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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성경과 영성14: 거룩한 독서는 영성 생활 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3 조회수4,529 추천수0

성경과 영성 (14) 거룩한 독서는 영성 생활 발전에 어떤 도움을 주었을까?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뵈러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대표 장소로 어느 곳을 제시할까? 필자는 ‘산’을 정답으로 꼽고 싶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 선택된 민족이나 하느님의 일꾼들이 때로 ‘광야’에 나아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일화를 전해 준다. 하지만 인간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세상을 벗어나 광야에 나가 있을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수동적 개념을 더 강하게 느낀다.

 

반면 산은 올라가는 수고로움이 필요한 장소이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머무르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만 그분을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산에 오른다. 비록 하느님을 만나는 최종 순간은 그분의 은총에 의한 수동적 순간이지만, 광야보다 산은 능동적으로 올라가야 하는 과정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합일하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여정을 묘사하는 데 많은 영성 작가가 광야보다 산을 선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뒤에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위해 시나이 산에 올랐다(탈출 19장 참조).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저서 《모세의 생애》에서 하느님을 만나러 시나이 산에 오르는 모세의 등정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합일의 영적 여정을 설명하였다. 또 십자가의 요한도 저서 《카르멜의 산길》에서 카르멜 산 등정의 그림과 비유를 통해 자신의 신비 체험을 해설하였다.

 

 

땅과 하늘을 연결한 층계, 수덕을 증진시켜 완덕에 이르는 여정

 

우리는 성경에서 땅과 하늘을 연결하여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또다른 표상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곱은 베텔에서 잠을 자다가 꿈 속에서 땅에서 출발한 층계가 하늘에 닿아 있고, 천사들이 그 층계를 따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다(창세 28,12 참조). 그런데 영성의 역사에서 수도자들은 이런 층계의 표상을 ‘사다리’로 바꾸어 수도자들이 수덕을 증진시켜 완덕에 다다르는 여정을 표현하였다.

 

6세기 서방 교회 수도자인 누르시아의 베네딕도는 저서 《수도 규칙》에서 성경 말씀의 권고에 따라 겸손의 덕을 닦아 나아갈 때, 베텔에서 야곱이 보았던 천사들이 오르내리던 사다리를 영적 발전의 증진을 가늠하는 척도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수도 규칙》 7,5-9 참조). 7세기 동방 교회 수도자인 요한 클리마코는 저서 《거룩한 등정의 사다리》에서 수도자들이 현세 생활을 벗어나 수덕의 단계를 거쳐 관상의 높은 경지에 이르는 여정을 서른 개의 사다리로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이런 가운데, 12세기 서방 교회 수도자인 귀고 2세가 ‘거룩한 독서’로 불리는 ‘렉시오 디비나’의 체계를 더욱 분명하게 잡아 놓았다. 귀고 2세는 11세기 말에 창립된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제9대 원장으로 훌륭한 영성 작품을 남긴 인물이다. 귀고 2세는 저서 《수도승들의 사다리》에서 봉쇄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그들의 고유한 영적 수행인 관상 생활을 실천해 나가는 데 유용한 네 단계의 사다리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는 수도원의 거룩한 독서 전통을 접목하여 성경에서 출발하여 관상에 다다라 하느님과 합일하는 여정의 단계를 ‘독서-묵상-기도-관상’으로 구분하여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마도 귀고 2세 역시 사다리의 표상이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는 인간의 영적 여정을 효과 있게 잘 설명한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귀고 2세가 사다리 표상을 가지고 거룩한 독서의 발전 단계를 자세히 구분지어 묘사하여, 수도자뿐 아니라 평신도도 거룩한 독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구분 단계는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쳐 거룩한 독서의 올바른 수행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거룩한 독서의 네 단계 ‘독서-묵상-기도-관상’

 

첫 번째 ‘독서’ 단계는 먼저 성경을 펼쳐 읽어 나가는 단계이다. 고대 수도자들의 전통에 따라 성경을 소리 내어 읽든지, 오늘날 같이 눈으로만 읽든지, 일단 성경을 먼저 읽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온 정성을 다 기울이고, 온 힘을 집중하여 읽어야 한다. 대충 읽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는 마음가짐으로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이때 독서자는 성경에서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추구하는 자세로 독서에 임해야 한다. 산해진미와 진수성찬이 있어도 먹어 봐야만 맛을 아는 것처럼, 성경 말씀에 담긴 좋은 보화와 귀중한 가르침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계는 외부의 감각 기관을 통해 이루어지는 초보 단계에 불과하다.

