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 다시 읽기]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만난 하느님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창세 32,29) 야곱, 이스라엘의 시조(始祖) 고대의 대제국들은 일반적으로 유일한 조상을 두고 있습니다. 로마(Roma)는 레무스를 제거한 로물루스(Romulus)가, 그리스(Hellas)는 헬렌(Hellen)이 세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주변 민족들, 곧 가나안인들, 이스마엘인들, 에돔인들 역시 조상으로 각각 함(가나안), 이스마엘, 에사우(에돔)를 한 명씩 꼽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승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 이 세 사람을 늘 함께 꼽습니다.(탈출 3,6; 사도 3,13 참조)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이야기를 ‘땅과 자손과 만민 축복에 관한 하느님의 약속’이라는 주제 하에 ‘셋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성조사 : 창세 12-50장)로 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이어 이번엔 야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야곱은 유목민 무리였던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 국가로 태어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성조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명칭이 야곱의 또 다른 이름 “이스라엘”(창조 32,29)에서 따온 것으로 보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서 기인한 것으로 보나 과연 그렇습니다. 야곱, 타고난 찬탈자(簒奪者)? 야곱이 형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난 일(25,19-28), 빵과 불콩죽 한 그릇으로 형의 맏아들 권리를 산 일(25,29-34), 눈먼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챈 일(27,1-40) 등은 하나같이 모두 야곱의 욕심과 교활함을 보여줍니다. 사실 야곱이란 이름부터가 찬탈자에게나 어울릴 이름입니다. 날 때부터 형의 것을 빼앗기라도 하려는 듯 형의 발꿈치(히브리어로 ‘아켑’)를 붙잡고 태어났다고 붙여진 이름이니까요. 그러나 야곱이 처음부터 욕심 많은 찬탈자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 출산 전 어머니 레베카가 받은 예언은 형보다 더 축복받은 동생의 운명, 인간의 잣대(장자[長者] 중심주의)를 초월하여 약자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25,22-23) 처음부터 하느님의 선택은 맏아들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25,34) 이방인 여인들을 아내로 삼는(26,34-35; 28,8-9) 경솔한 에사우가 아니라, 가문에 충실하고 온순한(25,27) 성품을 지닌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문제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를 착실히 준비하며 믿고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제 살길만을 찾는 것, 제 몫을 얼른 찾아 누리려는 바로 그 조급함이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예언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레베카도 마찬가지였지요. 이 ‘모자 사기단’은 눈먼 남편, 아버지를 속여 장자의 축복을 훔쳐냈지만 결국 야곱이 마주하게 된 현실은 십수 년의 외롭고 고된 타향살이였습니다.(27,41-46; 29-31장)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 없이 혼자서 해낸답시고 허탕만 치다 실의에 빠진 야곱의 모습이 결코 낯설지만은 않은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비로소 하느님을 만나다 죽여버리겠다고 달려드는 형을 피해 고향 브에르 세바에서 맨몸으로 도망쳐 나온 야곱, 어찌 살아갈지 막막한 절망 속에 노상에서 쪽잠을 청하던 그가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 유명한 ‘야곱의 사다리’ 장면입니다.(28,10-22) 야곱은 하늘과 땅을, 하느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층계(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천사들과 그 위에 계신 하느님을 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을 기다리다 지쳐 절망하던 그때처럼(15장), 아버지 이사악이 기근을 피해 그라르로 피난 가던 그때처럼(26,1-5) 야곱은 그렇게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사실 배부르고 등따시던 시절, 성조 야곱이 기도하는 모습을 성경에서 단 한 번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아버지를 속일 때나 하느님 이름을 한 번 팔아먹었을 뿐입니다.(27,20)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런 야곱을, 그것도 죄를 짓고 도망가던 그를 당신이 먼저 찾으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27,13-15) 그제야 야곱은 믿음의 눈을 뜹니다.