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영성 (16) 중세 후기 이후 성경을 이해하는 관점은 어떻게 변했을까? 중세 유럽에서 최초로 설립된 대학은 무엇이며, 언제 어느 곳에 세워졌을까? 역사학자에 따라 견해 차이가 약간 있지만, 일반적으로 1088년에 이탈리아 북부 볼로냐에 설립된 볼로냐 대학을 중세 유럽 최초의 대학으로 본다. 당시 볼로냐 대학은 교회법과 시민법을 중심으로 법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프랑스 국민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들은 11세기에 이미 파리에 대학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나 흔히 파리 대학은 1109년에 설립되었다고 본다. 파리 대학은 철학과 신학을 주요 과목으로 가르치면서 유럽 전역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세 이후 교회사에서 중요한 신학자들 대부분이 파리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는 사실만으로 파리 대학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한편 12세기 중반에 잉글랜드 옥스퍼드에 옥스퍼드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 대학은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사람들이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설립되었는데, 주로 파리 대학과 볼로냐 대학의 체계를 본받았다. 옥스퍼드 대학은 신학, 법학, 의학, 교양 과목을 가르치면서 중세에 아주 중요한 유럽 대학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결국 13세기 들어 몇몇 교황이 문서를 통해 이 대학들의 운영과 학위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명실공히 신학을 공부하고 석·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교회 관련 대학의 지위를 인정받고 그 입지를 확실하게 굳혔다. 중세 초기에 많은 사람이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여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중세 중·후기에 대학의 설립으로 많은 사람이 교육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큰 변화였다. 이 분위기가 교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학문 연구는 대학 설립 이전부터 시도되었다. 이미 11세기부터 교회 안팎에서는 고대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그 결과 12세기부터 교회에서도 스콜라 철학과 스콜라 신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분위기가 대학 설립과 맞물려 이성을 통해 사변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노력이 폭발하듯 증가하였다. 수도원에서는 귀고 2세 수도원장에 의해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영적 여정을 걸어가는 전통 방법을 훌륭하게 집대성하여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을 중심으로 신학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일반 학자들뿐 아니라 수도원을 제외한 교회 내에서 성경을 거룩한 독서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 이성 작용으로 탐구하는 지성적 활동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게다가 13세기에 기존의 수도회와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진 탁발 수도회가 출현하면서 교회에서 성경을 다루는 입장에 일대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대학과 탁발 수도회의 설립으로 거룩한 독서의 전통이 축소되었다 6세기 초에 누르시아의 베네딕도에 의해 설립된 베네딕도 수도회를 시작으로, 12세기까지 서방 교회에서 많은 수도회가 설립되었다. 그중에 거의 모든 수도회는 베네딕도의 수도 규칙을 따랐다. 외형에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 거룩한 독서를 중심으로 한 전통 수도 생활을 실천하였다. 그런데 보편 교회 당국에서는 너무 많은 수도회가 무분별하게 난립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를 소집하여 새로운 수도 단체를 설립할 수 없다는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새 수도회 설립 금지 결정이 내려졌는데도 라테란 공의회가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베네딕도회 계열의 수도회와 형태를 달리하는 새로운 수도회가 설립되고 교회 인준까지 받았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1216년에 도미니코 수도회를 인가하였고, 1223년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제출한 규칙을 승인하였다. 두 수도회는 복음에 따른 가난의 정신대로 살아가는 청빈 생활을 강조하여 ‘탁발 수도회’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기존 수도회의 전통인 거룩한 독서와 육체 노동을 오히려 소홀히 하는 대신 거룩한 진리에 대한 연구를 강조하면서 수도원 공동 기도와 전례도 축소하거나 관면을 허가하였다. 반면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육체노동을 유지하면서 설교와 선교 활동을 강조한 수도 규칙을 마련하였다. 