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훈 기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2)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루카 18,1-8)
절망 속에서도 믿음의 불 밝혀야 - 간절한 마음으로 낙담하지 않고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는 들어주신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야 한다. [CNS 자료 사진] 루카 복음사가는 이미 11장에서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소개한 바 있는데(11,5-8), 18장을 시작하는 자리에서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전하면서 낙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제시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18,2)로 시작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하늘이 두렵지도 않으냐?’ 하며 꾸짖곤 했습니다. 이런 꾸짖음은 사람의 탈을 쓰고도 짐승처럼 행동하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사람에게 적용됐지요. 그런데 이 재판관은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해서 놀랄 일도 없을 것입니다. 안하무인(眼下無人)의 재판관인 셈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한마디로 ‘불의한 재판관’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고을에 과부가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라댔습니다.(18,3) 과부는 구약에서는 물론이고 예수님 당시에도 의지할 데 없는 가장 약한 이들의 부류에 속했다고 합니다. 인면수심에 안하무인 재판관에게 가장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과부가 송사를 호소한다고 해서 그 재판관이 제대로 들어주겠습니까? 들어줄 턱이 없겠지요. 하지만 그 과부가 줄기차게 졸라대자 재판관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18,4-5) 재판관이 과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기로 작정한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끈질기게 찾아와 귀찮도록 졸라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비유 말씀 끝의 예수님 말씀을 편의상 세 부분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첫 부분은 예수님께서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부분입니다.(18,6) 이 말씀의 뜻은 불의한 재판관이 송사를 들어주기로 한 것은 자신이 의로워서 또는 그 과부가 안쓰럽고 애처로워서가 아니라 끈질기게 찾아와 졸라대는 것이 귀찮아서라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이 불의한 재판관과 비교되는 하느님에 관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이다.”(18,7-8) 이 둘째 부분은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부분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졸라대는 이는 재판관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재판관이 안중에 두지 않는 과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밤낮으로 부르짖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단지 계속 졸라대는 것이 귀찮아서 평소에는 안중에도 없던 과부의 청을 들어준다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 곧 하느님의 자녀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다면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실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18,1)으로 예수님께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전하는 루카 복음사가의 취지를 잘 드러내 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 곧 부르심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이라면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통해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부분은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18,8)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께 밤낮으로 부르짖는 이들에게 바로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가지고 부르짖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없는 부르짖음은 아무리 밤낮으로 부르짖는다더라도 효과가 없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1]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가 올바른 판결을 내려달라고 조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망설였을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 재판관이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찾아가 귀찮아할 정도로 졸라댔다면 적대자와의 잘못된 관계로 인해 그 과부가 받은 상처나 손해가 얼마나 컸을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줍니다. 힘없고 약한 과부가 송사를 통해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자 재판관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과부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올바른 판결을 받아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불의한 재판관이 저 과부가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 달라고 하느님께 청을 드리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청원과 관련해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하느님께 청을 드릴 때 우리가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청을 드리는지요? 아니면 바른 해결책을 주시도록 청을 드리는지요? 또 바른 해결책이라는 것도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바른 해결책인가요? 아니면 공정한 재판관이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바른 해결책인가요? 둘째는 우리는 얼마나 간절하게 열심히, “낙담하지 않고 끊임없이”(18,1) 청을 드리는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밤낮으로 부르짖는지요? 아니면 적당히 청을 드려보고 안 된다고 낙담하고 마는지요? [2] 학자들은 과부의 청을 들어준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이 비유 말씀을 루카 복음사가가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적용했다고 풀이합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복음서를 쓸 당시에 교회는 박해를 비롯해 여러 가지로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루카는 이 비유 말씀을 통해서 시련에 처한 신자들이 믿음을 가지고 밤낮으로 주님께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리라고 확신하며 낙담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격려하고 믿음을 북돋우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 말씀은 루카 복음사가의 공동체에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비록 신앙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는 아니지만, 세상의 온갖 유혹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큰 신앙의 위기와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지요? 믿음을 가지고 시련을 올바로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해주십사 간절히 기도하고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지요? 아니면 적당히 노력해 보고는 실망하고 낙담해 버리는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6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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