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을 때에도, 축복이 탐나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일 때에도, 죄를 짓고 보복의 위협 속에 수치스럽게 도망치는 바로 그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 계셨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 “아,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27,16)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때 두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았던 바로 그 자리가 ‘베텔’, 하느님의 집(히브리어로 ‘벳-엘’)이 됩니다. 이 자리가 후일 북이스라엘 왕국의 중앙 성소 베텔이 되었음은 알고 계시겠지요. 하란에 도착한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종처럼 살며 고된 세월을 보냅니다. 야곱이 라헬을 아내로 얻으려다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던 일은 아버지와 형을 속여먹은 그대로 야곱이 치루어야 할 보속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마음에 새긴 야곱은 20년이라는 보속과 정화의 시간을 기꺼이 감내합니다. 드디어 진짜 성조로서의 삶이 시작된 겁니다. 실제로 이전과는 달리, 하란에서의 삶 내내(30-31장) 야곱의 입에서 또 그의 삶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눈물로 드린 고백에 응답하시는 하느님 고향으로 돌아오던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던 형 에사우가 두려워 한밤중에 야뽁 건널목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밤, 야곱은 20년 전 도망 중에 베텔에서 만났던 하느님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만납니다. 두 번 모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죽음의 공포로 떨고 있던 밤이었습니다. 난데없이 한밤중에 나타나 자신과 밤새 씨름하는 이 “어떤 사람”(32,25)이 바로 하느님(32,29.31 참조)이심을 성조 야곱이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니 야곱이 엉덩이 뼈를 다쳐 절뚝이면서도 “저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놓아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고 하느님의 허리춤을 붙들고 간절히 매달렸던 것이겠지요. 그런 야곱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 “네 이름이 무엇이냐?” 결코 모르실 리가 없는 야곱의 이름을 말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대할 때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세 번이나 물으시는 주님 앞에서 죄송함과 서러움이 북받쳐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진심으로 응답했던 베드로는 그렇게 세 번 주님을 배신했던 과거를 깨끗이 씻어냅니다. 마찬가지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시는 하느님의 물음에 “야곱입니다.” 했던 그의 대답이 제게는 그 베드로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챘다는 죄책감과 자신이 한 짓 그대로 타향에서 수십 년 당하고만 살아온 서러움으로 북받친 그 순간에 제 이름을, 찬탈자의 이름 ‘발꿈치 야곱’을 외칠 때의 그의 마음이 헤아려집니다. : ‘예, 하느님. 저는 야곱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던 찬탈자, 발꿈치 야곱입니다. 그래도 주님, 살려주십시오. 제발 저와 제 가족들을 구해주십시오.’ 사실 성경은 야곱의 대답에 구구절절 자세한 묘사를 덧붙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하느님 허리춤에 끝까지 매달려 있는 야곱이 보입니다. 그렇게 드린 기도에 하느님은 기꺼이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32,29) 하느님은 찬탈자 ‘발꿈치’ 야곱에게 “이스라엘”(“하느님께서 싸워주신다”)이란 새로운 이름을 주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주셨던 구원의 약속을 이어가셨습니다. 찬탈자 야곱을 성인 야곱이 되게 하시고, 평생 그와 그의 가족들을 지키고 돌보셨습니다.(33-50장)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눈을 들어 하느님을 바라보았고, 그분께 간절히 매달려 기어이 구원을 얻어냈던 성조 야곱은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하느님은 회개의 눈물로, 진실로 호소하는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 아니 외면하실 수조차 없는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매일 이것을 체험하며 살고 계십니다. 사람의 어리석음도 죄스러움도,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당신의 자유와 의지로 기어이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이끌어가고 계신 하느님을 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힘들고 지칠 때, 야곱처럼 두 눈을 들어 내 곁을 지키고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 허리춤을 붙들고 눈물로 매달려 구원을 얻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월간빛, 2018년 4월호, 강수원 베드로 신부(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성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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