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영성 (18) 근세의 정감적 성경 묵상 방법은 어떻게 출현하였는가? 16세기 유럽에서 가톨릭 교회를 화들짝 놀라게 한 역사적 사건은 바로 ‘종교 개혁 운동’이다. 16세기 초중반에 독일의 루터는 루터 교회를, 스위스의 츠빙글리와 칼뱅은 개혁 교회를,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영국 국교회를 세웠다. 이렇게 밖으로 개신교의 도전에 직면했던 가톨릭 교회는 안으로도 교회 쇄신의 요청에 귀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를 소집하였다. 공의회에서는 우선 개신교를 단죄하였다. ‘오직 성경만으로’라는 표어를 강조한 개신교의 주장에 맞서, 가톨릭 교회 신앙의 원천은 성경(聖經)뿐 아니라 성전(聖傳)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그 외에 원죄, 의화, 성사, 미사, 성인 공경 등에 관한 교의도 분명하게 발표하였다. 종교 개혁 운동의 영향과 반작용은 가톨릭 교회의 영성 생활에도 직간접으로 나타났다. 종교 개혁 운동의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은 스페인에서는 기존에 펼친 새 신심 운동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적 영성 훈련의 형식이 더욱 발전했다.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그리스도교인의 성경 묵상 생활을 돕는 결실을 맺은 것이다. 한편 종교 개혁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스위스와 프랑스에서는 프란치스코 드 살이 개신교로부터 가톨릭 신앙인을 보호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뿐 아니라 쉴피스회가 트리엔트 공의회의 교회 쇄신 정신을 계승하여 가톨릭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고 발전하고자 노력하면서 또 다른 성경 묵상 방법을 소개하였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 로욜라의 이냐시오는 저서 《영신수련》을 통해 동시대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이 성경 묵상과 기도 생활을 실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 가는 시기에 정립된 체계적 성경 묵상 방법은 지성과 정신을 사용하는 추리적 묵상 기도의 형태를 지녔다. 하지만 이냐시오는 추리적 묵상 기도를 기반으로 삼으면서도 의지와 마음을 사용하는 정감적(情感的) 묵상 기도를 실천하여 성경 묵상을 심화시켰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묵상 방법에 대해 주의할 점으로 “인간적 추리에 의하든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든지 간에, … 영혼을 풍족하게 하고 또 만족시키는 것은 풍부한 지식이 아니라, 사물의 내용을 깊이 깨닫고 맛보는 것”(2항)이라고 언급하였다. 또 “지성으로 추구할 때보다도 의지의 행동에서, 즉 말로나 마음으로 우리 주 하느님이나 성인들과 더불어 담화할 때, 더 큰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3항)고 강조하였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서 기도의 세 가지 방식을 소개하는데, 그중에서 그리스도교인이 실천할 수 있는 대표적 성경 묵상 방법은 육신의 오관에 상응하는 영적 오관을 사용하여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었다(247-248항 참조). 한 가지 예로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는 이야기(루카 7,36-50 참조)를 오관으로 묵상해 보자(《영신수련》 282항 참조). 먼저 예수님께서 초대받으신 바리사이의 집 안 광경을 영적 눈으로 바라보자. 다음으로 예수님 앞에 마련된 음식을 영적 입으로 먹어 보자. 이때 한 여자가 들고 온 옥합 안에 든 향유의 향기를 영적 코로 맡아 보자. 또 여자가 눈물과 머리카락으로 씻겨 드리고 입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린 예수님의 발을 영적 촉각으로 느껴 보자. 끝으로 그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수군덕거리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영적 귀로 들어 보자. 이 정감적 묵상 과정을 통해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7,48)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으면서 주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더욱 솟아오를 것이다. 결국 이냐시오의 정감적 묵상 방법은 당시의 수도자뿐 아니라 평신도가 성경 묵상을 실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이 방법으로 성경 묵상을 실천하는 그리스도교인이 많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의 묵상법 가톨릭 교회에서 거의 최초로 평신도 그리스도교인의 영성 생활에 도움을 주는 작품을 저술하였다고 일컬어지는 프란치스코 드 살은, 저서 《신심 생활 입문》에서 간단한 묵상 방법을 제시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무엇보다 묵상을 다음과 같이 실천하라고 권고하였다. “내가 그대에게 권하는 바는 마음의 기도 즉 묵상, 그중에서도 주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묵상이다”(《신심 생활 입문》 Ⅱ, 제1장). 프란치스코는 묵상의 초보자인 평신도에게 먼저 묵상을 잘할 수 있는 세 가지 준비 단계를 설명하였다. 첫 번째, 묵상자는 자신이 하느님 대전에 나와 있다는 것을 간절히 느끼면서 묵상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곳에 계시는 전능한 분이므로 어느 곳에서 묵상을 실천하든지 하느님의 대전을 느끼라는 것이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도 머무르시기에 우리는 마음 안에서 하느님 대전에 나아갈 수 있다. 