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기를 처음 읽는데요] 나는 주님이다 1970년대 디스코 그룹 보니 엠(Boney M)의 노래 가운데 귀에 익은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리버스 오브 바빌론(Rivers of Babylon, 1978년).’ 노래가 한창 유행하던 때에 그 첫 부분을 개사하여 재밌게 부르곤 했습니다. “다들 이불 개고 밥 먹어. 너는 왜 이불 안 개고 밥 안 먹니.” 일명 ‘다이밥송’이라 불리는 이 노랫말의 원문은 “By the rivers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ed Zion”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면 “바빌론의 강가에 우리는 앉아 있었어요/ 그래요, 우리는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어요”입니다. 여기에서 낯익은 단어 두 개가 눈에 띕니다. ‘바빌론’과 ‘시온’입니다. 바빌론 강기슭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디스코 풍의 이 노래는 3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댄스 음악이나 응원가로 쓰입니다. 그러나 노랫말을 음미하면 흥겨운 노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랫말은 시편에서 따왔습니다. “바빌론 강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시편 137,1-4) 어떻습니까? 제 나라가 멸망하여 낯선 땅에 포로로 끌려온 이들의 설움과 한탄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반드시 해방시켜 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탈출기를 썼습니다. 바빌론 강 기슭에서 고향을 생각하며 울던 이들은,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 아래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모를뿐더러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도 않겠다는 파라오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와 아론이 파라오에게 가서 말합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내보내어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위하여 축제를 지내게 하여라”(탈출 5,1).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파라오는 콧방귀를 뀝니다. “나는 그 주님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이스라엘을 내보내지도 않겠다”(탈출 5,2). 익히 예상한 반응입니다. 파라오의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작은 나라도 아니고 당시 근동 지역을 지배하던 막강한 제국이었습니다. 제국을 유지하려면 튼튼한 경제가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는 경제의 근간인 노동력을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착취했으므로 그들을 내보낸다는 것은 제국의 안정을 위협하는 잘못된 선택입니다. 당연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런데 파라오는 단순히 거절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종의 ‘괘씸죄’를 적용합니다. 작업 감독들과 조장들을 불러 벽돌을 만드는 데 쓰는 짚을 대 주지 말라고 명령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더 힘들게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느님을 위한 제사를 지낸다느니, 이집트를 떠나겠다느니 하는 딴 생각을 품지 않고, 모세와 아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의 교활한 계략은 성공합니다. 노동 강도가 세지자 이스라엘인 조장들이 파라오에게 가서 부르짖습니다. “어찌하여 임금님의 종들에게 이렇게 하십니까?”(탈출 5,15) 파라오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너희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탈출 5,17)고 일갈합니다. 파라오에게서 물러 나온 조장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악담을 퍼붓습니다. “당신들은 파라오와 그 신하들이 우리를 역겨워하게 만들어, 우리를 죽이도록 그들 손에 칼을 쥐어 주었소”(탈출 5,21). 결국 모세는 안팎으로 휘둘리는 상황을 맞습니다. 그는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주님, 어찌하여 이 백성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저를 보내셨습니까?”(탈출 5,22) 파라오는 누구일까요? 그는 모세와 아론, 이스라엘인 조장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줍니다. 언로(言路)를 막지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적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리하고 명석하고 유능하고, 요컨대 꽤 매력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특권과 지위, 사회적 역할에 묶인 사람입니다. 그의 모습에는 인간의 생명과 자유를 규제하는 형식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가 착취한 이스라엘인 조장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죄의 속박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삶보다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 낫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바라지도 않은 말을 내뱉는 모세와 아론을 ‘눈엣가시’로 여깁니다. 노예근성이 깊이 박힌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깨닫지 못합니다. 나는 야훼다 나는 주님이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야훼다”(탈출 6,2). “나는 주님이다. 나는 이집트의 강제 노동에서 너희를 빼내고, 그 종살이에서 너희를 구해 내겠다”(탈출 6,6). “나는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너희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탈출 6,7).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기로 손을 들어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데리고 가서, 그 땅을 너희 차지로 주겠다. 나는 주님이다”(탈출 6,8). 그분은 “나는 주님(야훼)이다”고 세 번이나 거듭 말씀하시며 당신을 굳게 믿으라고 당부하십니다. 이는 고집불통 파라오와 아둔한 이스라엘 백성뿐 아니라 고통과 시련을 겪는 모든 이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아론만이 그분 말씀의 뜻을 깊이 헤아려 실천합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다”(탈출 7,6).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나의 모습은? 최근 노동자들의 잇따른 자살 소식이 우리 마음을 짓누릅니다. 경영 악화로 해고되어 생계가 꽉 막힌 상황, 노동쟁의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사측이 신청한 막대한 금액의 손배가압류,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대우가 힘없는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합니까? 자기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3월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맞습니다. 부활을 맞는 나의 모습이 파라오인지, 이스라엘 백성인지, 아니면 모세인지 하느님 앞에서 잘 들여다봐야 할 것입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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