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노래들의 노래 (17) 아가, 나의 이야기 1 이달에 실을 글은 제가 2009년 2월에 썼던 편지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아가에 대해서 600쪽 분량의 주석서를 쓰신, 제 논문을 지도하신 신부님입니다. 2009년 1월 31일에 저는 도망치듯 로마를 떠나 한국에 왔습니다. 거기에 더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왔을 때에는 거의 죽어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2월 휴가 중에 저는 이탈리아어를 영어로 번역한 신부님의 주석서 교정을 보았습니다. 영어 교정이 아니라 주로 성경 장절 표기와 각주 표기를 확인하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아가를 다시 읽고 나서, 거의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던 신부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는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으셔야 합니다. 이 편지 안에 제가 그때까지 살았던 삶 전체와, 그 삶이 전복되기 시작하는 과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의 아가 해석 여성으로서 아가를 읽는다는 것은, 이 책이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가는 매우 깊이 있는 책이기에 저로 하여금 사랑의 ‘역설’을, 저의 ‘역설’을 이해하게 합니다. 아가 주석서는 그것을 체계적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로써 저에게도 모순으로 보였던 제 마음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가를 세 번 읽었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는 2004년. 이 책은 저에게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성(性)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소홀히 해왔던 면이었습니다. 흔히 인간은(예를 들어 어린이) 사랑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절반일 뿐입니다. 인간, 특히 여성에게는 사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닫힌 정원”(4,12)은 “정원의 샘”(4,15)이기도 한 것입니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살아 있기 위해, 생명을 주기 위해 말입니다. 아가는 저에게 그것들이 제 본성에 속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죽지 않기 위해 닫힌 채로 있던 저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누군가 저와 달리 생각하거나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즉시 서로 이해하려는, 이해를 시키려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정말로 사랑은 아름다우면서도 두려운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너무 컸고, 그래서 저는 평온하게 머물기를 선호했습니다. 저는 계속 벽을 쌓아 갔고, 그 안에서 계속 살았습니다. 2006년에 저는 다시 아가를 읽었습니다. 수도회 연례 피정을 위해 아가를 택했는데, 그것은 바로 제가 아직도 닫혀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가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2,10.13)라고 말하며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주는 것이 생명을 찾고 자신을 실현하는 길이기에, 자신을 닫는다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생명을 잃지 않기 위한 올바른 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올해(2009년) 저는 아가를 다시 한 번 읽으려고 했습니다. 아가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모험을 시작하도록 도와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전에 말씀드린 대로,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기대하지 않은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자신을 열도록 강요할 수도 없고 닫도록 강요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주로 그 두 번째 면, 제가 쌓은 벽 안에 갇혀서 결국 죽고 만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첫 번째 면이 저에게 더 중요했습니다.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는 아무도 사랑에 법칙을 부과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도, 저 자신도 말입니다. 마음의 것들은 자연스럽게 사랑이 원할 때 이루어져야 합니다(2,7 등 참조). 이렇게 저는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강제로 자신을 닫는 것이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강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을 하지 못한다면, 한편으로는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저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때가 되어야, 포도나무에 꽃이 피어야(2,15 참조)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가를 읽으면서 저는 성탄을, 무방비한 아기를, 그 취약함을 생각합니다. 그 약함은 온갖 위험에 내맡겨져 있으면서도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는 진정한 사랑의 표지입니다.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하여 죽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반면 누군가(저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도 위험한 모험을 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해 근본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의 두려움입니다. 실상 아가의 여인은 자신에 대한 강한 의식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럼없이 내줄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에게, “정녕 그대는 아름답구려”(4,1)라고 말하는 데 이르러야 하고, 자신을 내주는 가치를 인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체의 성숙뿐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 이러한 확신, 성숙한 인격이 사랑을 위한 조건일 것입니다(‘거리’의 모티브, 8,14). 성탄과 비교해 본다면, 그 아기는 약했지만 육화는 지극히 분명한 의식을 요구하는 결정이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갈라 4,4). 아직 더 생각해야 할 주제 하나는, “내 위에 걸린 그 깃발은 ‘사랑’”(2,4), “나와 함께 레바논에서”(4,8), “자기 연인에게 몸을 기댄 채”(8,5)입니다. 이것이 해답일 것입니다. 아직 묵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저는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체험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아가를 세 번 읽고 나서, 저는 이 책과 마찬가지로 역설적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충만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내주는 것, 이것이 저의 본성에 폭력을 가하지 않는, 제가 가야 할 길일 것입니다. 무방비 상태이면서도 마음을 정복할 줄 아시는 저의 연인이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언젠가는 “나는 그의 눈에서 평화를 발견한 여인이 되었지요”(8,10 참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 편지의 답장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평소에 속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던 제가, 떠나서는 이런 편지를 써 보냈으니 너무 놀라셨겠지요. 신부님은 “내가 너를 아직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제 글이 아니라서 허락 없이 여기에 실으면 안 될 것 같아 한 구절만 인용합니다. 아가에 대해 많이 연구하셨던 신부님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솔직하게 쓴 이 두 페이지”가 “아가에 대한 가장 진실한 해석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며, 제 편지를 보존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음 달에는 이 편지를 쓰고 1년 4개월 후인 2010년 6월에, 제 삶의 전복이 한창 이루어지던 때에 다시 썼던 편지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 안소근 수녀는 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 소속으로 로마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와 가톨릭교리신학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성 도미니코 말씀의 은사》,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 등 여러 책을 옮겼다. [성서와 함께, 2013년 5월호(통권 446호), 안소근 실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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