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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과 영성13: 중세 중기의 신앙과 이성은 영성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4,005 추천수0

성경과 영성 (13) 중세 중기의 신앙과 이성은 영성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역사가들이 그리스도교를 부정적으로 보면서 중세 유럽의 특징을 일컫기 위해 사용한 용어는 무엇일까? 정답은 ‘암흑기’이다. 오늘날 역사가들은 중세에 그리스도교가 성경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이식하려고 하여 인간 이성과 문명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였기에 중세의 유럽 역사를 암흑기라고 평가한다. 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 이후에 개신교에서도 가톨릭 교회를 폄하하기 위해 중세 유럽을 암흑의 시기였다고 언급한다.

 

물론 중세 초기는 다른 이유로 암흑기라고 말할 수 있다. 4세기부터 유럽에서 범(汎)게르만족이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한동안 정복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런 중 5세기 후반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여 유럽에서는 커다란 정치 세력이 소멸되고, 유럽의 영토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군소 세력들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일반 백성은 한 곳에 정착하여 일을 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도 없었다. 정규 교육 기관에서 배움의 길을 걸을 수도 없었으며,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 놓였던 중세 초기를 암흑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세기말 프랑크족 카롤링거 왕족이 유럽 대부분을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암흑기는 일단락되었다. 샤를마뉴 대제가 그리스도교와 손을 잡고 수도원을 중심으로 문화 육성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오히려 그때부터 그리스도교는 교육과 문서 보급 사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즉 수도원이 정규 교육 기관을 대신하기 시작하면서 훗날 교회가 운영하는 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며, 많은 수도자는 성경과 교부 문헌 및 교회와 관련된 서적을 필사하여 개인이나 도서관 등에 보급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이러한 현상이 그리스도교인의 영성 생활을 방해하는 장애 요인이 될 수는 있었어도, 모든 사람의 이성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어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을 따르는 많은 수도원에서, 수도자들은 육체노동보다 성경과 교회 서적을 필사하는 정신노동에 집중하여 교회 안팎에 문서를 보급함으로써 이성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온종일 정신노동에 시달린 수도자들이 여가 시간에 두뇌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여 성경 독서와 묵상을 소홀히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결국 수도자들은 영성 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신앙을 이성으로 조명하기 시작하다

 

중세에 그리스도교가 인간 이성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다른 예는 ‘스콜라 철학’의 출현일 것이다. 샤를마뉴 대제의 르네상스 시대를 통해 그리스 철학을 다시 새롭게 접한 유럽은 토론 문화를 바탕으로 인간 이성의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신앙과 이성 간에 갈등을 낳았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간의 이성과 학문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 인물로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1033-1109년)를 들 수 있다.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안셀무스는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대전제를 제시하면서 신앙을 전제하지 않는 이성은 오만이고,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신앙은 태만이라고 주장하였다. 안셀무스는 저서 《독어록(獨語錄, Monologion)》에서 귀납법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전례가 없는 특이한 독창성을 드러냈다. 즉 그는 성경과 전승뿐 아니라 교부들의 가르침도 완전히 배제한 가운데 합리적 방법만을 사용하여 하느님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물론 안셀무스는 《대어록(對語錄, Proslogion)》에서 연역법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바치는 형식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성경을 이성으로만 헤아리고 다가가려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신앙을 이성으로 조명하기 시작하면서 스콜라 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을 체계화하면서 신학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스콜라 신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대표 인물로 성 빅토르의 후고(1096-1141년)를 들 수 있다. 성 빅토르 수도원의 제3대 수도원장이었던 후고는 하느님 증명 문제뿐 아니라 하느님 인식 문제에서도 신앙과 이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후고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자신의 내면을 잘 성찰함으로써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하는 단계에 다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후고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성과 신앙의 공동작업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저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성사들(De sacramentis christiane fidei)》에서 구약성경을 창조 사업의 면에서, 신약성경을 구원 사업의 면에서 조명하면서 그 두 주제가 조화를 이루는 성경 신학을 제시하였다. 그는 영성 생활에서도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 단계에서 ‘인지-묵상-관상’의 세 단계를 제시하였다. 신비 체험의 첫 단계에서는 이성이 감각이나 기억을 잘 통찰하기를 강조하였고, 관상의 단계에서는 직관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지성의 침투를 강조하였다.

