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9) 우리 조상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불신으로 하느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로마 4,2.20). 문맥 보기 바오로는 3,21-31에서 인간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설명한 후 4,1-25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인물로 아브라함을 소개한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화되었다(4,1-8 참조). 그것은 할례(4,9-12 참조)나 율법(4,13-17 참조)과 상관이 없다. 그의 우대한 믿음 때문에 그는 우리 모두에게 믿음의 모델이 된다(4,18-25 참조). 바오로는 이런 아브라함의 인간상을 통해, 신앙을 통한 의화가 성경에 드러난 종교 체험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지닌 믿음의 자세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다. 창세 15,6과 아브라함 4,2은 1절의 시작 질문과 함께 4장 전체에 걸쳐 전개되는 선조 아브라함 이야기의 입문에 해당한다. 3,27의 전반부(“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와 연결되면서 3,21-31의 주제를 계속 진행한다. 바오로는 먼저 아브라함이 자신의 행위로 의롭게 여겨진다는 것을 문제시한다. 그런 사고는 몇 가지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자기 힘으로 그렇게 되었다면 획득한 결과를 모두 자신에게 귀속할 권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랑은 ‘하느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다.’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높은 자리에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3,27 참조). 아브라함이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는 생각은 성경 말씀의 힘에 의해 배제된다. 바오로가 아브라함을 모델로 택한 것은 당대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에게 지니고 있던 호감 외에 다른 이유가 있다. 당시 바오로는 회당과 갈등을 겪으면서 누가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손인지 정의를 내려야 할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할례나 율법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화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가장 권위 있는 증언인 성경 첫머리부터 시작해야 했다. 창세 15,6은 신앙과 의화와 관련된 성경의 첫 구절이다. 바오로는 4장 전체에 걸쳐서 창세 15,6을 토대로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 대해 세심하게 작업을 한다. 이 작업으로 바오로가 증명하려는 것은 이방인을 아브라함의 가족에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신앙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바오로의 목적은, 인간은 믿음으로 의화된다는 3,21-22의 내용을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증명하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창세 15,6을 해석할 때 창세 22장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행위와 충실함의 길을 통해 그를 부르셨다고 해석한다(느헤 9,7-8; 2에즈 19,7-8; 집회 44,19-21 참조). 그러나 바오로는 창세 15,6을 다르게 해석한다. 바오로가 보기에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반 사례가 될 수 없다. 바오로는 의화가 할례와 율법을 지키는 것과 상관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성경에서 근거를 찾는다. 창세 15,6은 신앙과 의화의 관계를 설정하는 성경의 첫 구절이다. 믿음으로 더욱 굳세어져 영광을 바치다 아브라함이 할례(4,9-12 참조)나 율법(4,13-17 참조)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제를 마치면서 마침내 4,18-25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던 상황으로 돌아간다. 바오로는 아브라함이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 영광을 바쳤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4,20 참조). 아브라함의 믿음의 본질은 하느님의 약속을 불신하지 않는 데 있다. 그리스어 문장을 보면 4,20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제일 처음에 나오는데, 그의 믿음이 하느님의 약속에 바탕을 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결코 순간의 주저함도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하신 약속과 관련하여 불신의 태도가 깊게 자리 잡는 것을 피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약속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 정신 나간 약속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성으로 믿을 수 없는 ‘하느님의 정신 나감’에 자신을 내맡긴다. 믿음은 아무 일 없이 인간이 스스로 결단하거나 인간 내부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정확한 개념에 바탕을 둔다. 하느님은 생명을 원하시는 분이며(로마 4,17 참조), 믿음을 통해 살게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에서 그의 믿음이 흘러나온다. 그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불가능하게 보이지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더욱 굳세어졌다. 여기서 믿음은 ‘굳세어진 것’의 수단이나 원인이라기보다 목적일 것이다. 점점 성장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 그 자체였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한 것은 하느님의 약속과 겉으로 보이는 것 사이의 갈등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방해를 극복한 데서 비롯된다. 아브라함은 굳세어지는 믿음으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이 말은 ‘영광을 바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바친다’는 아브라함처럼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하는 사람의 자세를 가리킨다. 인간은 자기만족에 빠질 때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지 않는다. 자신의 삶의 원천에서 서서히 멀어져 간다. 20절에서 ‘영광을 바친다’는 말은 이런 일반적 의미보다 ‘믿음’을 더 깊게 표현하고 불신앙과 반대로 기능한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약속을 끝까지 완성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약속 앞에서 불신에 빠지지 않고 믿음이 굳세어져 하느님께 영광을 바친다. 이것이 바로 그가 ‘의로움으로 인정받은 이유이다’(창세 15,6 참조). 이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 아브라함의 의화의 모든 비밀이 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인간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부르심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느님께 자신을 바치는 행위, 죽은 이들에게 삶을 선물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남김없이 내주는 것이다. 믿음은 자신이 결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진실한 신호에 응답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세는 바로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기에 그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4,12), 모든 신앙인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바오로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아브라함과 믿는 이들이 동등하다면 믿음을 통해서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느님이 죽음의 지배를 받는 곳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에 바탕을 둔다. 그의 믿음은 죽은 이들 사이에서 일으켜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매우 가깝다(4,24-25 참조). 바오로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교부는 로마 4장에 소개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믿음 그 자체가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바오로는 믿는 사람이 행한 사람보다 더 크게 역사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을 무익한 것으로 여기고 믿음 안에서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상황을 떠올리고 아브라함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의 태도를 오랫동안 바라본다면 우리도 아브라함을 닮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항상 하느님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조바심을 내는 우리에게 믿음 그 자체가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가르친다. “아브라함, 당신은 우리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당신의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본받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 임숙희 님은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로마서의 바오로 기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의 신앙과 영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9월호(통권 438호), 임숙희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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