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의 인물] 간음한 여인 요한 복음에 나오는 간음한 여인을 두고 ‘과연 이 부분이 처음부터 성경에 수록되어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자주 거론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가 분명 요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또 무슨 말이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미사의 말씀 전례 안에서도 공적으로 선포되고 있는 말씀인데, 그렇다면 이 말씀이 복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하고 반문하실 수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의 여러 필사본을 살펴보면, 382년 이전의 필사본들에는 간음한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빠져 있습니다. 후대에 첨가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여러 성서학자는 예로니모 성인이 라틴어로 번역하여 가톨릭교회에서 널리 사용하게 된 「불가타 성서」에 처음으로 간음한 여인의 이야기를 첨가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예로니모 성인은 복음서에 빠져 있던 내용을 왜 담았을까요? 예수님의 시선으로 본 간음한 여인 초대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다양한 윤리적 실천 규범을 지니고 있었지요. 특히 간음, 성범죄와 같은 성 윤리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하고 가혹한 기준을 적용했습니다.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세세한 목록의 보속을 모두 다 지켜야만 다시금 교회 공동체에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 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에게 죄를 묻지도, 죗값을 치르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마주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외적으로는 윤리적 삶의 실천과 보속을 지켜야 했음에도 내적으로는 참신앙과 거리가 먼 그들에게 간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허용될 수도 있다는 오해를 살 만한 소지가 적잖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본문 내용은 교회 공동체에서 필사본의 형태로 널리 읽혔던 말씀이었지만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몇몇 교부는 초대 교회가 이러한 연유로 간음한 여인에 관한 부분을 복음서에서 삭제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 부분이 요한 복음서의 말씀으로 읽히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이 역사적 사실로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에 예로니모 성인에 이르러 이 부분을 추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 부분을 드디어 정경의 본문으로 인정합니다. 복음서를 역사에 입각한 세세한 접근이 아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신앙을 바탕으로 저술한 복음사가들의 뜻을 다시금 새기며, 예수님의 시선과 모습에 더욱 집중해 봅니다. 간음한 여인의 죄를 예수님께 묻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시니 여느 때처럼 당신의 가르침을 듣고자 온 백성이 당신께 모여듭니다.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라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그곳에 끌고 옵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4-5) 그런데 여기에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간음은 분명 상대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여인만 붙잡혀 왔을 뿐 함께 죄를 지었을 남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당대에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낮았기에 여인만 붙잡혀 왔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유다의 간음죄는 생각보다 상당히 평등한 법이었습니다. 사실 율법에는‘사형’이라는 조항은 있어도 ‘사형 집행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간음한 경우에는 당사자인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돌을 던져 죽였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에제 16,40 참조). 이는 약혼한 이들부터 혼인한 이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유혹을 이겨내는 것보다 그 유혹의 기회를, 곧 죄의 기회 자체를 피하는 것을 중시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죄가 옮겨지지 않도록, 그 죄악을 피해 멀리 떨어질 수 있도록 돌을 던지는 방법을 선호하였습니다. 따라서 간음한 여인이 붙잡혀 왔다는 것은 적어도 이 여인이 약혼한 여인이라는 것이 성립됩니다(레위 20,10; 신명 22,22-25 참조). 또한 현장에서 붙잡혀 왔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이 현장에 둘이나 세 명의 목격자가 있었으며, 이들이 이 현장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신명 17,6; 19,15 참조). 이 조건이 성립될 때에만 간음죄가 성립되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말미암아 누명을 씌우는 것을 막으려는 최소한의 보호책이겠지요. 하지만 두세 명의 증인도 등장하지 않고, 여인에게 그 어떤 질문을 하거나 해명도 듣지 않습니다. 율법이 정한 규정과 조건에 따라 집행하면 되었지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굳이 예수님 앞에 이 여인을 끌고 와서 오직 예수님께만 질문합니다. 곧 이들의 관심은 간음한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함정에 빠뜨리고 고발할 구실을 얻으려는 것이었겠지요.