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영성 (19) 근세 중후반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성경 연구 방법에 어떻게 대처했나? 20세기 말엽에 가톨릭 교회가 과거 결정 중에 잘못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시정했던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는 말로 유명한 이탈리아 출신의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년)이다. 지동설을 먼저 주장한 사람은 갈릴레이보다 한 세기 전에 살았던 폴란드 출신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년)였다. 그런데 1613년에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부터 그는 성경을 근거로 반박하는 신학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갈릴레이는 절대 진리를 지녔다는 성경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고 논박하였다. 급기야 1633년 가톨릭 교회는 갈릴레이를 감금하여 재판하였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고 나서야 석방되어 자택에 연금된 채 지낼 수 있었다. 갈릴레이는 죽을 때까지 가톨릭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갈릴레이가 교황청을 나서면서 혼잣말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고 말했다는데, 사실은 한 세기 후의 작가가 지어 낸 말이라고 한다. 오늘날 지동설은 당연히 올바른 이론이다. 하지만 16세기에 종교개혁을 경험한 가톨릭 교회는 당시 교회를 추스르기에 급했던지 거리상 먼 폴란드에서 나온 지동설에는 즉각 대응하지 못하다가, 17세기에 들어서서 이탈리아에서 나온 주장에는 즉각 대응하였다. 아마도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로 교회의 분위기를 재정비하고 난 후, 조금이라도 교회에 해가 될 것 같은 일이 생기면 예민하게 반응했다고 볼 수 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의 재판과 판결을 재고할 것을 권고하였다. 곧이어 1981년에는 신학자와 과학자, 역사학자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결국 가톨릭 교회는 1992년 10월 31일 “당시 조치가 비극적인 상호 이해 부족에서 나온 실수였다”고 고백하면서 교회 법정의 오류를 인정하였고, 359년만에 갈릴레이를 복권하였다. 결국 이 정정 사건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 인식을 계속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봇물 터지듯 시작된 성경 본문에 대한 비판적 연구 문예부흥(르네상스)과 종교개혁을 경험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원천인 성경은 여러모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성경을 중심으로 영성 생활을 실천하던 신앙인들은 혼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근세에 들어와 인문주의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가톨릭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라틴어 역본 성경이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본과 일부 차이가 있다고 밝혀지자 경전의 진정성에 대해 세상으로부터 심한 도전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교개혁가들은 칠십인역 그리스어 구약성경을 근거로 라틴어 역본에 포함된 가톨릭 교회의 일부 성경이 히브리어 원본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구약성경의 정경 범위를 유다인과 같이 히브리어 원본 성경으로 국한하였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세상의 도전을 직시하면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성경 원문의 권위와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가운데 오랜 세월 동안 교회에서 사용한 ‘불가타’ 라틴어 역본 성경의 진정성을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가톨릭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성경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가톨릭 교회 안에서 늘 읽혀 온, 옛 불가타 라틴어 역본에 포함된 모든 책과 기록을 신성한 경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번 시작된 성경 본문에 대한 비평적 연구는 교회 안팎에서 봇물 터지듯 계속 시도되었다. 종교개혁 직후인 16세기 후반부터 성경의 권위를 비교적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교회 밖의 인물이 성경에 대한 비평적 견해를 쏟아냈다. 유명한 법률가인 휴고 그로티우스(1583-1645년)는 교회 밖 학자들이 일반 서적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일부 성경의 저자나 저술 연도 및 저술 의도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즉 구약의 아가, 코헬렛, 욥기와 신약의 히브리서, 테살로니카 전후서 등은 다시 연구되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철학자 토마스 홉스(1588-1679년)는 구약성경을 중심으로 각 권의 제목은 신뢰할 만한 수준이 아니어서 각 권의 저자 문제를 해결할 답을 제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홉스는 성경 각 권의 인간 저자의 활동에 대한 문제에 국한하여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지, 인간 저자를 통해 중재하시는 하느님의 권위에 대해서는 비평을 가하지 않았다. 