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게 궁금해요] 왜 하느님께서 ‘우리’라고 말씀하셨나요? * 주님께서는 바벨 탑을 쌓은 인간을 보시고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창세 11,7)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여기에 ‘우리’라는 복수형이 쓰였나요? 주님은 한 분 아니신가요?(30대 허 말지나 님) 맞아요. 잘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포함하여 둘 이상을 뜻하니까요. 게다가 이 말에는 ‘우리 민족’, ‘우리 성당’처럼 어떤 범주의 동질성을 공유하는 무리라는 뜻도 배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에게도 그런 무리가 있었던 걸까요?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신앙은 매우 분명하고 확고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마르 12,29). 이 구절은 흔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고백문이라 불리는 쉐마의 첫 구절(신명 6,4)을 인용한 것입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지탱하는 근본 신앙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유일하신 하느님께서 왜 ‘우리’라는 표현을 쓰셨을까요? ‘우리’는 누구인가? 창세기에서 주(야훼) 하느님께서는 “우리”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모두 인간 운명의 중요한 순간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 창조(1,26: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와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는 인간(3,22: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그리고 지금 다루는 인류의 분산입니다. 왜 이런 경우에만 특별히 ‘우리’라고 쓰였을까요? 먼저 인간 창조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앞의 세계 창조와 인간 창조 기사가 표현과 분위기 면에서 다르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는 짧은 명령으로 하나씩 창조하셨습니다.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만들자, ~하자”고 협의하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창조하셨다, 창조하시니, 창조하셨다’고 세 차례나 ‘창조’라는 독특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다루는 분량도 훨씬 길고요. 한마디로 앞의 기사와 구분됩니다. 이렇게 표현하여 인간 창조의 독특성을 강조하고 이를 창조의 절정으로 삼고자 한 저자의 문학적 전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본래 이 대목이 독립된 단위였는데, 훗날 앞의 창조 기사에 끼워졌다고 이해합니다. 그 근거 중의 하나가 근동 문헌과의 유사성입니다. 고대 근동의 창조 서사시 <에누마 엘리쉬>에서 인간 창조 기사는 신들의 협의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우리가 쌍으로 된 (신) 람가를 죽이자. 우리가 그 피에서 사람을 창조하자…”(아시리아 본문, 토판 5,8행).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여러 신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우리’도 여러 신을 가리킬까요? 구절마다 양상이 조금씩 다른 듯하지만, ‘우리’라는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한 예로 이사야가 성전에서 예언자로 불리기 전에 이런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이사 6,8) 이때 ‘우리’는 어좌에 앉아 계신 주님과 그분을 모시는 사랍들이 함께 있는 천상 어전을 가리킵니다. 그밖에도 주님과 주님의 군대가 함께 의견을 나누거나(1열왕 22,19-23 참조), 주님과 하느님의 아들들, 사탄이 의견을 주고받는 장면도 나옵니다(욥 1,6-12; 2,1-6 참조). 일단 창세 1,26의 ‘우리’라는 말에 다른 신이나 천상 어전을 연관시킬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1장의 최종 편집자로 추정하는 사제계 학자들은 주 하느님의 유일성을 확고히 믿었으며, 그들의 글에서 천사와 같은 천상 존재가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옛 전승의 자취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비사제계 저자들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3,22의 ‘우리’는 천상 어전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심지어 하느님께서 다른 신들과 함께 있는 모습까지 결부하여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11,7의 ‘우리’는 어떨까요? 7절에서는 ‘우리’라는 복수형이 쓰였지만, 앞의 6절과 뒤의 8절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는 주님 한 분뿐입니다(3인칭 단수). 이런 경우(1,26도 같은 경우) ‘우리’의 복수 의미는 사라지고 단지 한 주체가 심사숙고한다는 의미를 담은 문학 표현으로 쓰였다고 이해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님을 한처음부터 존재하신 하느님으로 믿는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를 성부와 성자, 또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협의하시는 모습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3세기의 로마 신학자 노바티아누스는 11,7의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이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밝힙니다(《삼위일체론》 17,7). 하지만 이 단어에서 삼위일체 교의를 바로 읽어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협의하고 깊이 고려하여 의사 결정을 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에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달으라고 한 교부들의 의견은 경청할 만합니다. 좀 헷갈리죠? 간단히 말하면 ‘우리’라는 단어 하나에도 긴 역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야훼 하느님을 자기들의 주님, 최고의 신으로 섬기면서도 다른 신들을 믿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바빌론 유배를 겪으면서 야훼 하느님을 유일한 신으로 확고히 믿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수백 년의 역사를 타고 형성된 창세기의 표현에는 그런 하느님관(觀)의 변천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왜 하느님이 ‘우리’라는 복수형을 쓰셨을까?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주의 깊게 성경을 읽으면서 의문을 갖고 전후 맥락과 역사 배경을 살펴보면 성경 말씀의 뜻을 한층 깊이 새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니 찬찬히 성경 구절을 읽게 되지 않습니까? 쭉 읽으면서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절에 머물러 생각하고 새기며 기도해 보십시오. 섬세하게 말씀을 대할 때, 말씀은 좀 더 깊이 내 안으로 스며듭니다. 연인을 대할 때도 그렇지 않나요? * 이용결 님은 본지 편집부장이며 말씀의 봉사자로 하느님 말씀과 씨름하고 있다. [성서와 함께, 2013년 8월호(통권 449호), 이용결 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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