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영성 (15) 거룩한 독서의 각 단계는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진정한 영성 생활은 발전 단계를 거쳐 가는 영적 상승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무조건 하느님을 향한 상승의 여정을 걷고자 노력하면 모두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얻을 수 있을까? 혹시 성경에서 그 실패 사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바람으로 열심히 위로 올라가지만 실패했고, 하느님의 진노까지 얻은 경우가 ‘바벨 탑 사건’이다.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또 그렇게 해서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살고자 하였다(창세 11,2-4 참조). 이런 시도는 겉으로 보기에 엄청난 성읍과 탑을 건축하여 자신들의 위대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이겠지만, 그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머무르시는 곳까지 다다르는 높은 탑을 짓고 그곳에 올라가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교만이 숨겨져 있다. 하느님을 향하여 산, 사다리, 탑을 맹목적으로 또는 교만한 마음으로 오른다면, 성덕의 발전을 통한 완덕을 완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에 떨어져 하느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어 그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살 수밖에 없었고, 성읍도 탑도 완성할 수 없었다(창세 11,7-8 참조). 한편 우리가 하느님께 올라가야만 그분을 만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경우도 있다. 야포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르던 베드로는 옥상에서 기도하던 중에 무아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환시 속에서 온갖 짐승이 담긴 그릇을 보았고,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인이지만 과거 유다교 시절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셨다는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짐승들이 여전히 속되다고 여기면서 주님의 말씀을 거부하였다(사도 10,9-15 참조). 결국 신앙인이 하느님을 향해 올라가더라도 교만하면 실패한다. 선입견으로 인한 무지에 사로잡혀 있으면 하느님께서 찾아오셔도 그분의 은총을 받지 못한다. 성경은 이러한 점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승의 여정을 단계별로 제대로 밟아 걸어가야 하고, 열린 마음으로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잘 받아야 한다. 거룩한 독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자 할 때도 각 단계가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하는지 잘 살펴야만 성공할 수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귀고 2세는 저서 《수도승들의 사다리》에서 거룩한 독서의 각 단계를 잘 이해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 예수님의 산상 설교 중한 구절을 강조하였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이는 상승의 영적 여정을 걸어가서 완덕에 이르러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출발부터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현세구복(現世求福) 같은 사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뵙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지녀야 영적 여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영혼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거룩한 독서의 첫 번째 단계인 ‘독서’에서, 영혼은 이성의 능력으로 성경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서 어떻게 하느님께 나아갈지 묻고, 그 답을 찾기 시작한다. 귀고 2세는 거룩한 독서의 두 번째 단계인 ‘묵상’에서도 몸이 아니라 마음이 깨끗한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씻지 않은 손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지만, 입에서 곧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힐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마태 15,18-20 참조). 악한 행실을 하지 않는다 해도 마음이 정화되지 않아 불손한 생각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마음을 깨끗이 하고 묵상에 임해야 하느님과 만나는 일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지 잘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깨끗한 마음이 영혼에게 감미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이교인도 묵상을 하여 선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영혼은 스스로 감미로움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억지로 노력하기보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거룩한 독서의 세 번째 단계인 ‘기도’이다. 마음을 깨끗이 한 공로로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야 그분을 만난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묵상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진 것은 영혼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여정을 출발한 영혼이 마음을 깨끗이 하여 영적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더욱 불태우면, 하느님께서 감동하시어 그 영혼을 만나러 급히 오신다. 그때부터 거룩한 독서의 네 번째 단계인 ‘관상’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단계에 도달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다. 오로지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시어 우리에게 개입하실 때 이루어지며, 그 시간도 하느님께서 정하시기에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다만 그 결과, 육이 영에 대항하지 못하면서 완전히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공동으로 체험할 수 있다. 성경을 읽는 최종 목적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 이렇게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성경 독서에서 출발하여 상승의 단계를 밟아 하느님과 만나게 되지만, 귀고 2세는 거룩한 독서의 각 단계가 시간과 인과관계 순서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곧 거룩한 독서는 마지막 단계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출발해야지, 아무런 목표점도 없이 첫 단계를 출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또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이 급해 첫 단계에서 제대로 출발하지 않고 서두른다면 그 결과가 제대로 나올 수 없다. 다시 말해 음식을 먹는 목적은 영양분을 얻기 위해서인데 배탈이 나서 영양분을 하나도 흡수하지 못한다면 음식을 먹은 의미가 없다. 또 음식을 먹지도 않은 상태에서 영양분이 몸에 흡수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최종 목적은 하느님을 만나는 데 있다. 아무 목적 없이 성경을 읽는 것은 의미 없는 행동이고, 하느님과 만나기를 원하면서도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분을 절대 만날 수 없다. 혹시 하느님을 만났다고 생각되더라도 그것은 악의 유혹에 현혹되어 진짜 체험을 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묵상을 전제하지 않고 독서를 한다면 무미건조한 일이다. 이방인들도 성경을 읽을 수 있으나 하느님과의 친밀한 만남이 없이는 묵상으로 발전시킬 수 없으므로, 그들은 성경을 읽는 참된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다. 또 독서를 제대로 하지 않고 서둘러 묵상에 들어간다면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성경 말씀을 깊이 새기지 않고 선입견이나 단편적 지식만으로 자기만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묵상 없이 곧바로 기도로 들어간다면 열정 없는 미지근한 기도가 될 것이다. 합당하게 자신을 정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치는 기도이기에 공허할 수 있으며 은총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기도로 발전하지 않는 묵상도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묵상이 이성의 작용에 비중을 더 두고 있기 때문에 행동보다 생각에 머무를 것이고, 기도를 통해야만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성덕이 증진되면서 영적 열매를 잘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단계에서는 두 가지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기도를 열정적으로 드릴 때 어느 순간 관상의 단계에 다다른다. 그렇기 때문에 통상 기도를 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관상의 단계에 들어갈 수는 없다. 우리가 열심히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기도 단계를 아주 단순화하거나 생략한 상태에서도 은총을 통해 관상의 단계에 다다르게 하신다. 다만 이는 하느님의 결정에 달렸다. 우리가 기도를 소홀히 하면서 관상의 단계에 다다르게 해 달라고 청할 일은 분명히 아니다. ‘거룩한 독서’라고 ‘독서’에만 강조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귀고 2세는 고대 수도자들의 거룩한 독서 전통을 하느님과 만나는 영적 여정으로 승화시켰다. 거룩한 독서는 독서를 바탕으로 출발하여, 묵상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찾고자 숙고하고, 기도에서 하느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며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 관상은 모든 단계를 잘 거친 이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은총과 복이다. 그러므로 남의 묵상이 적힌 책만 읽으면서 거룩한 독서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은 자신이 묵상하는 데 도움을 얻고자 하는 참고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직접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이 모든 과정을 성실히 실천하고 있다고 여기신다면, 반드시 은총을 주시어 관상을 통해 당신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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