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인물과 함께하는 치유여정] 수산나의 눈물 구약성경의 현자들은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왜 지혜로운 것일까요?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 안에서 현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중요한 해석의 열쇠를 발견합니다. 예레미야서 17장 5-10절에서 예언자는 두 부류 사람들의 운명을 대조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들”로, 이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주님을 떠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복된 자들로서 그들의 운명은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무더위와 가뭄에도 끄떡없이 줄곧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두려워함, 곧 주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지 않은 것, 자기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신뢰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살 때 인생은 복되고 풍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곧 지혜로운 삶의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혜로운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지혜를 얻기 위한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려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의 현자들이 말한 대로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삶의 으뜸가는 원칙으로 삼고, 그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도록 삶의 우선순위를 기꺼이 재조정하려 애쓰는 이는 드뭅니다. 이들은 사람의 마음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교활하여 남도 나도 속이려든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예레 17,9 참조).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예레 17,10)을 모시고 살아갑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으시는” 주님을 알기에 그들의 길과 그들의 행실을 부지런히 돌아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한 두 부류의 사람들은 구약성경의 한 유명한 이야기 속에도 등장합니다. 단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잘 쓰고자 하시는 분들, 지혜의 길을 따라 걷기를 열망하는 이들을 위하여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면서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를 우리 인생의 시간에 무엇을 선택하며 살 것인지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니엘서 13장이 전해주는 이 이야기의 배경은 유다 지역이 아니라 바빌론입니다. 그곳에 요아킴이라는 굉장한 부자가 있었고, 그의 아내 수산나는 무척 아름다울 뿐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경건한 부모에게 율법에 기초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요아킴은 매우 부자였고 존경받는 인물인데다 큰 정원이 딸린 집에 살았기에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하였습니다. 그해에 재판관으로 임명된 두 원로도 자주 왔기에 사람들은 소송거리가 있을 때마다 요아킴의 집으로 오곤 하였습니다. 한낮이 되어서야 요아킴의 집은 조용해졌습니다. 그제야 수산나는 남편의 정원을 산책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결혼한 여성은 외출할 때 얼굴을 베일로 가렸으며, 남편이 아닌 남성들과의 접촉을 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집에 자주 머물렀던 그 두 원로 재판관들은 한낮이면 정원을 거니는 아름다운 수산나를 보게 되었고, 수산나에게 음욕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저자는 이들의 내적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양심을 억누르고 하늘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린 채, 의로운 판결조차 생각하지 않았다.”(다니 13,9) 그들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적절한 순간에 이것을 되돌리지 않으면 그들은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는 힘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두 원로들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대신에 자신의 음욕을 채울 기회만을 엿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때에 그 둘은 각각 집으로 돌아가는 체하다가 다시 요아킴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중에 마주친 그 둘은 서로 까닭을 캐묻다가 같은 동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들은 자신들의 음욕을 채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도모하기 시작합니다. 때는 아주 무더운 어느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떠난 고요한 정원을 하녀 둘과 함께 들어갔던 수산나는 그곳에서 목욕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기에 수산나는 아무런 불안도 의심도 품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날 그 정원에는 두 원로가 숨어 있었습니다. 수산나는 두 하녀에게 정원문을 모두 닫아걸게 하고, 목욕을 하는 데 필요한 올리브 기름과 물분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두 하녀가 나간 정원은 고요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두 원로의 등장으로 그 고요는 산산이 깨어져버립니다. 두 원로는 수산나를 빠져나올 수 없는 곤경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들과 성관계를 하거나 어떤 청년과 간음하였다는 거짓 고발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습니다. 둘 다 수산나에게는 죽음을 의미하는 선택입니다. 수산나는 주님 앞에 죄를 짓기보다는 그들의 손아귀에 걸려들어 죽음을 당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수산나도, 두 원로도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 사이에 한 원로는 재빨리 정원문들을 열어젖혔습니다. 하인들이 달려오자 원로들은 수산나를 거짓 고발하였고, 하인들은 원로들의 말을 믿고 수산나의 일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다음 날 바로 법정이 열렸고, 수산나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나오자 두 원로는 결혼한 여인의 베일을 벗게 함으로써 수산나를 창녀 취급합니다. 그리고 수산나의 머리에 자신들의 손을 얹고 사람들 앞에서 수산나가 어떤 청년과 간음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는 거짓 증언을 합니다. 두 원로의 증언으로 수산나는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기에 눈물 어린 눈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며 이 모든 상황을 담담히 견디어냈던 수산나는 사형이 언도되자 큰 소리로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감추어진 것을 아시고 무슨 일이든 일어나기 전에 미리 다 아시며, 저 원로들의 증언이 거짓됨을 알고 계시는 영원하신 하느님께 자신이 죽을 처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성경의 저자는 바로 그때 주님께서 수산나의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응답은 젊은 현자인 다니엘을 통하여 옵니다.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주님께서 다니엘의 거룩한 영을 깨우셨습니다. 그러자 다니엘은 신문 없이 이루어진 이 재판의 무효성을 주장하며, 원로들의 증언이 거짓된 것이니 법정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법정은 다시 열렸고, 다니엘은 그 두 원로를 따로 불러 신문하였습니다. 둘 중 한 원로에게 두 남녀가 어느 나무 아래에서 관계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추궁하자 그는 “유향나무”(그리스어로 ‘스키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이 원로를 둘로 베어버릴 것(그리스어로 ‘스키조’)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원로는 평소에도 무죄한 이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죄 있는 자를 풀어주는 불의한 재판을 일삼은 자입니다. 다니엘은 수산나의 일로 인하여 이 원로가 저지른 지난날의 죄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른 원로를 불러 똑같이 추궁하자 그는 “떡갈나무”(그리스어로 ‘프리노스’)라고 대답하였고,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그를 잘라버리실 것(그리스어로 ‘프리오’)이라고 선언합니다. 이 노인은 유다인이 아니라 가나안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의 딸들을 이런 식으로 능욕해왔던 터였습니다. 이들의 거짓 증언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온 회중은 당신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두 원로가 수산나에게 가하려던 형벌을 거짓 증언한 그들에게 되돌림으로써 그 둘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두 원로는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한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대신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대로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구를 길들이는 대신에,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그들에게 위임된 힘을 이용하였습니다. 그 힘으로 약자의 인권을 철저히 짓밟았고, 그들을 죽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 잔인함을 소유한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수산나와 다니엘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힘을 두려워하는 대신 참된 힘의 주인이신 분을 신뢰하며 그분께 의존하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다니엘서 13장의 이야기 속에서 수산나를 살린 인물은 현자였던 다니엘이었습니다. 오늘날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하늘을 우러러 눈물 흘리고 있을 수많은 수산나들을 살리는 것은 또 다른 현자들인 우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선택은 다시금 중대한 과제로 남습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 김영선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소속 수도자로,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생활성서, 2018년 4월호, 김영선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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