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1) 사람의 아들의 날(루카 17,22-37)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면서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고 말씀하신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징벌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으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구약성경의 심판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독수리. 가톨릭평화신문 DB. 바리사이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20-21) 루카 복음사가는 이 말씀에 바로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가 오겠지만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17,22) 이 구절에서 세 가지를 주목하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말씀을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둘째, 사람의 아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미 루카복음을 살펴보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고 한 적이 여러 번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셋째, ‘사람의 아들의 날’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이라면 사람의 아들의 날은 예수님의 날이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날이 오는 것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데 또 ‘나의 날이 오는 것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이 대목 전체 맥락에서 보면 ‘사람의 아들의 날’은 바로 종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종말의 날이 적어도 제자들에게는 나쁜 날이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 날을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 올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전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을 계속 살펴봅니다. 편의상 예수님 말씀을 세 부분으로 나눠봅니다. 첫 부분은 사람의 아들의 날에 사람의 아들이 언제 어떤 식으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17,22-25)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여기에 계시다’ ‘저기에 계시다’는 식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마치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렇게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지금 당장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먼저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야 한다”(17,22)는 예수님 말씀이 이를 확인해 줍니다. 둘째 부분은 그 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것입니다.(17,26-30)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두 사건, 노아의 홍수 때 그리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았던 소돔의 멸망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노아 때에 의인인 노아와 그 가족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로 모두 멸망해 버렸습니다. 또 소돔 사람들도 그렇게 지내다가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멸망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17,30)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셋째 부분은 그날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17,31-37) 예수님께서는 “그날 옥상이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고 하시면서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17,31-32) 이 말씀은 세간을 꺼내려 내려가도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들에 있는 사람이 뒤를 돌아보다가는 롯의 아내처럼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소돔을 탈출해 도망가다가 하느님이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퍼붓기 시작하시자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창세 19,24-26)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거나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하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씀(17,34-35)도 마찬가지로 종말의 때에 닥쳐오는 심판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요? 옥상에 있는 사람은 내려오지 말고, 들에 있는 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은 그냥 평소처럼 그대로 있으라는 말씀인가요? 그런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종말의 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닥칠 것이기 때문에 뒤늦게 살겠다고 허둥거려봐야 소용이 없고, 평소에 종말의 때를 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평소에 어떻게 종말을 대비해야 할까요?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라는 말씀(17,33)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학자들은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노아 시대 때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사람들, 또 롯이 살던 때에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풀이합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목숨을 살릴 것”인데 여기서 ‘살리다’로 번역된 그리스 말은 성경 밖에서는 우선적으로 ‘탄생시키다’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목숨을 잃는 사람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주석 성경」 참조)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한 사람만 데려가고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으면 한 여자만 데려갈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이 끝나자 제자들이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십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17,37) 좀 황당하고 선문답 같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독수리 같은 맹금은 구약성경에서 심판 장면에 자주 나온다고 합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말의 심판 날은 틀림없이 온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물음이 생깁니다. 시체란 무엇을 나타내나요? 의인은 의로움의 향기를 내고 죄인은 죄의 악취를 풍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에 비춰본다면 시체는 죄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는 말씀은 죄인들이 유황불과 홍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디?”라고 장소를 물었지만 그 심판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제 ‘사람의 아들의 날’에 관한 예수님 말씀을 정리하며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날 곧 사람의 아들인 당신이 다시 오실 종말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심판의 날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는 종말이 노아 때 홍수로 멸망한 사람들처럼, 또 롯 시대에 불과 유황으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주민들처럼 파멸의 때가 되고, 독수리들이 시체가 있는 곳에 모여드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 종말이 “하루라도 보려고 갈망할 때” 곧 구원의 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이 언제 어떻게 올 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이 올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자리에서 회개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그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재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재물로 가난한 이를 돕고, 남을 죄짓게 하지 말고, 형제를 용서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고, 겸손하게 섬기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16-17장 참조)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4월 29일, 이창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