또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성을 통해 우리 인간을 바라보시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인성을 상상하면서 하느님 대전에 다다를 수 있다. 두 번째, 묵상자는 여러모로 부족한 자신이 하느님 대전에 나올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면서, 그 후로도 하느님께 계속 도와달라고 간절히 청하면서 묵상 기도를 실천해야 한다(《신심 생활 입문》 Ⅱ, 2-3장 참조). 세 번째, 묵상자는 앞선 단계와 다른 차원에서 준비 단계를 마무리한다. 즉 이냐시오의 묵상 방법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상상을 통해 묵상하고자 하는 장면이나 주제를 구체적으로 머리에 그려보는 것이다. 이렇게 묵상하려는 주제에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동안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다(《신심 생활 입문》 Ⅱ, 제4장 참조). 묵상 준비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이성의 활동을 통해 묵상을 실천하는데, 그 묵상은 우리의 의지를 자극하게 된다. 그리하여 묵상을 마친 다음에 결심한 내용을 겸손하게 실천에 옮기게 된다(《신심 생활 입문》 Ⅱ, 5-8장 참조). 프란치스코의 묵상 방법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어쩌면 다른 방법과 차별화되지 않아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는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하여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묵상 방법을 소개하고 독려하였다. 쉴피스회에서 소개한 정감적 묵상 기도 쉴피스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권고한 체계적인 신학생 양성의 정신에 부응하고자 17세기에 프랑스에서 설립된 사제 단체이다. 따라서 쉴피스회는 여러 지역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신학생 양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신학생 양성 과정에서 신학생들에게 성경 묵상을 실천할 수 있도록 소개한 묵상 방법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실천할 수 있는 묵상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쉴피스 묵상 방법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덕성을 본받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화하신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과 긴밀히 일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완덕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범이신 예수님을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찬미를 드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 마음 안에 모시고 그분과 일치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분석과 추리,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미래를 향한 열망으로 자신을 성찰하면 예수님의 덕성에 참여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과 더욱 일치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덕행을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은총의 도움에 협력하면서 실천에 옮겨야 한다. 온종일 묵상한 덕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쉴피스 묵상 방법은 성찰을 중심으로 실천하는 정감적 묵상 기도다. 특히 추상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성경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데 목적이 있다. 물론 초보자는 추리로 더 많이 기울어 묵상하겠지만, 끊임없이 묵상을 실천하면 점점 정감적 묵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근세에 들어서 문예 부흥(르네상스)과 인문주의 출현으로 적잖은 영향을 받았던 가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 운동이라는 현실 앞에서 많은 것을 고민하고 개선해 가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특히 인문주의자들의 연구로 성경을 바라보는 입장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상황에서, 개신교의 출현은 앞으로 성경을 대하는 입장에 더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는 예고와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차원 높은 영성 생활을 추구하려는 훌륭한 영성가들은 끊임없이 성경 묵상 방법을 소개하고 실천하였다. 가톨릭 신앙인들은 새롭게 발전한 성경 묵상 방법인 정감적 묵상 기도를 실천함으로써 새로운 도전 앞에서 올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었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6월호(통권 447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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