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영성 (1) 종교 생활에도 등급이 있다고요? “교형자매 여러분! 영성 생활, 신심 생활, 신앙생활 중 어느 것이 가장 고차원일까요?” 가끔 이곳저곳 성당에 가서 특강을 할 기회가 있을 때, 신자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대부분 그중에 영성 생활이 가장 고차원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정답은 ‘똑같다’이다. 신자들은 다양한 형태로 표현된 종교 생활에 왜 등급이 있다고 생각할까? 신앙생활은 신심 활동보다 내공이 적은 종교 생활 같다(?) 성당에 다니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있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성당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행위를 총칭하여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에는 주일 미사만 겨우 참석하는 모습도 있고, 매일미사뿐 아니라 각종 전례 행사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모습도 있다. 또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며 성당에 다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여 성당에서 희생하며 봉사하기도 한다. 성당에서 일어나는 이런 형태는 주로 외적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내면의 깊은 모습이 없다고 속단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신자는 신앙생활을 왠지 내공이 적은 차원의 종교 생활이라고 단정하는 것 같다. 한편 신자들이 성당에서 표면적 종교 생활을 하다 보면 더는 외적 모습에만 머물지 않고 더욱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기도의 실천을 접하게 된다. 그들은 성당에 다양한 형태의 기도를 바치는 단체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를 실천하는 단체를 총칭하여 보통 ‘신심 단체’라고 일컫는다. 신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를 실천하면서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행위를 신심 생활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많은 신자는 신앙생활보다 신심 생활이 더 높은 등급의 내적 생활이라고 여기게 된다. 21세기 들어 여기저기에서 사용하기에 이른 ‘영성 생활’이라는 말 이렇게 신앙생활과 신심 생활이란 용어를 사용하던 한국 가톨릭교회에 언제부터인가 영성 생활이라는 용어가 출현하였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교회에서 가끔씩 언급되던 영성(靈性, spirituality)이라는 단어를 21세기에 들어서는 교회뿐 아니라 일반 사회의 이곳저곳에서,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영성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지 않거나 추상적인 것과 관련지어 생각하였다. 교회의 신자들은 초자연적 질서나 하느님과 관련된 비상한 행위를 일컬어 영성 생활이라고 여기고, 영성 생활을 신앙생활이나 신심 생활보다 더 고차원급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사실 교회에서는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이라는 단어를 학문 용어로 오랫동안 사용하였다. 2천 년의 교회 전통에서 영성가들은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열망을 신비 생활이라는 여정으로 묘사하였다. 수도자들은 일정한 형태의 극기와 덕행 실천의 수련 과정을 수덕 생활로 묘사하였다. 어떤 면에서는 수덕 생활과 신비 생활이 신자들의 영적 여정을 설명하는 데 훨씬 명확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역사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고, 이단의 징후를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20세기에 들어서 교회에서는 이 용어들을 영성 생활이라는 한 단어로 통합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또 다른 모호함을 만들었고, 신자들에게 영성이라는 개념을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가톨릭 영성 생활에도 여러 종교의 수행 방법이 스며들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주변의 다양한 분위기에 따라 영성 생활의 정체성을 혼동한다고 볼 수 있다. 몇 해 전에 한국 가톨릭 신자들이 성당을 찾는 이유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중에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에 다닌다는 응답이 90%에 달하였다. 게다가 요즈음 한국 사회도 심리적 안정을 추구하면서 심리 상담 등을 적극적으로 받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인간 내면의 정신세계를 다루는 심리학의 연구 결과가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내적 생활을 포함하는 영성 생활에 대해서도 심리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심리학의 한 분야로 축소하여 인식하게 되었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심리적 안정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심리주의가 마치 영성 생활을 대변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한국에는 많은 종교와 종파가 존재한다.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던 여러 나라의 종교 지도자들이 한국을 극찬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 몇백 개의 종교와 종파가 있는데도 큰 불상사 없이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 그 이유였다. 하기야 외국은 같은 종교라 하더라도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무기를 겨누며 유혈 사태까지 일으키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그에 비해 한국에서는 많은 종교가 대승적 차원에서 교류하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분위기가 연출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한국에는 종교가 단 하나밖에 없는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즉 어떤 종교든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 예외 없이 무속 신앙의 영향을 깊이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종교가 혼합주의 모습을 갖게 된다. 가톨릭 영성 생활에도 여러 종교의 수행 방법이 스며들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도 혼합주의 관점에서 다른 종교의 내적 생활을 가톨릭의 영성 생활과 혼동하여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거나 묵인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포함된 잘못된 영성 생활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영성 생활에는 다양한 특성의 영적 여정이 있다(?) 가톨릭교회 밖에서 영향을 준 잘못된 영성 생활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잘못된 부분이 무엇인지 식별하기가 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잘못 생각하여 나타난 영성 생활이 더 큰 문제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깨닫기도 어려워서 잘못된 부분을 식별하여 교정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요즈음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경계해야 할 관점은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주제에 따른 영성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소식지를 살펴보면 소위 ‘OO영성’ 강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영성 강좌는 교회의 전통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거나 때로는 교회에서 자주 통용되는 주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이 강좌에서 제시하는 영성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다가간다. 그러나 이렇게 전문주의의 모습을 띤 영성 생활은 각각 구별되는 다양한 특성의 영적 여정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1코린 1,13)라고 하면서 코린토 신자들을 책망한 적이 있다. 사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한 분이시고 우리가 전해야 하는 복음도 하나이듯,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할 영성 생활도 하나이다. 우리가 자칫 긴장을 늦춘다면 여러 가지 영성 생활이 있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영성 생활이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ㄴ; 참조 레위 11,44ㄱ.45ㄴ; 20,26ㄱ). 구약성경의 레위기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후 하느님의 명을 따라 만남의 천막을 만든 모세가, 바로 그 성소(聖所)에서 하느님께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규칙과 법규들을 듣는 이야기로 꾸며진다. 레위기가 들려주는 중요한 주네는 성성(聖性)에 대한 부르심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거룩함으로 부르신다. 비록 지금 우리가 미천한 상태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거룩함 자체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할 소명을 받들어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게 되기를 이미 구약성경 시대부터 바라셨을 뿐 아니라, 신약성경 시대에도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계속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하느님을 닮으라고 강조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의 영성 생활은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을 만나 뵙기 위해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정은 인간 영혼이 내적으로 발전 단계를 거쳐 마침내 주님의 은총을 통하여 초자연적 질서에 다다라 하느님과 합일의 체험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유일하고 진정한 영성 생활은 신 · 망 · 애의 복음 삼덕과 그 밖의 다른 덕행을 실천하면서 그리스도의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도달하는 진보의 삶이다. 필자는 신자들이 올바른 가톨릭 영성 생활을 실천할 수 있도록 몇 번에 걸쳐 글을 실으려 한다. 성경 말씀으로 어떻게 기도 생활을 할 수 있는지 2천 년 영성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와 함께하는 이 여정을 통하여 독자 여러분도 성경 말씀과 함께 영적 성장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2년 1월호(통권 430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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