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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 이야기59: 제자들의 처신과 태도(루카 17,1-10)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15 조회수4,396 추천수0

[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59) 제자들의 처신과 태도(루카 17,1-10)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그리스도의 제자들들은 악표양으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겸손하게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는 종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사진은 겸손한 봉사를 가장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성 목요일 발씻김 예식. [CNS 자료 사진]

 

 

루카 복음사가는 죄, 용서, 믿음,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서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또는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들입니다. 차례로 살펴봅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17,1-3ㄱ)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인데(17,1),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달리 말하면 ‘스캔들이 되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살이에는 스캔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스캔들이 일어나는 세상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스캔들이 일어나는 세상 현실을 직시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둘째 부분은 예수님께서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입니다.(17,2) 여기서 ‘이 작은 이들’은 제자들과 함께 있는 이들 곧 제자들의 공동체에 있는 보잘것없는 신자들, 제자들에 비해 믿음도 약하고 힘도 없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제자들의 공동체에서 스캔들을 일으켜 믿음이 약한 신자 산 사람이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연자매는 일반 맷돌보다 수십 배가 커서 나귀나 소가 돌리는 맷돌을 말합니다. 목에 걸 수가 없는 크기입니다. 이런 연자매를 걸고 바다에 빠지면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이고 영원히 수장되고 말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 편이 낫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셋째 부분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17,3ㄱ) 이 말씀은 다른 사람, 특히 작은 이들, 보잘것없는 신자 한 사람에게도 죄짓게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용서하라(17,3ㄴ-4)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지으면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요?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시는데(마태 18,22), 루카복음에서는 ‘일흔일곱 번’이 빠진 대신에 ‘하루에도’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하루에도 일곱 번 용서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와서 회개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이렇게 조건을 단 것은 보면 되찾은 아들의 비유(15,11-32)에 나오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자비와 사랑과는 다른 것 같은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말씀은 잘못을 저지른 형제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회개하기만 기다렸다가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 잘못을 꾸짖어 무엇을 잘못했고 왜 잘못했는지 깨달아 회개하도록 여지를 주라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다면 잘못을 꾸짖는다는 것은 단죄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또다른 표현일 것입니다.

 

 

믿음의 힘(17,5-6)

 

이번에는 “사도들이 주님께” 먼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이 두어 가지 있습니다. 우선 루카 복음사가는 17장을 시작할 때에는 ‘제자들’이란 표현을 쓴 것과 달리 이번에는 ‘사도들’이란 표현을 씁니다. ‘사도’는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제자를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최측근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도들이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하는데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하고 말씀하십니다. 맞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제자들, 당신을 따라나선 사도들에게 ‘너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믿음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을 많고 적은 양으로 계산해 더 많은 믿음이 있을수록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임을, 얼마나 더 큰 믿음이 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믿음이 참된 믿음이냐 아니냐가 관건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참된 믿음이라면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하게 섬겨라(17,7-10)

 

얼핏 들으면 예수님의 말씀에 거부감이 생깁니다.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는데 그 종이 들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면 주인은 그 종에게 또 식사 준비를 시키고 식사 시중을 들게 합니다. 그렇게 주인이 식사를 마친 다음에야 종에게 먹고 마시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종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인이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17,10)

 

정말로 이런 주인이 있다면 몹쓸 주인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또 그 종에 대해서는 안쓰럽고 심지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라고 학자들은 지적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에서 핵심은 주인의 태도가 아니라 종의 태도입니다. 종은 바로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제자들에게는 저마다 주님께 받은 소명과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 일을 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내세울 것은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겸손하게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할 일임을 주님께서는 일깨워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 꾸짖고 용서하라, 참된 믿음을 가져라, 겸손하게 섬겨라. 이 가르침들은 예수님 시대에만, 또 부활 후 사도들이 중심이 된 첫 제자들의 공동체에서만 적용되는 가르침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더없이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교회 안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다른 교우들에게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고 심지어 신앙을 버리기까지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열심하다는 신자들, 지도자들, 심지어 성직자와 수도자의 악표양으로 믿음이 약한 신자들이 상처를 입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신앙인이니까 용서해야 한다’고 용서만 외치면서 형제의 잘못을 사랑으로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는 경우는 없는지요? 반대로 잘못한 형제가 ‘회개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데도 용서하지 않은 경우는 또 없는가요? 

 

일이 제대로 풀릴 때는 믿음이 깊어서 그렇다고 하고,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정작 내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 아니면 잘못된 믿음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데는 무심하거나 소홀한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종의 신분임에도 종으로서 해야 할 역할은 마지못해 하면서 주위에는 오히려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 적은 없는지요? 

 

이런 여러 일에서 우리가 보이는 그릇된 표양은 믿음이 약한 이들이 걸려 넘어지는 걸림돌이 되어 그들을 죄짓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주 맹렬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15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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