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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7: 나는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3,694 추천수0

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7) 나는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자신을 유다인이라고 부르면서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며(2,17) …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2,22; 필자 직역)

 

유다인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민족이었다. 그들에게 기도는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 삶 전체였다. 그러나 그들은 특권 의식 때문에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죄’에 빠지게 된다. 바오로는 2,1-3,20에서 당대의 경건한 유다인의 죄를 지적하며 그들이 하느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돌아보도록 초대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의 삶’을 살지만 죄를 짓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부재한 삶’을 산다.

 

 

문맥 보기

 

바오로는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아무도 “하느님의 진노”(1,18)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2,1-11 참조). 바오로 시대의 유다인은 그들이 받은 특권인 율법(2,12-24 참조), 할례(2,25-29 참조), 하느님의 약속(3,1-8 참조)이 미래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보호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바오로는 이 특권도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느님 진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다고 경고하며,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 죄의 길로 향하고 있다고 선언한다(3,9-20 참조).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바오로가 1,18-32에서 지적하는 죄들을 보면서 유다인은 “맞다, 저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 당연하지!”라고 손뼉을 쳤다. 바오로는 철저히 율법을 지키던 바리사이였기에 동족 유다인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거울 보듯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만심까지 느끼는 유다인의 죄, 모든 유다인이 아니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경건한 유다인의 죄를 비난한다.

 

2,1-11에서 바오로는 남을 심판하면서 자기도 똑같은 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비난한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남의 인생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남과 비교하느라 자기의 고유한 은사와 소명에 집중하는 것도 잊어 하느님 앞에서 해이한 삶을 산다. 이 “남을 심판하는 사람”(1절)이 ‘유다인’이라는 것은 9-10절에서 언급된다. 바오로가 이곳에서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라는 표현을 되풀이하는 이유는 하느님께 선택된 유다인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는, 하느님은 선택한 민족에게 끝까지 복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여긴 자만심에 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윤리적 행위, 인간의 선과 악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잊었다(시편 11,7 참조). 그들도 이방인과 같이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 자기 삶을 들고 가서 사랑의 셈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11절)에 유다인이나 이방인 모두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다.

 

 

율법을 듣는 이가 의로운 것은 아니라네

 

2,12-16에서 바오로는 경건한 유다인의 삶의 안전한 토대로 삼는 ‘율법’을 건드린다. 바오로 시대에 유다인은 율법을 받아들이고 연구하는 것도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여겼다. 바오로는 그 점을 공격하였다. 12-16에서 그것을 이론적으로 논증하고 17-24에서 가상의 대화 상대자에게 직접 질문하면서 반론을 제기한다. 여기서 율법(노모스, νομοs)은 토라인 오경을 가리킨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하느님의 뜻과 그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모델이 담겨 있다고 여겼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오로가 ‘율법을 듣는 자’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이다(13절 참조). 유다인은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를 매일 기도로 바치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들은 율법의 규정과 법규를 실천해야 하는데(신명 4,5-6; 야고 1,22 참조) 그것을 저버렸다.

 

이어서 바오로는 이 주제를 더 보완하기 위해 율법을 모르더라도 본능적으로 율법의 총체적 의미를 유다인보다 더 잘 지키는 이방인이 있다고 상기시킨다(14-15절 참조).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덕이 있고 자유로운 인간은 마치 자신이 법 자체인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니코마코스 윤리학, IV.8)고 말한다. 율법을 모르지만 율법에 기록된 정신을 실천할 내적 빛과 힘을 지닌 자유로운 영혼, ‘양심의 소리’를 듣고 율법의 궁극적 목표인 사랑(로마 13,8-10; 예레 31,33 참조)을 실천하는 진지한 영혼이 세상에 존재한다. 유다인은 이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나는 하느님을 자랑하렵니다

 

2,17-24에서 바오로는 유다인이 자랑으로 삼는 특권을 구체적으로 다루며 그들의 죄를 비난한다. ‘자랑하다’로 번역된 동사 카우카오마이(καυχαομαι)는 문맥에 따라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다, 뽐내다, 또는 누구에게 영광을 드리거나 기뻐하다’ 등으로 해석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하신 행위를 ‘자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의미에서 기도 용어로 종종 사용된다. “그런 자랑은 신뢰, 기쁨과 감사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역설적인 것은 그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은 자기 자신한테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신앙 고백이 된다”(R. 불트만). 성경에서 자기 자랑, 즉 자기를 찬미하는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적 근거는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더는 창조주요 구속주인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이다(예레 9,23 이하 참조).

 

바오로는 ‘하느님을 자랑하는 것’을 비난하지 않고 다만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자랑하는 경건한 유다인의 주장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느님이 삶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이 왜 그분의 뜻이 담긴 율법은 실천하지 않는가? 그는 “율법을 자랑하면서”(23절) 율법을 어겨 하느님의 이름이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 받게 하는 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4절 참조). 바오로는 24절에서 이사야 시대와 그의 시대의 비슷한 점을 발견했기에 칠십인역 이사 52,5을 인용한다(에제 36,20-23 참조). 과거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자신을 보호하리라고 자만하다가 유배되자 이방인은 그런 초라한 민족을 선택한 하느님을 조롱했다. 어떤 유다인의 탈선도 이방인이 그런 자질 없는 민족을 선택하신 하느님을 비방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바오로의 논리로 궁지에 몰린 경건한 유다인은 드디어 ‘할례’를 생각해 낸다(2,25-29 참조). 왜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공격하는가? 우리는 최소한 할례 받으라는 율법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는가? 그러나 바오로는 다시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유다인도 할례 받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외적 할례를 받은 유다인의 삶이 할례받지 않은 사람보다 더 흠 없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바오로는 당시 경건한 유다인의 ‘죄’에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사도로서 깊은 고통을 느끼며 그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온갖 설득 기술을 사용한다. 이 본문은 바오로의 기도에 들어 있는 두 가지 뿌리를 성찰하게 한다. “하느님의 영광, 그리스도의 사랑 내지 그리스도의 인격을 바라보는 감탄의 시선과 자기의 죄와 고통을 통해 세상과 형제들을 바라보는 고결한 시선이 그것이다”(장 라 프랑스). 이천 년 전에 바오로가 지적한 경건한 유다인의 ‘죄’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기 자랑을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여기는 시대에 사는 우리의 근본 문제는 기도할 때 쉽게 죄의식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다. 로마 2,1-3,20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참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진정한 죄의식을 갖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주님, 제가 헤아릴 수 있는 죄보다 제 마음에 감춰진 죄가 무엇인지 더욱 잘 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 임숙희 님은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로마서의 바오로 기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의 신앙과 영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7월호(통권 436호), 임숙희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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