 

두 번째 ‘묵상’ 단계는 성경 말씀에 감추어진 진리를 탐구하는 단계이다. 성경 말씀은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영적 의미도 담고 있다. 특히 영적 의미는 인간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면에 감추어진 의미를 알아듣고자 노력해야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 난 후, 능동적으로 최선을 다해 성경 말씀에 담긴 진리를 찾도록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 끝에 묵상자는 성경 말씀의 의미, 즉 성경에 감추어진 진리를 통해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깨달을 수 있다. 이는 마치 사람이 입에 들어온 음식을 잘게 씹어 분해하는 과정과 비교할 수 있다. 결국 이 단계는 사람의 중심인 내면에서 내적 감각 기관을 사용하는, 조금 발전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기도’ 단계는 성경 말씀을 묵상하여 깨달은 바를 하느님께 정성을 다해 봉헌하는 단계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기를 바라시고 우리를 선으로 이끄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복된 삶의 감미로움이 은총으로 베풀어지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이것은 음식을 물리적으로 씹는 과정을 넘어서 화학적으로 음식에 담긴 맛을 음미하는 것과 같다. 기도 단계부터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를 이끄시도록 그분께 청하는 것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갈망을 은총으로 채워 주십사고 기도로 청하게 된다. 따라가 이 단계는 더 진보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인 ‘관상’ 단계는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들어 올려져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 단계이다. 이때 관상자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한없는 감미로움을 맛보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되어 복된 삶의 감미로움을 진정으로 맛보게 된다. 음식을 먹는 최종 목표가 섭취한 음식으로 활동 에너지를 얻고자 하는 것이듯이, 성경 독서에서 출발하여 음미했던 하느님 말씀이 마침내 우리에게 비교할 수도 없는 감미로운 환희를 은총으로 베풀어 주시어, 우리는 영적으로 큰 위로를 받고 우리의 영혼이 생동감 넘치고 활기를 띠게 된다. 관상의 정점에서 우리는 환희와 기쁨과 함께 은총으로 하느님과 합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는 완성을 이루는 최종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귀고 2세는 하느님과 합일하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에게 사다리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 다가가는 방법을 체계 있게 설명하고자 하였다. 사다리의 한쪽 끝은 땅에 닿아 있고, 다른 한쪽 끝은 하늘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영혼은 누구라도 사다리를 오르면 된다. 네 개의 계단으로만 구분된 이 사다리를 오르려면 처음에 능동적으로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면도 있지만, 더 높이 올라갈수록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가야 하는 수동적인 면이 생긴다. 그러므로 기도 단계부터는 능동적 수덕 생활에서 수동적인 은총의 신비 생활로 잘 전환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귀고 2세가 어째서 거룩한 독서와 신비 체험을 함께 결합하여 설명하려 했는지 그 절묘한 의도를 살펴봐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잘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관상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방법을 터득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수덕 생활을 실천한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방향을 잃고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혹시 출발점에서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수 있다. 귀고 2세는 거룩한 독서와 신비 체험을 접목하는 첫 단계가 성경 독서라고 제시하였다. 모든 기도나 하느님을 만나러 나가는 여정의 출발점이 성경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서 출발한 기도라야 올바른 기도가 될 수 있고, 성경에서 출발한 여정이라야 하느님을 올바로 찾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무턱대고 하느님을 찾아 나섰고, 무작정 기도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성경 말씀과 영성 생활이 분리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진정으로 영적 발전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성경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한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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