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0)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루카 17,11-21)
육체를 치유받은 사람과 영혼을 구원받은 사람 - 나병환자 열 사람이 치유를 받았지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만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믿음의 중심이 무엇을 향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준다. 사진은 프란치스코가 나병환자를 만나는 영화 속 한 장면. 가톨릭평화신문 DB.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상경기(9,51-19,27)를 전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라는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합니다.(9,53; 13,22; 17,11) 학자들은 이런 반복적인 표현이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 여정에 극적인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고 풀이하기도 합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는 이런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병환자 열 사람을 고치심(17,11-19)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고 계실 때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가고 계셨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옵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청합니다.(17,11-13) 나병환자, 곧 한센병 환자들은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부정한 사람’의 대명사였습니다. 구약의 법에 따르면 이들은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와서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말이지요. 또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서 떨어져 혼자 지내야 했습니다.(레위 13,45-46) 이런 이유 때문에 나병환자들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예수님을 불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 하고 이름을 부르고 나서 다시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희랍어로 스승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에피스타테스’와 ‘디다스칼로’가 있다고 합니다. 디다스칼로가 일반적으로 교사, 스승, 선생 등으로 널리 사용되는 표현이라면 에피스타테스는 제자들이 스승을 부를 때 사용하는 표현으로 공경심이 더 담겨 있으면서도 더 친숙함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하지요. 나병환자가 예수님을 부를 때 사용한 단어가 바로 에피스타테스입니다. 그렇지만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친근한 표현으로 ‘스승님’ 하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 대한 공경심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고는 할 수 있겠지요.(「주석 성경」 참조) 나병환자들의 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는데,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7,14-16) 여기서 잠시 멈추어서 이 상황을 상상해 봅시다.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절히 청하는 나병환자 열 사람. 그들을 보시는 예수님. 그리고 ‘가서 사제들에게 보여라’ 하시는 말씀. 그 말씀을 듣고 가는 환자들. 어느새 깨끗이 사라진 나병. 나병환자들의 간절한 청과 예수님의 응답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말 그대로 치유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여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병과 같은 악성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는지를 사제에게 보여 확인해야 한다는 율법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레위 14,2-3) 깨끗해진 나병환자 열 사람은 어떻게 했을까요? 예수님 말씀대로, 또 율법의 규정대로 그들은 사제를 찾아가 자신들의 몸을 보이고 깨끗해졌다는 선언을 받았을 것입니다.(레위 14,1-32 참조) 그런데 루카 복음사가는 그 이야기를 전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인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고 전합니다.(17,15-16). 병이 깨끗해진 사람은 모두 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하자 바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를 드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유다인들이 이방인처럼 멸시하며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규정을 지키지 않고 이방인들의 신을 섬긴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이냐?”고 물으시고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7,18-19)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나병환자 열 사람은 모두 병을 치유받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인 것 같습니다. 그는 병이 나은 것에 감사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의 그 행위가 바로 믿음의 행위라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17,20-21) 나병환자 열 사람의 치유와 구원에 관한 이야기에 바로 이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하십니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여기서 예수님 답변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하느님 나라가 바리사이들 가운데 있다’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바리사이들을 위선자라고 질타하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지금 예수님과 함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서 구약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읽으시고는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11,20) 하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와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 있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치유를 받은 나병환자는 열 사람이었지만 구원을 받고 돌아간 사람은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이었다는 사실은 구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줍니다. 나병의 치유, 곧 육체적인 치유가 구원의 한 표징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육체의 치유가 구원의 전부가 아니라 표징일 따름입니다. 육체의 치유는 마음의 치유, 내면의 치유에 대한 계기가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을 소리높여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구원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아홉 명은 육체의 치유라는 표징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몸이 깨끗해진 것으로, 외적인 치유 자체로 만족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치유해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기보다는 빨리 사제에게 가서 깨끗해진 몸을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아마 몸은 깨끗해졌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가요? 우리는 깨끗해진 몸을 사제에게 달려가 보여주고 정결하다는 선언을 받고 싶은 아홉 명에 가까운지요? 아니면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사마리아 사람에 가까운지요?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22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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