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창세 1장과 2장이 왜 다른가요? * 창세 1장에서는 동물이 먼저 창조되고 그 후 남자와 여자로 사람이 창조됩니다. 그런데 2장에는 남자가 먼저 나오고 뒤이어 여자가 만들어지며, 그다음에 온갖 짐승과 새가 등장합니다. 창세기에는 왜 두 가지 창조 이야기가 나란히 놓였나요? 그 차이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20대 마리아막달레나 님) 눈 밝은 독자네요. 창세기를 조금만 주의 깊게 읽으면 두 이야기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숱한 이야기는 그렇게 엉성하게(?) 엮은 표시를 내지 않고 매끈하게 다듬어져 나오니까요. 우리가 알아본 것을 옛사람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했을까요? 우선 주인공인 하느님 이름이 다르잖아요. 1장에는 ‘하느님(히브리어 엘로힘)’인데 2장에는 ‘주 하느님(야훼 엘로힘)’으로 나옵니다. 또 쓰인 단어도 다르지요. 1장에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 세계로 크게 보았다면, 2장에서는 ‘땅과 하늘’로 나오면서 주로 땅에 연관하여 이야기합니다. 배경도 크게 다릅니다. ‘1장’의 이야기는 엄청나게 많은 물을 정리하는 과정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2장에서 물은 ‘안개’ 정도로 희미하게 나옵니다(물론 에덴에서는 네 줄기 강이 나오지만요). 또 질문에서 지적한 대로 피조물이 창조되는 순서도 뚜렷하게 다르고 강조점도 다르지요. 이런 차이는 왜 생겼을까? 오늘날 창세기는 여러 자료를 편집한 작품으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창세 1-2장이 서로 다른 자료(전승)라고 우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공부할 때 이와 같이 한 권 안에서 서로 다른 자료를 구분하여 연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18세기에 목사인 비테르, 의사인 장 아스트뤽이 창세 1-2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이름을 구분하고 서로 다른 자료라고 주장했습니다. 그 뒤로 한층 정교하게 발전한 이 방법론에 따라, 창세 1,1-2,3은 사제 계통에서 나온 자료라 하여 ‘사제계 자료’라 부르고, 뒤에 붙은 창세 2,4ㄴ-3,24은 하느님 이름이 야훼로 나온다 하여 ‘야훼계(또는 야휘스트) 자료’, 또는 ‘비(非)사제계 자료’라 부릅니다. 논란은 있습니다만, 사제계 자료는 대략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 유배 시기나 귀환 직후, 야훼계 자료는 대략 기원전 9-8세기에 구성되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러니까 뒤에 실린 야훼계 자료가 훨씬 앞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대 사람들이 야훼계 자료를 받아들인 다음 그 앞에 새로운 사제계 자료를 덧붙여 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편집한 이들이 두 이야기의 차이점을 놓쳤을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이 놀라운 작품을 매우 신중하게 작업한 사람들이라 익히 꿰뚫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만든 까닭은 아마도 옛 전승을 존중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님에 대한 내 생각은 시간이 흐르고 삶의 여건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지만,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라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과 생각과 성찰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바뀌면서 성숙해 갔습니다. 사제계 자료는 국가의 멸망과 유배라는 엄청난 위기 속에서, 압도하는 바빌로니아의 문화와 세력에 대항하여 이스라엘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유다 왕국 사제들의 사고와 신앙, 독특한 용어가 배어 있습니다. 이처럼 연속된 흐름에서 그전에 나온 다른 내용의 전승도 이스라엘 백성의 고유한 하느님 체험과 고백이라는 점에서 일관되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아 수용한 것입니다(예컨대 시편 74,12-17; 89,11-13; 욥 26,7-13 등도 창세 1장과 매우 다른 창조 기사이지만 성경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앞에서 보았듯이 두 자료의 역사적 배경과 관점, 이야기에 나타난 생각과 표현을 비교하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배경과 연관하여 살피는 이런 작업은 본문을 이해하는 기초 과정으로 의미가 큽니다. 물론 이와 다르게 보는 방법도 여럿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현재 창세기의 본문을 존중하여 전체를 하나의 문학 단위로 읽는 작업입니다. 전체는 단지 부분 자료를 모은 것이 아닙니다. 보자기가 여러 조각보로 짜였지만 전체의 아름다움이 보이듯이, 글에서도 고유한 개별 자료들은 상호작용하면서 이야기 전체의 흐름과 메시지를 이룹니다. 부분은 전체의 빛 아래에 있습니다. 이때 부분을 잇는 문맥이 중요한데, 앞내용이 뒷내용을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됩니다. 따라서 창세기를 읽을 때에도 1장과 2장을 연속하여 한 단위로 읽되 1장의 흐름에서 2장을 읽습니다. 그러니까 1장에서 우주의 창조와 그 절정으로 인간의 창조를 크게 본 뒤에, 2장에서 땅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조를 자세히 읽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편집자는 두 이야기를 연결하려고 2,4ㄱ에 “하늘과 땅”이라는 구절을 넣어, 2,4ㄴ에 나오는 “땅과 하늘”과 서로 구분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임을 암시합니다). 이렇게 반복하거나 덧붙이는 경우는 그것이 중요한 내용이므로 서로 비추어 보고 보완해 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방식은 창세기에서 요한 묵시록까지 전체를 하나의 정경 곧 신앙 규범으로 읽는 작업입니다. 성경을 창조와 타락부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종말에 이르는 구원사의 시각으로 읽거나 하느님의 구원 진리가 계시되고 이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체험과 고백으로 읽을 때, 성경의 일부에서 드러나는 차이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 1장에서 우주 만물을 ‘보시니 좋게’ 창조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선함, 거기에 기초한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고 경탄합니다. 창세 2장에서는 인간이 무엇인지 다시 새기면서, 그들이 하느님을 거슬러 창조 질서를 깨트리며 죄의 시작을 알리는 충격적인 창세 3장을 예비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본문을 꼼꼼하게 읽는 자세와 함께 전체를 한 권으로 보는 관점이 모두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부딪치는 내용이 나란히 놓이거나 비슷한 내용이 반복해서 나타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일부분이 충돌해도 작품 전체로 보면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거나 모순된 내용을 만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를 보며 참된 의미를 찾으려고 애썼고, 직접 그 말씀대로 살면서 진정한 가르침을 깨달으려 노력했습니다. 지금 내가 어느 관점과 입장에서 성경을 읽고 있는지 점검하며, 여러 관점을 고려해 보십시오. ‘밀당(밀고 당기기)’은 연인 사이에만 필요한 게 아니랍니다.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2월호(통권 443호), 이용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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