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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아가, 노래들의 노래14: 오, 사랑!(아가 7,7)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3,740 추천수0

아가, 노래들의 노래 (14) 오, 사랑!(아가 7,7)

 

 

어떤 분이 지혜문학 과제로 아가에 대해 세 페이지를 쓰셨는데 거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 공부를 가르치시던 수녀님이 아가를 읽을 차례가 되자 아가는 너무 관능적인 책이어서 수녀로서 차마 못 다루겠다고 하시고 그냥 지나가셨답니다.” 무슨 뜻이었을까요? 이 수녀님은 아가의 뜻을 어느 정도 알아들으셨는데, 그걸 가르치시지는 못하겠다는 뜻이었을까요? 아니면 혹시, 아가를 너무 조금만 알아들으신 것은 아닐까요? 아가의 자구적 의미는 알아들었으되, 그 의미 안에 들어 있는 신학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처음 아가 입문을 소개할 때 두 달에 걸쳐 짚어 본 바와 같이, 사실 아가는 일차적으로 남녀의 성적 사랑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노래가 성경에 들어와 있는 것은 그 안에 신학이, 매우 성서적인 신학이 들어 있음을 전제합니다. 아가의 마지막 두 장에서는 그 두 면이 뚜렷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가 7장은 아가의 다른 부분보다도 더 관능적이고, 아가 8장은 가장 신학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7장을 읽고 나면 반드시 다음 달에 8장도 읽으셔야 합니다. 제가 7장에 대해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8장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술람밋이여”(7,1)

 

일단 7,1은 화자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고 단락 구분도 좀 모호하고 번역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래도 7,2-11에 묘사된 여인의 춤을 도입하는 것이라는 정도는 말할 수 있겠습니다. “두 줄 윤무”라고 번역된 구절은 사실 번역이 어렵고 어떤 춤을 말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춤은 춤입니다. ‘술람밋’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인은 춤을 추고, 사람들은 그 여인을 바라봅니다.

 

‘술람밋’이 무슨 뜻인지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솔로몬’의 여성형이라고 보기도 하고, ‘수넴 여자’라는 뜻으로 여기기도 하고, ‘예루살렘 사람’을 뜻한다는 주장도 있고, 히브리어 ‘샬롬’ 즉 ‘평화’와 같은 어근에서 나와서 ‘평화를 찾은 여인’을 뜻한다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8,10 참조). 그 중에서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리면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됩니다. 아직까지 그 의미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해야 솔직한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을 다 밝혀 알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7장 1절, 한 절 안에도 도대체 몇 가지의 문제가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이 정도로 희미하게 남겨 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술람밋은 아가의 주인공인 여인입니다. 솔로몬의 왕비로서 예루살렘으로 인도되는 공주로 묘사되든, 목자들의 천막에서 연인을 찾는 시골 아가씨로 묘사되든, 늘 같은 인물인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7,1에서 이 여인에게 청하는 것은 “우리가 그대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7,2-10에서 그 여인이 춤추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오, 사랑, 환희의 여인이여!”(7,7)

 

아가에서 가장 관능적인 부분이라고 했지요. 나체 묘사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여인의 허벅지, 배, 배꼽, 젖가슴은 형체를 직접 알아볼 수 있도록 드러나 있습니다. 바라보는 이가 그 곡선을 그대로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리고 4,1-7과 6,4-7에서 여인의 모습을 표현할 때에는 주로 얼굴 묘사에 집중했기 때문에 여인의 곡선 전체를 제시하지 않았는데, 7장에서는 발끝에서 시작해서 머리끝까지 묘사합니다. 몸 전체를 그려 보이는 것입니다. 게다가 춤을 추고 있습니다. 몸 전체가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배와 허리를 보여 주면서 말입니다. 이제부터 할 설명을 들으면서 무슨 저런 소리를 하느냐고 하실까 봐 미리 저의 결론을 말씀드리면, 여기에서 묘사하는 것은 여인의 몸이 그 기본 구조부터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 덩어리’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 언젠가 한번 썼던 표현이지요.