 

 

스콜라 신학의 반대편에 서서 성경을 중심으로 영성 생활을 펼치다

 

한편 세속 권력에서 자유로워지고자 수도원 개혁을 주장하였던 클뤼니 수도원이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되자 부작용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화려한 전례와 필사에 국한된 정신노동 때문에 육체노동을 점차 등한시하여 베네딕도 수도 규칙의 초심을 잃고 귀족화된 클뤼니 수도원은, 육체노동을 전담할 평수사를 수도원에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교회 안에서도 스콜라 신학이 발전하면서 이성의 작용을 강조하기 시작하자, 11세기경에 일부 수도자들은 초기의 단순한 수도 생활로 돌아가려고 시도하였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접근하여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수도회가 출현하였다.

 

그중 하나가 1010년에 창설된 카말돌리회이다. 이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독수(獨修) 생활 형태로 엄격히 지키고자 하였다. 다른 하나는 1098년에 창설된 시토회이다. 이 수도회의 수도자들은 산 속 깊이 들어가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공주(共住) 생활 형태로 엄격히 지키고자 하였다. 시토회 수도원은 여러 면에서 클뤼니 수도원과 대조를 이뤄 많은 이의 호응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고, 더 명맥을 잇지 못한 클뤼니 수도원과 달리 오늘날까지 이어 오고 있다. 시토회는 최초의 수도 규칙을 단순하고 엄격하게 지키고자 하였으며, 전례뿐 아니라 필사와 관련된 정신노동을 줄이고 육체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수덕 생활과 세상과 단절하여 관상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시토회의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시토회 수도자로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년)를 들 수 있다. 베르나르두스는 스콜라 신학의 발전에 기여한 성 빅토르의 후고와 친분 관계를 맺었지만, 스콜라 신학 분위기의 반대편에 서서 고대 교부들의 방법론을 따라 철저하게 성경과 교부들의 성경 주석을 중요한 가르침으로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에 일부 사람들은 베르나르두스를 그리스도교 ‘최후의 교부’라고도 일컬었다.

 

베르나르두스는 성경에 집중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신비에 빠져들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신비 외에 다른 어떤 신비도 전해 주지 않는다. 사실 베르나르두스 이전까지의 신비 사상에서는 인간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하느님 중심의 신비 체험이 전개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베르나르두스가 성경을 중심으로 영성 생활을 펼쳐나감으로써 그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었고, 이 점이 그의 신비 체험의 특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 내의 중요한 영성가들에게 그리스도 중심의 신비 체험은 보편된 관점이 되었다.

 

중세 중기에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스콜라 신학은 교의신학을 낳는 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영성 생활에서는 장애가 되었다. 교회 안팎의 사람들이 신앙 문제까지도 이성으로 따지기 시작하면서 직관적 인식과 체험을 따르는 영성 생활은 설 자리를 점점 잃게 되었다. 결국 고대에 수도자들이 교부들의 성경 주석과 성경을 중심으로 실천하였던 관상 생활은 일부 수도원에서 그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1084년에 성 브루노(1030-1101년)가 설립한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은 훗날 성경과 영성 생활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변형한 규칙과 함께 공주 생활 수도원 안에서 독수 생활을 실천한 카르투지오회는, 성경 필사 작업을 주로 하면서도 침묵과 고독 가운데 보장된 많은 시간을 통해 성경을 깊이 묵상할 수 있었다. 결국 카르투지오회 수도원은 훗날 ‘거룩한 독서’ 방법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1월호(통권 442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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