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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예수님 이야기63: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어린이(루카 18,9-17)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5-12 조회수5,277 추천수0

[이창훈 위원의 예수님 이야기 - 루카복음 중심으로] (63)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 어린이(루카 18,9-17)


부모 품의 아이처럼 오로지 주님께 맡겨라

 

 

-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죄의 상황에 놓인 처지를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아파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바친다. 세리의 이런 자세는 어른들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어린아이의 자세와 같다. 사진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안겨 교황의 머리를 만지는 어린아이. [CNS 자료 사진]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에 관한 말씀을 통해 낙담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를 바쳐야 함을 일깨우십니다.(루카 18,1-8) 예수님께서는 이제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관한 말씀으로 어떤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십니다.(루카 18,9-14) 또 아이들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십니다.(루카 18,15-17)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18,9-14)

 

예수님의 비유는 두 사람, 곧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18,10) 

 

바리사이는 율법교사와 함께 존경받는 지도자층을 대표합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 꼿꼿이 서서 기도합니다. 꼿꼿이 선다는 것은 당당함을, 꿀릴 것이 없고 떳떳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당당한 태도는 보통 바로 앞에서 합니다. 멀리에서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봤자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꼿꼿이 서 있다는 것은 그가 성전에서도 뒤쪽이 아니라 지성소 가까이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냅니다. 

 

바리사이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다른 사람과 같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감사드립니다.”(18,11) 이 기도 내용으로 볼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표양을 보인 일이 없습니다. 적어도 십계명의 두 번째 부분,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부분은 충실히 지키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친다”는 내용입니다.(18,12) 이는 하느님께 바쳐야 할 부분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도 내용을 볼 때 이 바리사이는 정말 꼿꼿이 서서 당당하게 기도할 만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창녀와 함께 대표적인 죄인층에 속합니다. 정복자인 로마제국을 위해 세금을 거둬들일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착복을 일삼는다는 이유 때문이지요. 세리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18,12ㄱ)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찍이 선다는 것은 뭔가 거리끼는 것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그 사람 가까이에 다가가 떳떳하게 서 있지 못합니다.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 서서 피합니다. 하늘을 향해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하늘에, 곧 하느님께 죄를 지었음을 의미합니다. 가슴을 친다는 것 역시 심하게 자책하고 있음을, 뉘우치고 있음을 의미하지요. 

 

세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것뿐입니다.(18,12ㄴ) 말하자면 세리는 자신이 짓지 말아야 할 죄를 지은 죄인임을 잘 알고 있고 그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으니 용서해 달라는 청원도 드리지 않습니다. 다만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구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어쩌면 세리라는 직업상 자신의 처지가 또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소개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8,14)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셨다는 것 또는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는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를 의롭게 여기셨을까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는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의 기도 내용을 보면 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자기가 한 일 그대로를 기도로 바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겸손함이 부족했습니다.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떠벌렸을 뿐 아니라 함께 기도를 드리러 온 세리를 대놓고 차별했습니다. 바리사이의 기도에는 교만함이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실 만한 일을 한 것은 없었지만, 자신의 부족함을, 자신이 죄인임을 겸손하게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흠결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그 자세를 하느님께서는 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다(18,15-17)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려와서 예수님께 쓰다듬어 달라고 하자,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쓰다듬어 달라는 것은 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아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꾸짖을까요? 제자들은 아마도 ‘스승님께서 어른들을 감당하기에도 벅차실 텐데, 아이들까지 데려오면 얼마나 더 힘드실까’ 하고 인간적으로 염려하는 차원에서 아이들을 데려온 어른들을 나무랐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오히려 그 아이들을 가까이 불러놓고는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18,16) 그런 다음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18,17)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린이는 꾸밈이 없습니다. 해석을 달지 않습니다. 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요. 또 특히 어린 아기들은 언제나 부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어린이는 세리와 비슷합니다. 언제나 부모에게 의존하는 어린이의 모습 또한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세리와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루카 복음사가는 이 일화를 통해 바로 앞 예화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 전달하고자 한 의도를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말고 겸손하게 잘못을 인정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고 어린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바리사이와 세리를 대비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스스로 의롭다고 처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18,1) 이들을 훈계하는 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리사이는 초대를 받고서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이들과(루카 14,7-11 참조) 한 부류인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잔치에 초대받아 윗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에게 끝자리에 앉으라면서 하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14,11)이라는 말씀이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에서도 똑같이 나오는 것도(18,14 참조)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리사이에게 세리처럼 기도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사이에게 요청되는 자세는 어떤 것일까요? 루카 복음사가가 바로 앞 17장에서 전하는 ‘겸손하게 섬겨라’(17,7-10)는 예수님 말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7,10)라는 자세입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는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에게 큰 위로와 위안이 됩니다. 세리는 직업상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의로움, 곧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의로운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믿기 때문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년 5월 13일, 이창훈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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