 

귀족 집 따님의 어여쁜 발(7,2) - 묘사의 첫 마디에서 “오, 귀족 집 따님이여”라고 못을 박아 두는 것은, 춤을 추는 여인을 그야말로 관능적으로 묘사한다 해도 이 여인이 천박한 여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기 위해서입니다. 이제부터 묘사할 것은 고귀한 사랑의 주체이며 대상인 여인이 지니는 티 없이 아름다운 본성이지, 값싸게 몸을 팔려고 내놓은 여인의 광고가 아닙니다.

 

예술가의 작품인 둥근 허벅지(7,2) - 묘사가 발부터 올라가고 있으니까 우리도 그 방향으로 말한다면, 다리 윗부분에서 허리까지의 곡선을 말합니다. 대중 라틴 말 성경은 (즉 성 예로니모는) 허벅지라고 번역하지 않고 아예 여성의 음부라고 번역했습니다. 일단은 부정확한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단어가 복수형(정확히는 쌍수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허벅지의 곡선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성이 성적 사랑을 통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는 가능성은 명백히 제시됩니다. 보석 세공을 하는 예술가가 깎아 만든 목걸이처럼 완벽한 곡선입니다. 더구나 그 곡선을 보여 주며 춤추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성성이 남김없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향긋한 술이 담긴 배꼽(7,3) - 허리 아래의 곡선을 이야기한 다음 이제는 그 중심으로 옵니다. 배꼽은 탯줄과 연결되고 자궁과 연결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배꼽 역시 손톱만한 실제 배꼽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구나 술이 담긴 동그란 잔은 사랑으로 연인을 취하게 만들 수 있는 여인의 몸을 말합니다. 실상 아가에서 포도주는 사랑의 상징입니다. 1,2에서 이미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하다고 말했고(1,4; 4,10 참조), 2,4에서 연인은 연회장으로,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술의 방으로 여인을 데려갑니다. 결정적으로 5,1에서 연인은 “나의 누이 나의 신부”의 사랑을 향유하는 것을 “내 포도주를 마신다”고 표현하고, 친구들은 그에게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고 화답합니다. 다시 말하면, 배꼽에 담긴 향긋한 술은 여인이 그 몸에 담고 있는 사랑의 능력, 사랑의 가능성입니다. 여인의 배꼽에서 “향긋한 술이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 사랑이 언제나 끊임없이 샘솟으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밀 더미 같은 배(7,3) - 밀 더미를 눈앞에 떠올리다 보면 갑자기 아가가 싱거워질 것입니다. 시각적 상상을 덮으십시오. 중요한 것은 밀이 생명의 양식이고 그래서 생명, 풍요, 다산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가 밀 더미 같다는 것은 출산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슴 같은 젖가슴(7,4) - 8절에서는 젖가슴이 야자 송이 같다는 표현도 사용됩니다. 배와 마찬가지로 젖가슴도 물론 풍요, 다산, 출산과 연결됩니다. 그 젖가슴이 젊은 사슴처럼 가볍게 움직입니다.

 

 

“나는 … 포도주”(7,10)

 

물론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운 것이라, 7장의 와스프(아랍 문학의 한 유형으로 보통 혼인 예식을 배경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신체를 묘사한다; 2012년 12월호 참조)에도 그 여인의 아름다움과 매력뿐 아니라 강한 자기의식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8장 끝부분에서 다루겠습니다. 7장에서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여인의 매력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과반수는 여성이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자신의 몸을 바라보십시오. 외모가 어떻든 여성의 몸은 아름답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에 색깔 하나하나를 심사숙고하여 선택하듯이, 조각가가 자칫 흠집이 생길세라 조심스럽게 세부를 완성하듯이, 그 몸의 선 하나하나는 모두 사랑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상대방에게 사랑을 향유하도록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완성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아가의 주인공은 “나는 나의 연인에게 곧바로 흘러가는, 잠자는 이들의 입술로 흘러드는 포도주”(7,10)라고 말합니다. ‘나는 사랑’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성성이라는 것, 그것은 모든 차원을 포괄하는 사랑의 가능성일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여성이 아가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가를 처음 읽었을 때 정결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제가 봉헌한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결은 사랑의 포기가 아니라 그 사랑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유보 없이 실현하도록 모든 이를 향하여 열어 놓는 것입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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