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 완벽히 함정에 빠뜨렸다고 생각하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무언가에 사로잡혀 확신에 차 있다고 착각하거나 악한 마음에 빠져들었을 때, 나와 반대되는 것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자신의 원의만을 채우려는 우리의 모습이 이와 다르지는 않은지 생각해 봅니다. 단죄를 원하던 이들에게 답하시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답변을 하시더라도 어려움을 겪으실 수밖에 없는 위기의 상황입니다. 율법에 따라서 여인을 단죄하는 것이 당연한 대답이지만, 그러면 예수님께서 한결같이 가르치시고 보여 주셨던 죄의 용서와 자비, 그 사랑의 길과는 대척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용서를 거론하면 유다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원리이자 구원의 길인 율법과는 정면으로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원했던 바대로 될 것이고, 최악의 상황에서는 이 여인과 함께 돌로 처형당하시는 상황도 가능했습니다. 이 완벽해 보이는 덫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셔야 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땅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을까요? 그분께서 무엇을 쓰셨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와 설명이 있지만 어떠한 것도 명확하게 그 내용을 알려 주지는 못합니다. ‘쓰다’라는 단어는 흥미롭습니다. 이때는 일반적인 ‘쓰다’(γραφω, write)라는 단어가 아닌 무언가에 맞서는 의미의 ‘쓰다’(καταγραφω, write against)라는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죄명을 상세하게 쓰셨다.’는 설명도 볼 수 있지요. 어쨌든 그 정확한 내용은 모르더라도 예수님께서 적어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도에 맞서 무언가를 쓰시고 계셨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속해서 예수님께 답변을 요구합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예수님을 재촉하였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간음죄가 성립된 경우에는 그 현장을 목격한 증인들이 가장 먼저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에 이어 군중이 돌을 던지며 형이 집행되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율법대로 돌을 던지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을 부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이후에 그들의 행동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를 쓰십니다. 이때는 일반적인 의미의 ‘쓰다’(γραφω)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신을 바라보고 재촉했던 이들과는 한 걸음 떨어져 당신 자신의 역할로 돌아오십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저런 중죄에 비하면 나의 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돌을 던질 수도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수호하고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이들에게 이 말씀은 자신의 모습부터 겸손히 돌아보게 하는 말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나이 많은 이부터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리를 떠나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자신을 바라보게 했겠지요. 그녀를 단죄했던 이가 모두 다 떠나가고 이제 여인과 예수님만이 남았습니다. “여인아!”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여인을 당신께서 부르십니다. 증오와 분노, 경멸의 시선 속에서 돌을 들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수많은 이의 살벌한 모습이 그녀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어느 한 사람 변호나 위로해 주는 이 없이 철저하게 홀로 남겨져 있던 그녀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이 말씀과 시선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따듯하고 포근하게 느껴졌을까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8,11).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가 있으셔서 그러신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요. 반대로 어떤 죄를 지어도 단죄하지 않고 용서하신다는 말씀 또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도 용서해주시고 이를 뛰어넘는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우리에게 드러내 주십니다. 모든 것을 다 잃고 죽음을 기다리던 여인은 이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삶의 길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길이요,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길의 출발점이겠지요. “다시는 죄짓지 마라.”는 말씀은 당신 안으로 다시 돌아와 충실히 머무르라는 의미입니다. 그 희망과 기쁨을 체험한 여인은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여인을 대하시던 예수님의 마음과 시선을 묵상해 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늘 당신 안에 머물러 빛과 생명으로 향하는 여정이 새롭게 시작되기를 청합니다. * 최광희 마태오 - 서울대교구 신부. 가톨릭 청년성서모임을 담당하고 있다. 교황청립 그레고리오대학교 대학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였다. [경향잡지, 2018년 5월호, 최광희 마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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