또 다른 철학자인 바뤼흐 스피노자(1632-1677년)도 구약성경 각 권의 저자, 저술 동기 및 저술 연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중세까지의 전통 견해를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스피노자는 자신이 제기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해법을 스스로 찾아서 제시하지 못했다. 교회 안에서 신학자가 성경 본문을 비판하기 시작한 경우는 개신교보다 가톨릭에서 먼저 나타났다. 17세기에 프랑스 오라토리오회 소속 사제였던 리샤르 시몽(1638-1712년)은 문헌 비평을 통해 모세가 오경의 저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시몽은 역사서도 본문에 나오는 연대보다 훨씬 후대에 수집된 자료를 가지고 편집되었다고 언급했다. 시몽에 따르면, 공적인 필사자들의 모임에서 단편 기록 자료들을 수집하여 보전하면서 후대에 전승했다는 것이다. 당시 교회 당국은 시몽의 주장에 제동을 걸지 않았지만, 시몽의 견해를 반대하던 사람들은 시몽의 저서들을 적극적으로 소각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의사이자 의학 교수인 장 아스트뤽(1684-1766년)은 오경에서 동일한 사건이 반복되어 나오고, 야훼와 엘로힘이라는 두 가지 하느님 이름이 불규칙하게 섞여 사용되며 사건의 연대가 뒤죽박죽이라고 지적하였다. 아스트뤽은 특히 창세기에 야훼계 자료군과 엘로힘계 자료군을 비롯하여 11개의 소자료군이 존재하는데, 이 자료군을 재배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시도하였다. 아스트뤽의 주장은 2백여 년 동안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프랑스보다 독일에서 더 큰 인정을 받았다. 게다가 18세기부터는 개신교 신학자들도 성경 비평 작업에 합류하면서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경 연구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전통 견해에 따라 성경을 신앙과 영성 생활의 원천으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인도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정적 영향을 받고 혼란스러워하는 신앙인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 가톨릭 교회는 다시 어떤 식으로든지 입장을 표명하여 신앙을 보호해야 할 책무를 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성경 연구 방법에 대한 근세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라틴어 역본 성경뿐 아니라 오경의 저자 문제에 대한 진정성이 도전받고 훼손되자, 교황 레오 13세는 1893년에 역사비평적 성경 연구 방법론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기 위해 회칙 <섭리의 하느님>을 반포하였다. 레오 13세는 이 회칙에서 성령께서 성경의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우주 만물의 본질적 성격을 가르친 것도 모두 인간 구원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성령의 영감에 의해 저술된 성경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갖 지각없는 견해에서 성경의 권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하여, 특히 성직자들은 매일 열정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설명해 줄 의무가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라고 권고하였다. 19세기 말까지는 성경과 관련한 고고학 유물이 발굴되기 전이었기에, 교회 당국은 역사비평적 방법론을 적극 수용하기보다 전통 견해에서 성경의 권위를 지킴으로써 신앙인이 마음 놓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배려하려고 했다. 1943년 교황 비오 12세는 레오 13세의 회칙 반포 50주년을 기념하여 회칙 <성령의 영감>을 반포하였다. 비오 12세는 이 회칙에서 성경 연구에 대한 교회의 새로운 입장을 표명하였다. 즉 성경 본문에서 신학적·영적 의미를 파악하고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때에 따라 학문적 성경 연구 방법을 적극 수용하여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아우구스티누스도 언급하였듯이 비오 12세도 성경을 연구할 때 고전 언어를 익혀 원문으로 돌아가 연구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성경 본문의 전승에서 발생한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동일한 본문에 대한 다수의 필사본을 상호 비교하는 본문 비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또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삶의 자리를 아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듣는 데 필요하므로 성경 시대 유물과 관련한 고고학 자료를 적극 활용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므로 교회 당국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런 점을 유념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열심히 연구하라고 당부하면서 새로운 성경 연구 방법론을 지지하였다. 계시종교인 가톨릭 교회는 근세에 계몽주의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자신을 성찰하여 교회에 대한 이해를 더 높이고 교회의 진면목을 깨달아 사람들에게 교회를 더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성경을 연구하고 올바로 이해하는 면에서도 가톨릭 교회는 직면한 새로운 도전을 잘 극복하여 새로운 방법을 어떻게 수용할지 찾아 나아갔다. 교회는 신앙인이 걱정 없이 성경을 묵상하며 영적 여정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7월호(통권 448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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