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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요?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8-06-04 조회수6,235 추천수0

[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하느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나요?

 

 

* “저는 가끔 유혹에 빠지고서는 ‘왜 하필 하느님은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셔서…’ 하고 하느님께 제 잘못을 돌릴 때가 있습니다. 창세 2-3장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약한 존재인지 뻔히 아시면서 왜 굳이 선악과를 만드셨을까요? 애당초 그 나무가 없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20대 소피아 님).

 

 

참 안타깝죠? 아담과 하와, 성경 본문에 따르면 사람과 여자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왜 그런 일의 원인을 마련하셨는지 섭섭한 감정이 막 밀려듭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하지 말라고 하셨던 숱한 금지 사항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셔야 했는지, 본문을 다시 꼼꼼히 읽으며 전후 맥락을 살펴볼까요?

 

창세기는 하느님과 사람, 세계에 대해 알려 줍니다. 그분이 우주를 창조하시어 시간과 공간, 세계가 마련되지요. 그 토대 위에 사람과 다른 존재가 창조됩니다. 사람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이것이 사람의 기본 신원입니다. 2장에서는 사람이 ‘흙의 먼지’라는 물질과 ‘생명의 숨’이라는 영적 요소가 결합한 피조물이라고 더 자세히 밝힙니다(2,7 참조).

 

피조물은 만들어진 존재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태어나서 살다 죽습니다. 또 피조물에게는 만들어진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창세 1장에서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1,28)는 명령을 받습니다. 2장에서는 하느님께서 꾸미신 에덴 동산을 ‘가꾸고 돌보는’ 일을 맡습니다. 하느님께서 일을 맡기시는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도 함께 받는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은 하느님과 소통하고 응답할 수 있는,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로 창조되었습니다.

 

 

도대체 선악과가 뭐길래

 

피조물인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 말씀은 명령인데, 거기에는 허락과 금지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허락하신 사항은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2,16)는 것입니다.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2,9) 열매들을 모두 허락하시니, 얼마나 놀랍고 큰 배려입니까!

 

금지된 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하나입니다. 이 나무는 에덴 동산 ‘한가운데’ ‘생명 나무’와 함께 있습니다. 이 특별한 나무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특정 과일과 연관시키는 옛 전승도 있지만, 이는 고대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즉 생명, 그리고 선과 악을 아는 지식/지혜는 하느님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뜻입니다. 피조물인 사람이 본래 손댈 수 없는 영역이라고 알려 주는 경계 표시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 열매도 다른 나무 열매처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며 탐스러웠습니다(2,9; 3,6 참조). ‘탐스럽다’는 표현에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매우 끌리게 한다, 욕망을 자극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욕망이 건드려지면 어떻게 될까요?

 

도대체 선악과가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지혜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윤리적 지식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양심에 이미 주어졌습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지혜는 선과 악을 주체적으로, 자율적으로 결정하려는 의지 또는 권한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권한을 행사할 만큼 사람은 선과 악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권한을 행사한다면 사람의 삶과 생명, 공동체가 파괴될 위험이 매우 높아집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2,17)고 곧바로 경고하십니다.

 

이렇게 보니, 사람의 생명과 죽음이 선악과에 달려 있군요. 죽을 수밖에 없는 피조물인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놀랍게도 생명 나무의 열매를 허락해 주셨습니다(본문에서 그 열매는 금지되지 않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선악과를 따 먹지 않도록 금지하신 까닭은 사람을 죽음에서 보호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는 사랑의 배려입니다. 사람이 약하다고 알고 계시기에, 피조물의 한계를 지키라고, 도로의 중앙선처럼 생명의 길을 지키는 일종의 ‘위험’ 알림판을 삶의 한가운데에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물론 금지한다는 것은 그것을 지키거나 깨트릴 자유와 가능성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상처 입을 수 있는 자유까지 사람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자유를 토대로 하니까요. 그래서 금지 명령에는 늘 긴장이 따릅니다. 창세기의 이후 이야기를 이끄는 주된 동력이 이 긴장입니다. 사람은 과연 이 명령을 지킬까? 그 결과는? 그럴 경우 하느님께서 어떻게 대응하실까? 이 둘의 만남과 부딪침, 그 한계의 역동성이 구원사의 흐름을 이룹니다.

 

 

진짜 문제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

 

우리의 눈길은 선악과에 자주 머무릅니다.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왜 존재하는지 등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금지 사항보다 그것을 말씀하신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에 초점을 둡니다. 그런 면에서 금지는 명령받은 사람이 말씀하신 분을 믿고 따르는지를 보여 주는 시금석입니다.

 

금지 명령에 이어 선과 악을 아시는 하느님의 지혜가 소개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2,18)고 하십니다. ‘좋지 않다’고 판단하시는 분도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도 하느님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지혜는 신뢰할 수 있고, 신뢰해야 한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환점인 3장 1절에서 뱀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의문을 던집니다. 뱀은 하느님을, 자기 특권을 지키려고 이런 금지 조항을 내리고 죽음으로 위협하는 속 좁은 하느님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면서 결정은 여자의 몫으로 남겨 놓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은 종종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주로 계약과 연관하여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가 쌍으로 나타납니다(신명 30,19 참조).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죠. 하느님을 탓하기보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는 초대입니다.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3월호(통권 444호), 이용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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