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영성 (20) 현대 가톨릭 교회가 성경을 바라보는 입장은 어떻게 변했는가? 1990년대 초에 방영된 한국 드라마 중에 시청률이 50%에 육박하여 방송을 하는 날이면 많은 사람을 일찍 귀가하게 한 드라마가 있다. 바로 [여명의 눈동자]다. 그 드라마에 미사 장면이 나왔는데, 시대 배경이 1944년 겨울쯤이었다. 상하이의 어느 성당에서 거행된 미사에 참례한 한 우익인사가 공산주의자에게 포섭당하고 있던 주인공에 의해 암살된다. 당시 이 장면이 방영된 후 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그 장면을 떠올리며, “연출자가 고증을 좀 더 철저하게 했어야 했다”고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난다. 시대 배경이 1944년인 드라마에서 사제가 신자들을 바라보며 중국어로 미사를 집전했기 때문이었다. 현대 교회사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는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는 계기가 된 커다란 사건이었다. 교회 밖으로는 비(非)그리스도인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려는 분위기로 돌아섰을 뿐 아니라, 교회 안으로는 전례 예식의 정비와 신앙의 원천 중의 하나인 성경의 활용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1965년 이전의 전례 정신에서는 하늘 위에 높게 초월해 계시는 하느님을 흠숭하는 데 강조점을 두었기에, 성당 뒷벽에 설치된 제대에서 사제는 신자들을 등지고 서서 미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전례 정신은 교회 공동체 안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께 신자들과 함께 기도를 올리는 데 강조점을 두어, 제대가 사제와 신자들 사이로 옮겨지고 사제는 신자들과 마주 보며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드라마의 미사 집전 장면은 시기상 맞지 않았다. 한편 그때까지 비공식적으로는 자국어를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었지만, 교회 내에서는 공식적으로 미사 경본과 성경 모두 라틴어판을 사용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비로소 보편교회는 지역교회에서 현지의 언어를 공식 전례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허용하였다. 성경의 경우에는 단순히 지역교회 언어로 번역하여 사용할 수 있는 변화 외에 다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지난 몇 세기동안 교회 내에서 꾸준히 문제로 제기되었던 역사비평 방법론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데 전향적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이다. 계시 진리이며 신앙의 원천인 성전과 성경에 대한 폭넓은 고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5년에 공표된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계시 헌장>)’인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계시 진리이며 신앙의 원천인 성전(聖傳)과 성경(聖經)을 폭넓고 심도 있게 고찰하였다. 특히 교회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 성경을 시대에 맞게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권고하였다. 먼저 공의회는 성경 해석에 대해 최근 몇 세기 동안 제기되던 견해를 대폭 수용하였다. “성서 해석자들은 성서 저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시대와 문화의 여러 조건들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들을 이용하여 표현하려 하였고 또 표현한 그 뜻을 연구해야 한다. 성서 저자가 글로써 주장하고자 한 것을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널리 쓰이던 그 지방 고유의 사고방식, 언어 방식, 설명 방식 그리고 사람들이 상호 교류에서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방식들을 면밀히 고려해야 한다”(<계시 헌장> 12항).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소위 ‘삶의 자리’를 살피는 역사비평 방법을 적극 받아들이게 되었다. 따라서 20세기 후반에 역사비평 방법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공의회는 성경 번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느 시대나 접할 수 있어야 하므로 어머니 마음으로 교회는 여러 나라 말로, 특히 성서 원문에서 적절하고 올바르게 번역하도록 힘쓰고 있다”(<계시 헌장> 22항). 그 결과 자국어 성경 번역은 더욱 활기를 띠어, 여러 나라 신자가 자국어 성경을 읽으면서 쉽게 성경 말씀의 의미를 헤아리며 묵상과 기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공의회는 교회의 승인만 있다면 갈라진 형제인 개신교와 함께 공동으로 성경을 번역해도 그 본문을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계시 헌장> 22항 참조). 한국 가톨릭 교회가 2005년에 새 번역 《성경》이 나오기 전까지 한국 개신교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점에 근거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역사비평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다 1993년에 교황청 성서위원회는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이라는 문헌을 발표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에서도 역사비평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보편화되었고, 많은 성경 주석가가 그 방법을 자주 사용하였다. 사실 20세기 중후반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도 중세 수도원 전통에 따른 성경 묵상보다 주석에 대한 관심을 중심으로 평신도 사이에서 성경 공부 열기가 뜨겁게 달구어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오랜 논의 끝에 받아들인 방법론이라 그런지 받아들인 후에는 비판 없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나,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나고 나니 서서히 그 방법론의 한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보편교회는 이에 대한 적절한 견해를 밝힐 수밖에 없었다. 우선 교회 문헌은 역사비평 방법이 고대 본문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방법이라고 재천명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을 사용하는 데는 한계도 있다고 밝혔다. 즉 역사비평 방법은 성경이 쓰인 역사적 상황에서만 성경 본문의 의미를 탐구하기 때문에 계시에서 오는 선험적 의미나 훗날 교회 역사에서 드러나는 의미에 대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비평 방법이 미처 다 파악할 수 없는 의미까지 밝힐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계속 개발하여 사용해야 한다. 문헌은 새로운 문헌 분석 방법들뿐 아니라, 전승에 근거한 접근, 인문과학을 통한 접근, 상황 접근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대안으로 언급하였다. 2010년에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교황 권고문 <주님의 말씀>을 발표했다. 이 문헌은 금세기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집대성하였다. 앞선 문헌(<교회 안의 성서 해석>)에서 역사비평 방법의 한계를 직시하고 성경 해석을 위한 또 다른 학문적 방법을 성찰해 보았다면, 이번 문헌에서는 성경 해석을 위한 학문적·신학적 방법에 대한 고찰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신앙 여정을 위한 사목적이고 영성적인 접근 방법까지 함께 고찰하고 있다. 결국 우리는 성경 말씀에서 지적 호기심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발전까지 나아가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 문헌에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과거 수도원 전통이었던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와 연관 지어 하느님 말씀을 살펴보자고 언급한 항목이다. “성경 본문은 그 자체로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읽기, lectio)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묵상, meditatio)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그분께 무엇을 말씀드리는가?”(기도, oratio) “주님은 우리에게서 정신과 마음과 삶의 어떤 회개를 요구하시는가?”(관상, contemplatio) 그리고 거룩한 독서는 결국 행동(actio)에 이르러서야 완결된다고 강조하였다(<주님의 말씀> 87항 참조).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성경 공부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것뿐 아니라, 성경을 꾸준하게 영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면을 이미 강조하였다(<계시 헌장> 25항 참조). 문헌은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교회 안에서 선포하고, 듣고, 기념하고, 묵상한 하느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주님의 말씀> 121항). “그래서 우리 시대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새로운 경청과 새로운 복음화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주님의 말씀> 122항). 우리는 성경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알아듣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영적 발전으로 승화하여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영성 생활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안에서만, 교회 안에서만 하느님 말씀을 경청할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에게도 하느님 말씀이 전해질 수 있도록 복음 선포 사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가톨릭 교회는 중세까지 성경을 영적 독서 중심으로 활용하다가, 근세에 와서 다분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학문적 접근을 유지하면서도 영적 접근을 해야 한다는 종합을 이루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 전영준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영성신학, 영성역사, 신비사상 등을 가르치며,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사도직) 총무로 활동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전영준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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