두 수도회의 초창기 모습은 청빈 생활 때문에 ‘탁발 수도회’라고 불린 것을 제외하고는 특성과 모습이 상이하였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이미 스콜라 철학의 출현을 염두에 두고 이단자를 개종시키기 위해서라도 학문 연구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기존 수도회와 유사한 모습을 지니면서 수도회 개혁 차원에서 단순하게 청빈 생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각 수도회는 교황청의 인준을 받은 지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학문 연구 분야에 뛰어들어 신학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하였다. 1230년을 전후로 두 수도회는 파리 대학 근처에 수도원을 설립하여 신학 강좌를 개설하였다. 그 후 수도회 소속의 많은 신학자가 기존 대학과 수도원에서 신학 연구와 강의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대표 학자로는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프란치스코회의 보나벤투라를 꼽을 수 있다. 12세기에 시토회 수도자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성경의 이해와 활용에서 사변적 방법론을 거부하고 거룩한 독서의 묵상과 관상 방법론을 선호하는 동안, 13세기에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신학자들은 탁발 수도회 수도자들과 함께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주석하여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4세기 잉글랜드에서 출현한 신비 체험가와 신비 신학자들이 과거 전통에 따른 성경 묵상을 시도하면서 저술하였으므로 옥스퍼드 대학을 중심으로 성경 연구와 교육 활동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14세기 말엽에 대학을 중심으로 성경 연구 작업이 학문의 대상으로 다시금 활기를 띠게 되었다. 결국 중세 중·후기에 대학과 탁발 수도회가 설립되면서 성경을 영성 생활에 바로 접목하려는 전통은 많이 축소되었고 거룩한 독서의 경우 영적 관점까지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왔다 그런 가운데 14세기 유럽에서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어 교회의 성경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되면서 나타난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중세 스콜라 철학과 신학이 지닌 지성 중심의 분위기를 의지 중심으로 바꾸고자 시도하였다. 하지만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고전 문헌에 대한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고, 이 바람이 교회까지 불면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고전 문헌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출신 로렌조 발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이다. 수사학자이자 문법학자였던 발라는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고전 문헌에 대한 원문 대조 비평과 문학적 분석 방법론을 이미 15세기에 적용하였다. 그는 라틴어 역본인 불가타 성경과 그리스어 원문 신약성경을 비교하여 라틴어 번역에 심각한 오류가 있는 부분을 찾아내 지적하였다. 또 그리스어 원문의 도움으로 라틴어 역본 불가타 성경에서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을 쉽게 주석하 여 《신약성경 주석》을 출간하였다. 이 저서는 가톨릭 교회에서 성경 본문 비판 방법론을 처음으로 적용하여 저술한 작품이었다. 한편 네덜란드 출신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도 15세기 후반부터 활동하면서 교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로렌조 발라의 작품을 접하면서 문헌 비평의 방법에 눈을 뜨고 난 뒤 성경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여러 개의 신약성경 수사본을 비교 분석하여 신약성경 원문 비평본인 《신약성경》을 출판하고, 그 작품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헌정하였다. 또 성경을 직역하지 않고 번역자의 개인 견해가 들어가는 의역 형태로 해설을 첨가한 성경 해설서 《의역》을 출판하였다. 이렇게 라틴어 역본 성경에 대한 비판은 처음에는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학문을 실질적으로 연구하는 처지에서 단순히 외적 오류만을 지적하여 성경 번역에 대한 완성도를 높여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결과도 가져왔다. 결국 중세 중·후기에 수도원 전통의 거룩한 독서는 수도원 울타리 안에서만 실천되었다. 수도원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과 일반인은 성경을 학문의 대상으로만 생각하여 호기심을 충족하는 성경 주석 연구에 매진하면서 성경에서 더는 영성 생활의 길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으로 고전 문헌 연구의 분위기가 성경 본문까지 미치게 되자, 번역 오류뿐 아니라 성경 본문 비판본의 문제까지 제기되고 성경의 권위마저 도전받는 듯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를 중심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찾고자 했던 인문주의의 취지 때문에 외적인 성경 본문보다 내적인 성경 내용을 통해 성경의 관점에서 본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면서 성경을 통해 다시 영적 여정으로 들어서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 결과 근세에 이르러 새로운 성경 묵상 방법론이 출현하였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4월호(통권 445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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