 예를 들어서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하고 마무리 지으십니다.(14,33) 얼핏 이 말씀은 탑을 세우려는 사람의 예화와 그리고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의 예화와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비용을 마련해야 합니다. 또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은 군사력을 확보해야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마련하고 확보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가 되려면 부모 형제와 자식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마무리한다고 하겠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14,34-35) 예수님께서는 이제 소금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짠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가 없어 밖에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짠맛을 잃은 소금은 소금이라고 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 말씀은 제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앞 말씀과 연결할 때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소금이 된다는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의 직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아무 쓸모가 없는 제자이고 제자라고 불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짠맛을 잃은 소금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제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가족은 물론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 또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당신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태도는 어떠했을까요? 개인적 상상입니다만,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과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멈칫했을 것이고 곰곰 생각한 끝에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을까요? 역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그것은 이 말씀은 행복선언의 말씀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행복선언 말씀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치 기준과는 정반대이지요. 마찬가지로, 가족과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는 것은, 소유를 버리라는 것은, 가족과 자기 자신과 소유에 대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춰서 새롭게 생각하라는 것으로 이해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새롭게 생각했다면 그렇게 살아야, 적어도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짠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3월 18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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