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서 기도를 배우다 (19) 차라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으면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기도하곤 했습니다”(로마 9,3: 필자 직역). “형제 여러분, 내 마음의 소원과 그들의 구원을 위한 나의 기도를 하느님을 향해 바칩니다”(로마 10,1: 필자 직역). 문맥 보기 1-8장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지 소개한 후, 9-11장에서는 그것을 거부한 동족 이스라엘이 구원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깊이 성찰한다. 9-11장은 세 단계로 전개되는데, 각 단계는 하나의 주제 구절을 가지고 있다. 먼저 입문에서는 이스라엘이 현재 처한 상황의 수수께끼를 다루고(9,1-5 참조) 세 개의 주요 단락으로 나누어 이 문제에 답변한다(9,6-11,32 참조). 하느님의 부르심은 역설적이며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이 하느님 구원 계획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9,6-29 참조: 주제 구절 9,6). 이 상황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 곧 구원을 가져오시는 분을 믿기보다 율법을 선호했기 때문에 생겨났다(9,30-10,21 참조: 주제 구절 10,4).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하나의 도구로 삼으신 하느님께서는 미래에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11,1-32 참조: 주제 구절 11,1ㄱ). 바오로는 결론으로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를 찬미하는 영광송을 바친다(11,33-36 참조). 이와 같이 9-11장에서 우리는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중재자 바오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9,3; 10,1 참조). 바오로, 모세보다 더 위대한 중재자 9,3은 그리스어 문장에서 습관적 기도 행위를 나타내는 동사 ‘기도하곤 했다’(에우코멘 ηὐχόμην)로 시작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려는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자기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며, 그의 형제 히브리인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차라리 자신이 ‘저주(아나테마 ἀνάθεμα)’ 받기를 바란다. 동족을 위해 자기 생명까지 주려는 바오로의 극단적 자세에서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주셨던 그리스도가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너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서 다른 사람을 구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가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제 스승이자 주님에게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사람은 잃고 그것을 잃은 사람은 얻을 것’(마태 16,25; 마르 8,35 참조)임을 배웠습니다”(오리게네스). 바오로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을 동족을 위한 중재 기도로 표현한다. 그는 충실한 유다인으로서 유다 전통에서 물려받은 중재 기도에 대해 깊은 감각을 지녔는데, 유다인들은 중재를 ‘의인들의 기도’로 간주하였다(야고 5,16; 1베드 3,12 참조). 9,3에서 드러나는 바오로의 자세는 백성을 위한 위대한 중재자였던 조상 모세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중재자로서 모세가 보인 모범은 탈출 32,30-32에 잘 나와 있다. 그러나 바오로는 모세와 비슷한 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지만,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인물, 새로운 모세라 할 수 있다. 그는 모세처럼 하느님의 뒷모습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2코린 3,8.17에서 말하듯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다. 모세는 그의 백성에게 외적 규정인 율법을 주지만, 바오로는 복음 곧 ‘새로운 피조물’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내적 율법을 주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백성의 죄를 사하시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행동을 포함하여 그들의 운명이 적혀 있는 책에서 자신의 이름이 삭제되기를 기도했다(탈출 32,32 참조). 그에 비해 바오로는 형제들의 구원이라는 선(善)을 위해 자기 삶 자체인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나가 저주받기를 청한다. ‘하느님 앞에서’ 기도합니다 바오로는 이미 9,1-3에서 표현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그의 근심을 10,1에서 다시 표현한다. 그런데 앞에서보다 더욱 부드러운 어조를 취한다. 바오로의 중재 기도는 ‘소원(에우도키아 εὐδοκία)’과 ‘기도(데에시스 δέησις)’라는 두 단어에서 드러나는데, 그는 두 가지 기도 자세를 강조한다. 바오로는 ‘소원’을 마음에서 원하는 것과 사랑에서 솟아나오는 인간적 ‘갈망’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필리 1,15-16 참조). 이 방식으로 ‘소원’은 마음의 끊임없는 고통(9,2 참조)과 결합된다. 나아가 칠십인역에서는 ‘에우도키아’가 인간의 갈망만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 마음에 들기 때문에 바로 그 결정에 맞게 일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원’과 ‘기도’가 나란히 놓인 것은 바오로 삶의 특별한 방식, 구체적으로 그가 어떻게 하느님께 탄원 기도를 바치는지 보여 준다. 바오로는 동족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 그는 자신의 갈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 보시기에 적절한 때에 올바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기를 탄원한다.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하느님을 향하여(프로스 톤테온 πρὸς τὸν θεὸν)’라는 표현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의 하느님 현존 체험과 관련한다.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일상에서 그분의 힘을 느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그분의 영을 통해 그들 안에 현존하시는 분, 곧 하느님과 일치한다. ‘하느님을 향하여’는 바오로의 삶을 요약하는 팻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계시하시어 자신을 구원하셨다는 특별한 하느님 체험 덕분에 항상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의 눈앞에서’ 살아간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1테살 1,3; 3,9; 1코린 1,29; 2코린 2,17; 12,19 참조). 그에게 진정한 사도직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시간과 공간에서 육화하는 것이다.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바오로는 10,1에서 ‘그들을 위하여(휘페르 아우톤 ὑπὲρ αὐτῶν)’ 바치는 중재 기도의 목적이 동족의 ‘구원’이라고 소개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의 도구가 되도록 선택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구원 계획의 성취에 응답하는 데 실패하였다. 바오로는 복음 선포라는 자신의 사도직과 관련한 문제라기보다 자신의 사사로운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그들의 ‘구원’을 걱정한다. 어떻게 그런 자세가 가능할까? 사도는 현재 동족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기 전에 자신이 살았던 과거를 환히 보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과거에 그랬듯 동족도 하느님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지만 이 열정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통해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충실한 유다인이 지니는 삶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난 후에, 그리고 수십 년간 선교 활동과 성찰을 하면서 그분을 계속 만나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였다. 이 체험으로 바오로는 동족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도록 기도하게 하는 동기를 갖게 되었다. 바오로의 이런 중재 기도는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는 것이다(2코린 1,10 참조). 이 기도에 담긴 바오로의 사고를 그가 지닌 종말론적 전망과 연결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로마 5,9.10; 8,24; 13,11 참조). 지금 바오로는 11,25-26에서 말할 것을 미리 보여 준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를 바칠 때 지금 당장, 또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그것을 보게 해 달라고 청하지 않는다. 구세사에서 보이는 하느님 뜻의 신비에 맡겨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9,6ㄴ-29 참조). 이런 바오로의 기도 자세는 역사에서 하느님의 주권과 그분의 충실함에 대한 체험에서 비롯한다. 그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모든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계속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기도를 통해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친다. 자기 목숨을 거는 중재 기도는 한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바오로처럼 평생 ‘하느님을 향해’ 살아온 사람의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 임숙희 님은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로마서의 바오로 기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회의 신앙과 영성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며 글쓰기와 강의를 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임숙희 레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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