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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물] 신약 성경의 인물: 눈 뜬 거지 바르티매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4-23 조회수5,701 추천수0

[신약 성경의 인물] 눈 뜬 거지 바르티매오

 

 

예수님께서는 삶의 여정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기득권 계층과 종교 지도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소외되고 멸시를 당하던 이들, 직업이나 병 때문에 죄인 취급을 받고 공동체와 멀어져야 했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십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모습은 과히 파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관습은 그들과의 만남 자체를 꺼렸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만나시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시며, 그 고통에서 적극적으로 구해 내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곧 이들에게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구원이자 기쁜 소식이요, 몸과 마음의 병을 함께 치유받는 은총의 시간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르티매오

 

예리코라는 마을에서 구걸하던 눈먼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고치신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마태 20,29-34; 마르 10,46-52; 루카 18,35-43 참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모두 복음서 후반부에 위치합니다. 바르티매오가 만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복음을 선포하시던 예수님께서 이제는 당신 수난의 길, 곧 예루살렘을 향해 가십니다.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리코를 방문하시지요.

 

방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칠 일을 세 번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고하십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요.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기는커녕 그저 당신의 오른편과 왼편의 자리를 얻어 출세하려는 생각에만 몰두합니다(마르 10,35-45 참조).

 

바로 다음에 바르티매오가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예리코를 떠나실 때입니다. 예수님 곁에서 보고 듣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참모습을 헤아리기조차 못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눈먼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바르티매오는 단순히 눈만 먼 것이 아니라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거지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이를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이니 ‘아들 티매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티매오 아들’인 것이지요. 유다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아버지의 성을 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고 불렸다는 사실을 통해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지닐 수 없는 미천한 처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복음사가들의 일치에 관하여」를 통해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가 큰 영화를 누리다가 몰락한 인간으로 보았으며, 눈이 멀어 거지가 된 그 비참한 신세는 널리 알려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비

 

길거리에 앉아 있던 바르티매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 외치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는 예수님을 뵌 적이 없지만, 그분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릅니다. 유다인들에게 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억압이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해줄 수 있는 영웅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곧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를 지칭합니다. 메시아가 언제 올 지 그때를 모르던 당시의 유다인들에게 이 호칭은 익숙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과 공생활을 함께하던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한 그분의 신분을, 눈먼 그가 고백하며 외쳤던 것입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습니다. 이는 수많은 사람이 따르던 예수님의 앞 길을 막으며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꾸짖음이기도 하지만, 다윗의 자손이라는 고백 자체가 신성 모독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바르티매오는 많은 사람의 질책에도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의 외침은 단순히 구걸하는 것일까요?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0,48). 이 구절을 보면 바르티매오의 간청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가 청하는 이 ‘자비’는 사실 매우 흥미롭습니다.

 

구약 성경에 나타난 히브리어의 자비 ‘라하밈’은 가장 심도 있고 내밀하고 깊은 부분에 위치한 감정을 말합니다. 주로 부모들의 부드러운 사랑을 드러낼 때와 하느님과 자녀들이 갖는 강한 유대, 하느님의 조건 없는 은총을 드러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또한 이 자비는 모태를 통해 태어난 생명과도 같으며, 계약에 불충한 사람들에게도 내려지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선택과 은총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과의 관계 회복을 담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나타난 그리스어의 자비로 ‘엘레오스’, ‘스플랑크논’ 이 두 단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일반적인 의미가 아닌 예수님께 쓰이는 자비인 ‘스플랑크논’에 조금 더 집중해 봅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당신께서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그분의 마음을 드러내실 때 주로 나타납니다. 당신의 치유와 기적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자비는 출산이 이루어지는 자궁이 위치한 ‘허리’를 의미하며, 타인의 고통과 상처, 슬픔이 너무나 생생하고 강렬하게 다가와서 나의 내장도 뒤집어질 정도로 그 아픔에 공감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말에도 이와 비슷한 ‘애달프다’와 ‘애끊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창자에 해당하는 ‘애’가 끊어질 듯한 상태를 말합니다. 상대로 말미암아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함을 뜻하는 단장(斷腸)이라는 단어와 뜻이 같습니다. 타인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며, 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려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자 자비입니다.

 

 

믿음과 구원

 

예수님께서는 걸음을 멈추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 눈먼 이를 부르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름에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갑니다(마르 10,50 참조).

 

겉옷을 벗어 던지는 행동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특히나 구걸하는 이들에게 겉옷은 사실상 전 재산입니다. 이는 단순히 의복이 아니라 밤의 추위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생명줄이기도 합니다.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적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주어, 그가 자기 겉옷을 덮고 잘 수 있게 하여야 한다.’라는 유다의 법(탈출 22,25; 신명 24,13 참조)을 볼 때, 겉옷이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 다가갔던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예수님께서는 치유와 기적을 행하시기에 앞서 공통적으로 그들의 청원이 무엇인지를 물으십니다.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셔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고, 청원하게 하십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당신 앞에 내어 보이게 하시고, 당신과 온전한 친교의 상태로 초대하시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바르티매오는 그때서야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예수님께 청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다시 볼 수 있게’라는 표현을 통해 그가 태어날 때부터가 아닌 후천적으로 눈이 멀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대의 시각으로 보면 이는 그의 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바르티매오의 이 고 백은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 죄를 용서받고, 이를 통해 타인들의 멸시로부터의 회복과 육체적, 정신적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예수님께서는 눈을 뜨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행위가 아닌 그의 믿음이 스스로를 구원하였고, 곧 자신의 믿음으로 해방될 것임을 전합니다.

 

바르티매오는 다시 보게 됩니다. 이제 그는 더는 멸시를 당하지 않을 것이고, 구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치유 기적은 눈먼 이가 예수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순간임과 동시에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35,5)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외침처럼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바르티매오가 눈을 다시 뜨게 된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가 눈을 뜬 뒤 바로 예수님을 따랐음을 이야기합니다. 가족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게 된 이 기적의 순간에 그는 자신의 집과 가족이 아닌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의 만남이 지닌 힘이고 기적이며, 또 삶의 실천이 함께하는 신앙의 길임을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마음속 깊이 믿으며, 당신의 그 애절한 마음과 자비의 시선을 의식하고, 예수님께 다가가 나의 간절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청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 그것이 바로 바르티매오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신앙의 참모습이 아닐까요.

 

한 걸음 한 걸음 그분을 향해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에 주님의 자비가 함께 머물기를 청해 봅니다.

 

* 최광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담당하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서 신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8년 4월호, 최광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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